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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노동: GDP가 말해주지 않는 것

by Muswell

GDP(Gross Domestic Product)는 국내총생산을 의미한다. 한 국가의 경제규모와 성장률을 계산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대부분 한 번쯤은 접해보았을 것이다. 보통 거시경제학 교과서 첫 부분에 GDP에서 파생된 수많은 지표들이 소개되는데 이 중에는 국가 간 교역이 그리 활발하지 않았던 시기에 GDP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국민총생산(GNP), 1인당 국민소득을 산출할 때 주로 이용되는 국민소득(GNI) 등이 있다.


모든 통계지표가 그렇듯 GDP를 통해 측정할 수 없는 항목도 수없이 많다. 예를 들어 GDP는 자연환경에 미치는 피해를 고려하지 않고 보건이나 교육 등의 측면에서 삶의 질을 나타낼 수 없으며, 정치적 자유와도 관계가 없고 소득 분포에 대한 정보를 전혀 전달해 주지 않는다.(링크 참조) 이렇게 GDP가 말해주지 않는 수많은 항목들 중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가사노동이다.



GDP를 통해 가사노동을 수량화할 수 없다면 가사노동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시간 사용(time use) 통계를 통해 평균적으로 가사노동에 투입된 시간을 대략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계청에서 1999년부터 5년에 한 번씩 '생활시간조사' 통계를 발표하고 있다. 이 통계는 보통 응답자들이 3일(금, 토, 일요일), 72시간 동안 했던 모든 행동을 15분 단위로 일기장(time diary) 식으로 기입한 설문지를 토대로 산출된다. 3일 동안 설문지를 작성하는 이유는 보통 평일과 토요일, 일요일에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생뚱맞게 느껴질 수 있으나 KBS에서도 1981년부터 2년 또는 5년 간격으로 '국민생활시간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통계청보다도 훨씬 일찍 시작한 것인데 아마 TV, 라디오 시청 시간 통계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형에서 가사노동을 명시적으로 고려하는 경제학 논문에서는 주로 home production(가정 내 생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가사노동을 생산의 일부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시장에서 가사노동을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대신할 수 있는 서비스가 돈을 받고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리를 하는 대신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고, 청소, 빨래, 설거지 등의 집안일을 가사 도우미를 고용하여 해결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가사 서비스가 시장화(marketization)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레이미(Valerie Ramey)는 2009년에 발표한 논문(Time Spent in Home Production in the Twentieth-Century United States: New Estimates from Old Data, 링크)에서 1900년 이후 미국의 가사노동 시간 데이터를 제시하였다. 아무리 미국이 선진국이라지만 공식적인 시간 사용 통계를 1900년부터 발표했을 리는 없기 때문에 이 데이터는 여러 가지 참고 자료를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추정한 수치이다. 그렇지만 1세기에 걸쳐 일관된 기준으로 통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분명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미국에서 여성이 가사노동에 투입한 시간이 1900년 이후 꾸준히 줄어든 반면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늘어났으며 전체 인구의 1인당 가사노동 시간은 약간 증가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추세도 미국과 비슷하다. 1990년대 이후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감소하고 있는 반면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증가하고 있다. 대신 그 폭이 미국만큼 급격하지는 않다. 또한 소득이 늘어나고 주 5일 근무제 등이 도입되면서 남성과 여성 모두 근로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하루 24시간이 근로시간, 가사노동, 여가시간 및 기타 개인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타 개인 시간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여성의 여가시간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남성도 근로시간의 감소폭에 비해 가사노동 시간의 증가폭이 미미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여가시간이 증가하고 있다.


나이(Rachel Ngai)와 페트롱골로(Barbara Petrongolo)의 2017년 논문(Gender Gaps and the Rise of the Service Economy, 링크)은 시장에서 제공되는 서비스가 가사노동을 불완전하게 대체할 수 있다는 가정을 도입하였다. 서비스업의 생산성 향상 속도가 가사노동보다 빠르면 시장 서비스를 생산하는 비용이 빠르게 줄어들기 때문에 가격이 가사노동의 가격(기회비용)보다 더 낮아지게 된다. 그러면 가정 내에서 가사노동을 하기보다는 일을 하고 받은 임금으로 가사 서비스를 구입하는 것이 더 유리하므로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가 늘어나게 된다. 논문은 이 모형이 미국에서 여성 고용률 상승의 상당 부분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사노동을 명시적으로 모형에 반영함으로써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하는 행동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간 사용 통계를 통해 가사노동의 추세를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지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시간 사용 통계의 작성 주기가 길어서 적시성이 떨어지고, 통계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GDP 통계는 계속해서 약점을 보완하는 쪽으로 개선되어 왔기 때문에 지금은 GDP가 측정하지 못하는 가사노동도 언젠가는 반영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물론 그때는 GDP가 아닌 다른 명칭을 사용하게 될 수도 있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www.bea.gov/data/special-topics/household-p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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