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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well Dec 26. 2021

나의 전공은?

노동경제학, 근데 이제 경제성장론을 곁들인

경제학 전공자(학부 기준)가 꽤 많은 회사를 다니고 있다 보니 복직 후 내 박사과정 전공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많다. 두루뭉술하게 거시노동 쪽을 했다고 대답하면 보통은 별 반응 없이 자연스럽게 화제가 전환되곤 했다. 거시경제학과 노동경제학 각각은 어느 정도 익숙할 수도 있는데 경제학 전공자들조차 이 두 분야의 결합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일 테니 딱히 서운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간혹 일부 경제학 박사과정을 마치신 분들께서 그럼 search and matching (노동시장의 탐색 이론) 쪽을 연구한 건지 다시 질문을 하시는 때도 있었다. 보통 대학원 과정 거시경제학 수업에서 배우는 노동 쪽 분야가 탐색 이론이다 보니 그런 것 같은데, 역시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경제성장 쪽에 더 가깝다고 보시면 된다고 말끝을 흐리게 된다. 사실 박사과정 초기에 탐색 이론을 전공할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닌데, 불행히도 내가 다닌 학교에는 이 분야를 개척한 공로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으나 학생 지도는 더 이상 하지 않던 노교수 한 명 외에는 관련 전공을 하는 교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우리 회사, 나아가서는 한국의 경제학자들이 많이 연구하지 않는 전공이다 보니 항상 내 전공을 설명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가끔씩 전공 분야의 온라인 콘퍼런스에 참석해도 참석자가 100명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전 세계로 봐도 나와 비슷한 전공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박사들은 한 분야에서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필연적으로 연구 분야가 극도로 좁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모든 박사들이 자신의 전공을 대중에게 설명할 때는 어려움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번 글에서는 한편으로는 특이하고 한편으로는 소중한 나의 전공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를 해볼까 한다. 내 졸업 논문의 첫 번째 장(chapter)에 있는 논문의 기본 아이디어를 설명할 예정인데 이해가 쉽게 될지는 솔직히 자신하지 못하겠다.



이전 글(링크)에서 언급했듯이 박사과정을 시작할 당시 나의 관심사는 근로시간이었다. 한국의 근로시간이 긴 이유에 관한 첫 번째 논문을 일단 봉합해 두고, 좀 더 본격적인 연구주제를 찾기 위해 미국의 경제활동인구조사(Current Population Survey, 이하 CPS) 미시 자료를 이리저리 가공해 보았다. 학력별, 연령별, 종사상 지위별(정규직/비정규직) 등 다양한 관점에서 평균 근로시간을 살펴보다가, 성별 근로시간의 추세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미국에서 여성의 근로시간은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었는데 2000년 이후에는 상승 추세가 둔화되었던 것이다. 그 원인에 대한 설명이 기존 논문에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생각했던 가설은 6개월 만에 엎어졌지만 다행히도 2~3주 내에 다른 가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결국 이 가설이 내 졸업 논문 첫 번째 장(chapter)의 기본 틀이 되었다. 여성의 근로시간 대신 성별 근로시간 비율(여성 근로시간을 남성 근로시간으로 나눈 비율)에 주목해 보면 이 비율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 이미 상승세가 꺾이면서 평평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서비스 오프쇼어링(offshoring)이 막 발생하여 늘어나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오프쇼어링은 비용 절감을 위하여 생산 과정의 일부를 해외에 위탁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보통 제조업에서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공장을 해외에 설립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전에는 서비스는 교역 대상이 되기 어려워 오프쇼어링도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1980년대 말 이후 정보통신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일부 서비스의 교역이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어 차이로 인해 정도가 덜한 편이지만 서구권에서는 콜 센터, 세금 관련 서류 준비, X-ray 판독,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등의 분야에서 서비스 오프쇼어링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내가 살았던 영국만 해도 콜 센터에 전화하면 인도, 파키스탄 등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영어 부담 때문에 원래도 쉽지 않았던 콜 센터와의 통화 난이도가 극악 수준까지 올라가곤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서비스 오프쇼어링과 성별 근로시간 비율 간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개발도상국에 일부 서비스를 오프쇼어링하게 되면 미국에서 해당 서비스에 종사하던 근로자들이 직장을 잃게 된다. 그런데 직업 관련 데이터와 CPS 데이터를 결합하여 계산해 본 결과 여성 노동자들을 많이 고용하는 판매 및 사무 보조직의 오프쇼어링 가능성이 더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1990년 이후 판매 및 사무 보조 직군 노동자의 비중이 남성의 경우 큰 변화가 없었으나 여성은 눈에 띄게 하락하였다. 이러한 정황 증거를 종합하여 서비스 오프쇼어링이 1990년대 초중반 이후 늘어나면서 오프쇼어링 가능성이 높은 직업의 일자리가 줄어들었는데, 이 직종은 여성 고용 비중이 높기 때문에 결국 여성의 일자리가 남성보다 크게 감소함에 따라 성별 근로시간 비율의 상승세가 줄어들게 되었다는 논문의 기본 줄거리를 만들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뒷부분에서는 경제학 모형을 구축하고 이 모형을 이용하여 위에서 설명한 경로가 실제 성별 근로시간 비율의 변화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지를 계산해 보았다. 그 결과 서비스 오프쇼어링이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논문의 키워드로는 대략 오프쇼어링, 구조 변화(structural transformation), 성별 격차, 직업 등을 들 수 있다. 구조 변화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중심 산업이 농림어업에서 제조업, 서비스업으로 차례대로 이동하는 현상을 말한다. 남성과 여성이 각각 제조업 및 서비스업에서 상대적으로 강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제가 서비스업 중심으로 변화해 감에 따라 여성의 상대적 고용이 늘어나게 된다. 이 논문에서 성별 격차는 동일한 생산성을 보이더라도 남성과 여성 간에 임금 격차가 존재한다는 가정을 통해 반영되어 있다. 또한 남성과 여성이 많이 고용되어 있는 직업군의 특성이 다르다는 점도 논문에서 설명되어 있다.


사실 지도교수의 주된 연구 분야가 구조 변화와 성별 격차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분야를 따라가게 된 측면도 있다. 내 논문의 모형도 지도교수의 논문에 나오는 모형의 기본 요소를 많이 활용하였다. 내 논문이 그나마 독창적이었던 부분은, 지도교수의 기존 논문에 오프쇼어링과 직업에 관련된 요소를 추가하여 새로운 현상을 설명한 것이다. 학계 전체에서의 기여도로 보면 해변의 모래 한 알 속에 있는 원자 하나 정도가 될까 말까 하겠지만, 어쨌든 이 논문 덕분에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이 계신다면 정말 감사드리고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드리고 싶다. 사실 읽으신 분들도 '뭘 한가하게 이런 것까지 연구하고 있나' 생각하실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드신다면 '파리학과 출신들의 지식경영 추진 방법'(링크)이라는 글을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린다. 나의 논문을 이 글에 나오는 파리학과 박사과정생의 '1년생 파리 뒷다리 발톱의 성장패턴이 파리 먹이 취득 방식에 미치는 영향' 논문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다. 일견 의미 없어 보이는 이런 연구들이 충분히 축적된다면 그중에 인류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도 한두 개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단순히 나의 박사 학위만을 위해 아무 의미도 없는 논문을 세상에 하나 더 추가하지 않았기만을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events.newschool.edu/event/economics_seminar_series_-_nssr_economics_pa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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