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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승 강경빈 Jan 20. 2020

결핍의 역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명저 <총, 균, 쇠>에서는 각 대륙의 환경적 차이가 발전의 차이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세계지도를 보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남북으로 뻗어있는 반면, 유라시아 대륙은 동서로 뻗어있다. 



동서로 뻗어있는 대륙은 농업의 확산이 유리하다. 그 이유는 같은 위도에서는 기후, 식생, 토양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반면 남북으로 뻗은 대륙에서는 농업의 확산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제주도 감귤나무를 개마고원에 심으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 보면 된다. 


농업이 확산된 배경에는 비슷한 기후, 식생, 토양뿐 아니라 가축화된 동물의 차이도 존재한다. 사람이 밭을 가는 것보다는 소가 밭을 가는 게 훨씬 빠르고 편하다. 유라시아 대륙에는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이 13종 있었는데 반해 아메리카는 1종뿐이었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는 단 1종도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이 없었다. 


농업에 유리한 기후, 식생, 토양 그리고 농업 생산성을 높여줄 가축으로 인해 유라시아 대륙에서 발생한 농업혁명은 사회를 확장시키고 세분화시키는 근본 요인이 되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잉여 식량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사냥에 실패하면 굶어야 했고 어쩌다 운이 좋아 매머드 같은 커다란 사냥감을 사냥해도 오랫동안 보관할 수는 없었다. 반면 곡식은 보관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까닭에 농업혁명 이후 잉여 식량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잉여 식량을 보관하는 과정에서 발명된 문자로 인해 인간은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문자는 근대화된 사회에 힘을 가져다주었다. 문자가 있으면 더 먼 곳, 더 오래된 시대에 대해 훨씬 더 정확하며 훨씬 더 자세하고 풍부한 지식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민족은 문자가 없어도 제국을 다스릴 수 있었고 훈족과 싸운 로마 군대가 몸소 체험했듯이 '문명인'들이라고 반드시 '미개인'들을 이길 수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전형적인 결과는 유럽인들이 남북 아메리카, 시베리아, 오스트 레일이라 등을 정복한 것이었다. - <총, 균, 쇠> p315



가축화된 동물이 인간에게 제공한 것은 노동력뿐만이 아니었다. 가축은 인간에게 '균'을 선물했다. 선물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비록 초기엔 균 때문에 고생했지만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기도 하기에 '균'은 유럽인들에게 선물이나 다름없다.


신세계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콜럼버스가 도착한 이후 한두 세기에 걸쳐 인디언의 인구는 최대 95%가 감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디언들이 죽은 주된 요인은 구세계의 병원균이었다. 인디언들은 그런 질병에 노출된 적이 없었으므로 면역성이나 유전적인 저항력이 전혀 없었다. - <총, 균, 쇠> p309


목숨을 위협하는 '균'에 저항할 수 있는 면역력이 있었고, 후대로의 지식 전파가 가능했던 문자가 있었기에 기술력을 발전시킬 수 있던 유럽인들은 총, 균, 쇠를 앞세워 아메리카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중국이 아닌 유럽일까?' '환경적인 요인이 비슷하다면 유럽과 중국의 차이점은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문명을 발전시킨 4대 문명은 황하,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이집트 문명이다. 여기에 유럽은 없다. 아시아(황하, 메소포타미아, 인더스)와 아프리카(이집트)만 있을 뿐

4대 문명이 큰 강을 끼고 발전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농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비옥한 토지만큼이나 물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이 전부라고 한다면 비옥한 토지와 큰 강을 끼 고경정적인 있는 중국이 아메리카는 물론 유럽을 지배했어야 된다. 


