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로가 아타우알파를 생포한 사건은 유럽인들이 신세계를 식민지로 만든 직접적 요인(군사 기술, 유리시아 고유의 전염병, 해상 기술, 중앙 집권적 정치조직, 문자 등)의 예를 보여준다. - 총. 균. 쇠 p92 」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계기로 구세계 사회와 신세계 사회의 본격적인 충돌이 시작된 이후 가장 극적인 사건은 아타우알파 생포 사건이다. 잉카의 황제였던 아타우알파는 1532년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를 만나게 되는데 이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는 더 없는 기회였지만 아타우알파에게는 재앙의 시작이었다.
똥개도 자기 동네에선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은 적어도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당시 피사로의 병력은 168명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들이 있는 곳은 고향 스페인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낯선 곳이었다. 반면 아타우알파는 8만 명의 병력을 거느린 잉카제국의 황제였다. 이런 조건하에서 둘이 맞붙는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피사로에게 불리한 조건이다. 그러나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무려 8개월 동안 인질로 붙잡아 놓으며 가로 6.7m, 세로 5.2m, 높이 2.4m가 넘는 방을 가득 채울 만큼의 황금을 몸값으로 받았다. 이는 역사상 가장 많은 몸값이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어느 날 갑자기 '뿅'하고 잉카 황제를 생포한 것은 아니다. 성공 이면에는 피 땀 눈물이 있었다. 군인 아버지와 도시 빈민층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1509년 지금의 콜롬비아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하러 떠나지만 기후와 질병의 문제로 인해 식민지 개척에 실패한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1513년 다시 바스코 발보아의 선단에 합류해 신대륙의 문을 두드린다. 그로부터 6년 후 피가로는 식민지 총독의 신임을 얻기 위해 바스코 발보아를 제거한다.
한국에 곽철용(a.k.a 아이언 드래곤)이 있다면 스페인에는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있다. 잘난 놈 제낀 곽철용처럼 피사로 또한 잘난 놈을 제껴가며 커리어를 쌓아갔던 것이다. 피사로는 1524년과 1526년에는 남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에 도전하지만 역시 기후와 질병으로 인해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피사로는 이에 굴하지 않고 또다시 남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을 시도한 결과 1532년 잉카 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생포하며 식민지 개척을 이루어낸다.
식민지 개척을 향한 그의 끈기와 능력은 인정한다만 그에게 존경심이 들지는 않는다. 비록 피사로 본인의 땀은 포함됐을지 몰라도 그 보다 많은 타인의 피와 눈물로 일궈낸 성공을 손뼉 쳐주고 싶지는 않다. 결핍과 탐욕의 인생을 살아온 피사로는 결국 원수의 아들에게 살해당하는 걸로 생을 마감한다.
1532년 잉카제국 황제 아타우알파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생포당하고 이로 인해 잉카제국은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사실 아타우알파는 200명도 채 안 되는 병력은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고 이로 인해 아타우알파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비극이 시작된다.
머릿수로는 상대가 안될 것이라 판단한 피가로는 아타우알파를 대면한 자리에서 기습적으로 그를 생포하는데 당시 아타우알파는 술에 취해 있었다고 전해진다. 술에 취해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방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반면 피가로는 기습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 마크 트웨인
사실 8만 명과 168명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생포할 수 있었을까?
「피사로의 군사적 이점은 스페인의 쇠칼을 비롯한 무기들, 갑옷, 총, 말 따위였다. 그러한 무기에 대항하여 싸움터에 타고 갈 동물도 갖지 못한 아타우알파의 군대는 겨우 돌, 청동기, 나무 곤봉, 갈고리 막대, 손도끼. 그리고 물매와 헝겊 갑옷 등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장비의 불균형은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및 기타 민족들 사이의 수많은 대결에서도 역시 결정적이었다. - 총. 균. 쇠 p103 」
총소리를 실제로 들어보면 생각 이상으로 큰 소리가 난다. 말도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크다. 피가로의 군대를 만나기 전까지 아타우알파를 비롯한 잉카 사람들은 총은 물론 말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총을 쏘며 말을 타고 달려드는 스페인 군대를 목격한 잉카 군대는 패닉에 빠졌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압도적인 장비의 차이는 500배가 넘는 병력수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과 잉카제국의 차이는 장비만이 아니었다. 스페인에는 어떻게 보면 장비보다 중요한 문자가 있었다. 스페인인들은 문자가 있었기에 인간의 행동과 역사에 다한 방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었다. 반면 잉카제국의 아타우알파는 역사적으로 앞선 다른 시대에 무수히 일어났던 유사한 침략 행위에 대해서 전혀 듣지도 읽지도 못했다.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두고 블랙스완이라 표현한다. 아타우알파에게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블랙스완이었던 것이다. 잉카제국 멸망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과 기록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나는 여기서 스페인군의 진정한 무기는 총이 아닌 문자와 기록으로 남겨진 지식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피사로의 아타우알파 생포 사건이 의미 있는 이유는 현재 서양이 동양보다 앞서 나가는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인데 서양이 앞서 나가는 이유가 인종간 생물학적 차이에 있지는 않다.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총, 균, 쇠로 대표되는 유럽인들이 신세계를 식민지로 만들 수 있던 직접적 요인 이면에는 환경적 요인이 컸기 때문이다.
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의 모양을 살펴보면 유라시아 대륙은 동서로 넓게 뻗어 있는 반면 아메리카 대륙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동서로 넓게 뻗어있으면 기후의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워 농경생활이 전파되기 용이하다. 반면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환경에서는 농경의 전파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제주도에서 자라는 감귤을 개마고원에 가져다 놓으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인류의 먼 조상이 어느 날 갑자기 농경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수렵채집과 농경 둘 다를 통해 식량을 구했다. 사냥에 성공하면 맛있는 고기를 얻을 수 있지만 늘 사냥에 성공할 수는 없기에 실패했을 경우 굶어 죽지 않기 위함으로 농경을 시작했다.
동물을 가축화하면서 농경은 발달하게 되는데 사람이 밭을 가는 것보다 소가 밭은 가는 게 훨씬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농경의 발달은 잉여 식량의 저장을 가능하게 했고 이로 인해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계층화된 사회가 형성되었다. 동물의 가축화는 농경을 발달시키는 동시에 유행병이 창궐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홍역, 결핵, 천연두, 인플루엔자 등의 전염병은 소, 돼지, 오리에게서 비롯되었다.
인구밀도가 높아짐으로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문자의 발전 정치 조직이 만들어지게 되고 기술 또한 발달하게 된다. 농경생활로 시작된 사회의 팽창이 콜럼버스 시대에 가서 최대치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총. 균. 쇠》를 읽다 보면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 생각한 것이 실은 운이 좋았거나 환경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의 흐름 속에 차곡차곡 쌓인 유산의 혜택을 받고 있다고 말이다.
더불어 프란시스코 피사로나 아타우알파 같은 역사적 인물의 사례를 통해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을 배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