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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승 강경빈 Jan 24. 2020

나는 왜 쓰는가?

읽고, 쓰고, 말하기

아.. 맞아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못해 답답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을 땐 이미 상황 종료. 버스는 이미 떠났다. 의사표현이 제대로 안되다 보니 나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고,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을 맡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때는 생각을 표현 못하는 이유를 순발력 탓이라고 여겼었다. '센스 없음'이라는 자기 충족적 예언은 나를 더 의기소침하게 만들었고 뫼비우스의 띠 마냥 악순환의 고리를 뱅뱅 돌았다. 




그런데 의사표현을 제대로 못했던 건 순발력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내 생각이 없었을 뿐이고 그나마 있는 생각은 정리되지 않은 채 무의식의 바다를 둥둥 떠다녔기에 정작 필요할 때 표현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생각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을 만드는 과정은 요리의 과정과 비슷하다.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료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을 만들기 위해서도 재료가 필요한데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는 '남의 생각'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남의 생각을 취하는 것은 곤란하다. 


요리의 맛은 좋은 재료가 70%를 좌우하는 것처럼 생각을 만들 때도 재료가 중요하기 때문에 재료 선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재료 선정을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다. 책은 생각을 글로 정리해 놓은, 이를테면 내장을 제거한 생선, 흙을 씻어낸 당근처럼 손질된 재료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손질된 생각의 재료다. 그렇지만 모든 책이 양질의 재료인 것은 아니다. 고구마 한 박스를 사면 그중 몇 개는 무른 고구마가 들어있다. 상한 생선은 위험하다. 


책도 마찬가지로 양서가 아닌 책은 해롭다. 책을 끝까지 읽기 위해선 최소 몇 시간은 들여야 된다. 책 읽은 시간 동안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비용을 포기하고 읽은 책이 쓰레기라면... 얼마나 큰 낭비인가? 차라리 그 시간에 잘 만든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게 낫다. 일류 요리사들은 재료 선정부터 까다롭다. 마찬가지로 내 생각을 만들기 위한 생각의 재료도 까다롭게 골라야 한다. 까다롭게 고르다 보면 좋은 재료를 보는 눈이 생긴다. 


독서를 통해 재료 선정을 마쳤다면 다음 단계는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하는 것인데 요리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할 것이다. 무언가를 읽었다. - 읽은 것을 말할 기회가 생겼다. - 말하면서 읽은 것이 정리되고 막연했던 것이 확연해졌다. - 내 얘기를 들은 다른 사람이 내 말에 살도 붙여준다. - 들으면서 배운다. - 듣고 느낀 것을 어딘가에 쓴다. - 쓰다 보니 반응이 온다. - 인정받은 느낌이 든다. - 더 쓰고 싶다. - 글쓰기가 재밌다. - 쓰기 위해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듣는다. - 내 안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 나날이 내가 향상된다. - <강원국의 글쓰기> 中




결국 읽고, 쓰고, 말하기는 나에게 이롭다. 실제로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 생각을 잘 표현하게 되었다. 내가 느끼는 변화인 동시에 주변에서도 느끼는 변화다. 얼마 전 지인의 결혼식을 갔을 때 아내와 이런 대화를 했다.


"오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 같아!" 


-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예전이랑은 다르지"


"비결이 뭐야?"


-"책 읽어서 그래"


"응? 인생을 글로 배웠다고?ㅋ 이게 되네...."


변화 이면에는 독사와 글쓰기가 있었다. 변한 건 사람을 대하는 태도뿐만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라졌다. 변화는 내 생각을 만들고 정리하고 표현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내 생각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고민이 해결되기도 한다. 타인에게도 이롭다. 베푸는 삶이 좋은 삶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베풂이 반드시 물질적일 필요는 없다. 내 생각을 통해, 내 말을 통해, 내 글을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그 또한 베풂이다.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던 적이 있었는데 꼬박 4개월을 누워 있었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또 생기지 말란 법은 없기에 나는 늘 불안했다. 불안은 실체가 없다. 그러나 불안이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되면 실체화되기도 한다. 


하루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병원에 누워있게 된다면... 왜 두려울까? 


별일 없지만 소중한 일상이 깨지는 것이 두려웠다. 병원에 누워있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게 두려웠다. 이때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은... '정말 아무것도 못할까?' 


아니다. 병원에서도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다. 오히려 병원은 아무것도 신경 안 쓰고 독서와 글쓰기만 할 수 있는 환경이다. 시간 되면 밥 가져다줘, 수시로 몸 상태 체크해줘, 청소도 해줘, 게다가 입었던 옷(환자복) 벗어두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되기에 빨래도 필요 없다. 독서와 글쓰기를 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건강을 앗아갈 순 있어도 나를 죽이진 못한다. 육체의 자유를 앗아가도 정신이 있는 한 글은 계속 쓸 수 있겠다란 생각을 하니 뱃속 깊숙이서 뭔가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살아 있음을 느꼈다. 내 생각을 만들고 표현하는 과정은 결국 나에게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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