물의 역사에서 결정적 전환점이 되는 사건은 7세기 초에 대운하가 완성된 일이다. 동시대 다른 문명에 비해 황허 문명이 크게 비상하게 된 특출한 사건이었다. 뉴욕에서 플로리다까지의 길이에 해당하는 대운하는 인간이 만든 가장 긴 수로이다. 남북으로 이어진 이 운하는 중국 광대한 지역의 다양한 생산 자원들을 통제하는 강력한 중앙 정부와 자체 군사 방어 능력을 갖춘 민족국가를 통합했다. - <물의 세계사> p125


 중국이 유럽에 뒤쳐진 이유는 통합된 사회 때문이다. 일찍이 대운하를 건설하고 황제가 지배하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거듭한 중국은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유럽인들이라고 해서 대운하를 건설할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다. 793년부터 시작된 도나우강과 라인강을 연결하는 운하 건설은 1992년에 이르러서 완성됐는데 지리적으로 유럽의 주요 강들은 서로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도나우강은 그 자체로 천연 국경을 형성한다. 유럽의 주요 강들이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점과 피레네 산맥, 알프스 산맥의 영향으로 유럽은 통합되지 못했다. 


분열된 유럽에 비해 통합된 중국은 더 많은 부와 기술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으나 다음 단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핵심적인 답만 간략히 이야기하라면 강력한 고립주의적, 중앙집권적 국가의 등장이 시장지향적인 경제 엔진의 등장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 <물의 세계사> p156


지리적으로 분열된 유럽에서는 정치적 집단 사이의 경쟁이 혁신을 자극한 반면, 통합된 중국에서는 그러한 경쟁의 부재가 혁신을 주춤하게 했다고 추론했다. 그러면 유럽보다 정치적 분열의 정도가 더 심하면 더 좋을 질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인도는 지리적으로 유럽보다 훨씬 더 분열되어 있었지만 기술적으로는 덜 혁신적이었다. - <총, 균, 쇠> p665


혁신을 통한 발전을 위해서는 통합과 분열 사이에 최적점을 찾아야 한다. 나라를 통합한 중국 황제는 부유했고 분열된 유럽의 황제들은 상대적으로 가난했을 뿐 아니라 사방이 적이었다. 콜럼버스보다 몇십 년 앞서 정화 함대의 원정이 계속되지 않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중국 황제에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다는 것은 기회라기 보단 위협에 가까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중앙집권 국가였던 까닭에 감히 황제에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겠습니다 라고 먼저 말을 꺼냈을 무모한 신하또 한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간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반면 정치적으로 분열된 유럽에서 태어난 콜럼버스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콜럼버스에게 베팅한 유럽은 신세계를 개척하고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까지 지배할 수 있었다. 중국이 아닌 유럽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열 때문이었다.



유럽과 중국의 사례를 통해 깨달은 점은 결핍의 힘이다. 유럽은 환경의 이점을 본 동시에 환경으로 인해 중국보다 불리한 조건에 처해진다. 개인도 비슷하다. 부모가 자식을 선택할 수 없듯 자식 또한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태어나 보니 그런 환경에 처해있는 것이다. 잘 나가던 중국이 아편전쟁으로 몰락한 것처럼 부족함 없이 태어난 게 축복일 수 있지만 재앙이 될 수 있다. 오히려 적당한 결핍과 부족함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결핍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결핍을 극복하는 힘은 겸손함과 호기심에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과학혁명은 무지 혁명이다. 


현대 과학은 과거의 모든 전통 지식과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첫째,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기. 현대 과학은 라틴어로 표현하면 '이그노라무스(Ignoramus) - 우리는 모른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면 틀린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개념이나 아이디어, 이론도 신성하지 않으며 도전을 벗어난 대상이 아니다.


둘째,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치 차지. 무지를 인정한 현대 과학은 새로운 지식의 획득을 목표로 삼는다. 그 수단은 관찰을 수집한 뒤, 수학적 도구로 그 관찰들을 연결해 포괄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셋째, 현대 과학은 이론을 창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론을 사용해서 새 힘을 획득하고자 하며 특히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자 한다. 

과학 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 <사피엔스> p356 


안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기꺼이 도전하는 호기심이 있다면 중국을 따돌린 유럽의 역사적 사례는 개인의 역사적 사례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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