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을 읽고
이 글에서 소개할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이라는 책은 아래와 같은 단락으로 시작한다.
10년쯤 전에, 경제학자인 우리는 우리가 수행했던 연구 내용들을 담은 경제학 책을 한 권 썼다. 놀랍게도 그것을 읽어 주시는 독자분들이 계셨다! 우리는 우쭐했지만 그런 일이 또 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경제학자는 '책'을 잘 쓰지 않고, 인간이 읽는 게 가능한 책은 더더욱 잘 쓰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책을 쓰게 되었고 다행히 잘 넘어갔지만, 다시 우리 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학술지 논문을 쓰는 일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아비지트 배너지(Abhijit Banerjee)와 에스테르 뒤플로(Esther Duflo)라는 두 경제학자다. 이들은 마이클 크레이머(Michael Kremer)와 함께 2019년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고, 대학원 지도교수와 학생으로 처음 만나 부부가 되었다. 뒤플로는 역대 최연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만 47세에 수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들은 경제학 계의 톱스타다.
두 저자는 학문적 성과와 쉽게 읽히는 글을 쓰는 능력은 별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노벨상까지 탄 사람들이 굳이 책의 서문에서 저렇게까지 겸손한 (또는 냉소적인) 인식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이들의 전작인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와 이 책을 모두 읽은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배너지와 뒤플로가 인간이 읽을 수 있는 경제학 책을 쓰는 보기 드문 경제학자라는 점이다.
단, 주의할 점은 있다. 이 책은 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다. 책의 내용을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전통적인 이론부터 최신 경제학 논문의 결과까지 종횡무진 누비면서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 10년 전쯤 유명한 과학 교양서 중 하나로 꼽히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꾸역꾸역 다 읽고 나서 정말 무슨 내용인지 1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그 당시의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동안 너무 많이 인용이 되는 바람에 이제는 식상한 느낌도 살짝 들지만, 정말 아는 만큼 보이는 게 맞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은 데 더하여 주석에 있는 논문 목록도 유심히 보면서 대학원 때 배웠던 내용을 새롭게 업데이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기초적인 수준의 사전 지식만 있어도 충분히 이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사는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인 경제학에는 자연과학처럼 절대적인 지식이 있다기보다는 현시대에 대략적으로 합의되었지만 상황이 바뀌면 변화할 수 있는 사실이 여럿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견해를 대략적으로만 이해하고 나서 그냥 이런 게 있구나 생각하고 넘어가도 훌륭한 수준의 독서라고 본다.
두 저자의 원래 전공분야는 개발경제학(development economics)이다. 노벨 위원회는 이들에게 경제학상을 수여한 이유로 '국제 빈곤을 완화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접근한 공로'를 들었다. 이들의 첫 번째 책은 주로 개발경제학 분야의 연구 결과를 설명했지만 이 책에서는 이민, 무역, 성장, 소득 불평등, 기후 변화,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취향 등 경제학 전반으로 범위를 넓혔다. 그러면서 언론이나 정치가들의 입에서 나오는 구호가 아닌 실제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경제학의 내용을 각 분야의 전문가인 동료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최신 연구결과를 기반으로 소개하고 있다. 한때 유행했던 '선한 영향력'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참으로 착한 얼굴을 가진 경제학자들이다.
그러나 잘못된 인식이나 사실을 호도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착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이민자의 유입이 내국인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주장에 대해 수많은 논문들을 근거로 반박을 하며, 정부의 비효율성에 대한 지적에는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정부는 민간에서 할 수 없는 일을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민간 부문과 효율성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인다. 심지어 전통적으로 경제학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던 '무역은 모두를 이롭게 한다'라는 명제에도 의문을 제기하며, 경제학자들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경제 성장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고까지 얘기하고 있다.
주류 경제학의 방법론을 이용하여 노벨상까지 탄 대가들이지만, '착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를 가지고 경제학계의 전통적인 주장에 대해서도 치밀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모습이 정말 멋있게 느껴졌다. 이 책 첫 장의 제목이 'MEGA: 경제학을 다시 위대하게'*인데 책을 읽고 나니 두 저자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경제학자들이 더 많아진다면 정말로 경제학이 다시 위대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이 제목에 대한 옮긴이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016년 대선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Maker America Great Again, MAGA' 중 미국을 경제학(economics)으로 패러디한 것이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theeconreview.com/2018/06/04/how-are-economists-portrayed-by-the-media-lets-ask-th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