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식독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uswell Dec 14. 2022

할머니 킬러의 파란만장 인생 이야기

구병모의 『파과』를 읽고

이 책의 제목인 '파과'를 네이버 사전에서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파과(破瓜): 1. 여자의 나이 16세를 이르는 말, 2. 남자의 나이 64세를 이르는 말
파과(破果): 흠집이 난 과실


밀리의 서재에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생소한 제목과 작가로 인해 내용을 전혀 짐작할 수 없어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유튜버 '겨울서점'이 재미있다고 추천을 한 후에야 이 책을 읽었는데, 사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제목이 무슨 뜻인지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이 글을 쓰면서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져서 사전을 찾아봤다.


냉장고에 넣어둔 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상한 상태에서 발견되는 과일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파과'의 의미는 '흠집이 난 과실' 쪽에 더욱 가까워 보인다. 그렇지만 제목을 첫 번째 뜻인 '여자의 나이 16세'로 해석할 여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주인공인 조각이 본격적인 킬러로서 활동을 시작한 시기가 그 정도 나이였기 때문이다. 표지 제목에는 한자가 없는 대신에 한 여성의 실루엣이 보이는데 이는 작가가 일부러 중의적 해석을 유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각은 방역업계(라고 소설에서는 부르고 있지만 세스코와 동종업계는 아니고 살인청부업을 의미한다.)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여성 베테랑으로 65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신체와 정신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던 터에 한 방역 현장에서 큰 부상을 당했으나 강 선생이라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 겨우 회복한다. 조각과 같은 업체에서 일하는 투우라는 젊은 킬러가 강 선생의 가족을 볼모로 조각에게 이유 없는 적의를 드러내며 접근하자 조각은 투우와의 결전에 나선다. 투우가 조각에게 싸움을 건 이유는 둘의 범상치 않은 인연 때문인데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생략한다.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지 5분도 안 되어 문장 곳곳에 넘쳐흐르는 냉소적인 기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작가인 구병모의 약력을 찾아보았다가 그가 2009년에 창비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전개인데, 마치 현대미술 작가가 경력 초창기에는 멀쩡한 작품을 그리다가 점차 범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작품 세계로 빠져드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그래도 처음의 고비를 넘기면 문체에 금방 적응이 되는데 전반적으로 문장이 냉소적인 가운데서도 소설의 중요한 흐름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너스레도 가끔 들어가 있고 전반적으로 수다 떠는 느낌도 강해서 읽다 보면 헛웃음을 짓게 하는 문장도 많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조각도 한없이 냉혹한 킬러같이 보이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은근히 따뜻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소위 츤데레였다.


소설의 설정이 예사롭지 않은 만큼 등장인물들도 개성이 넘치는데, 작가의 엄청난 작명 센스가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주인공은 한때 '손톱'으로 불렸는데 이름인 '조각'(爪角)은 짐승의 발톱과 뿔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적으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조각이 데려와 키우는 반려견의 이름은 '무용'인데 한자로 無用이라면 뭔가 너무 정을 주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지은 이름인 것 같지만 직업 특성상 언제 이 세상과 하직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반려견을 키운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없다는 자조적인 깨달음을 반영한 이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투우'는 鬪牛로 추측되며, 확실하지만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조각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이 투우사의 붉은 천만을 보고 달려드는 소의 이미지와 확실하게 겹쳐진다.


소설의 절정 부분에서 펼쳐지는 조각과 투우의 격투 장면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읽었는데도 손에 땀을 쥘 만큼 긴박감 넘치는 장면이었다. 방역업계의 실력자 두 명의 싸움답게 주고받는 합 하나하나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격렬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실전 무술에서 고수들이 보여줄 법한 간결하고 치명적인 기술들이 아름답게 묘사되었다. 스타일리시한 연출을 하기로 유명한 김지운 감독이 이 장면을 찍으면 딱 맞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방역업계에 치열하게 젊음을 바친 결과 이미 대모의 자리에 오른 할머니 킬러의 인생 이야기는 생각보다 상당히 흥미로웠다. 나이가 들면서 젊었던 시절의 날카로움은 다소 무뎌지고 수다와 오지랖이 늘어가고 있지만 오히려 그 점이 인간적으로 다가오면서 더 좋았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흠집이 난 과실' 취급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을 조금씩 긍정하기 시작하는 모습도 뭉클하게 느껴졌다. 딱히 도덕적인 결론에 이르거나 본받을 만한 인생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이렇게 평소에 상상하기 힘든 인물의 인생을 롤러코스터에 같이 탄 듯 정신없이 함께 경험해 보는 것도 소설을 읽는 재미가 아닌가 싶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view.ridibooks.com/books/3594000038

매거진의 이전글 달이 있기는 한 건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