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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well Feb 05. 2023

내 아이에게는 따뜻했던 태극기 부대 할아버지

어느 토요일 오전. 아내가 평소에 아이가 좋아할 것 같다며 꼭 가보고 싶어 했던 한 어린이박물관의 체험을 예약하는 데 성공했으니 거길 가자고 했다. 불행하게도 종로구에 있는 이 박물관에는 주차장이 없었는데 근처 다른 주차장을 이용하기에는 너무 멀고 날씨도 추워서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버스에 올라타니 자리가 애매하게 남아 있었다. 버스 뒤쪽까지 가서 앉기에는 아이에게 다소 위험해 보였고, 앞쪽에 노약자석이 두 자리씩 두 줄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태극기가 크게 그려진 모자를 쓴 할아버지 두 분이 각각 안쪽 자리를 남겨둔 채 복도 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아이와 같이 서 있었더니, 그중 한 분이 선뜻 안쪽 자리로 옮겨가며 아이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아이는 쭈뼛쭈뼛 복도 쪽 자리에 앉았는데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무서워 보였는지 자꾸 두 다리를 복도 쪽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떨어지면 큰일 난다'며 아이의 다리를 두 손으로 모아 반듯하게 정리해 주었다. 종로까지 가는 길에 손자 생각이 났던지 계속 따뜻한 눈길로 아이를 보던 할아버지는 우리보다 앞서 광화문에서 내렸다.



평소 태극기 부대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었다.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지키고자 하는 가치는 당연히 다를 수도 있다고 봤지만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까지 함께 흔드는 것은 상당히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일부 심층 기사 등을 통해 그들도 나름 그렇게 주장하는 맥락과 사정이 있음을 머릿속으로는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근본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내 아이에게 따뜻하게 대해 준 태극기 부대 할아버지를 보게 되면서 그런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단지 그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생각이 나와 다를 뿐 아이에게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는 인간 본성의 측면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들의 생각까지 이해하게 된 것은 물론 아니지만,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내가 그들을 적으로 생각하거나 다르게 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보통 여러 가지 모순되어 보일 수도 있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있다. 회사에서는 싹싹한 직원이 연인 관계에서는 소위 '나쁜 남자'일 수도 있고, 학계에서 존경받는 교수가 가정에서는 불화를 겪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무의식 중에 나는 한 가지 모습을 통해 그 사람을 재단하는 실수를 반복해 왔다. 잠시만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인데 생각하기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으로 살아온 것이다. 앞으로도 그런 실수를 전혀 안 할 수는 없겠지만, 의식적으로라도 노력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반성할 측면이 있지만 점점 정치적 성향이 양극단으로 갈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특히 정치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가슴깊이 새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과 이해관계의 차이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정치란 다른 집단의 이해관계의 차이를 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각이 다른 집단을 적으로 몰아가 문제를 우격다짐으로 해결한다면 그건 선동일뿐 정치가 아니다. 물론 말로 하니 쉬울 뿐 실제 생각이 다른 집단의 의견을 조정하는 과정은 많이 힘들겠지만, 굳이 그런 어려운 일을 잘해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니 그 정도는 충분히 요구해도 된다고 본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2081516580004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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