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
카모메 식당에 조금 실망해서 다시는 영화촬영지 근처는 안갈 듯 싶던 나였지만 다음날이 되자 어쩐지 아카데미아 서점에 와있었다. (영화 카모메식당에서 주인공 사치에와 미도리가 처음 만났던 장소)
글쎄, 굳이 변명을 하자면 서점이 역이랑 가까운 데다, 현재의 일기쓰는 속도로는 가지고 온 수첩 두 권이 모자랄 것 같아 노트라도 하나 살까 싶은 데다, 여러번 강조했지만 헬싱키는 작아서 그닥 갈 곳이 없었다.
역시나 영화 속 주인공이 만났던 서점 안 알토카페 앞에는 나처럼 사진을 찍으러 얼쩡대는 동양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노트는 예쁘지만 비쌌다. 역시 북유럽.
어제 다시 숙소에서 헬싱키에 갈 곳이 없는 지를 검색하다가 얻게된 정보가 있다.
카우파토리에 있는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10여분 정도 걸리는 곳에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수오멘리나라는 요새가 있단다. 슬슬 걸어 그곳에나 가볼까하며 나왔다.
카우파토리 가는 길엔 성당이 보인다.
아마도 헬싱키의 관광명소인 듯한 곳인지 관광객들이 그 앞 계단에 서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고딕양식의 성당을 접하며 성당이란 이렇게 생겼다는 고정관념이라도 생겼던 듯 싶다. 이 수수하고 하얗고 푸른 성당은 깔끔하다 싶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건물이 성당이라고?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가봐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화려하던 러시아성당을 보고와선지 장식도 그림도 별로 없이 단촐하다. 하지만 어떤 장식을 해놓은 어떤 곳이든 교회는 그 나름대로의 경건한 분위기를 풍긴다.
성당을 지나 돌아오며 기념품가게를 구경하며 다시 한 번 그 가격에 놀라준 뒤, 수오멘리나에 가는 배를 찾으러 가는데 방향을 잘못 잡아 국제여객선이 다니는 터미널로 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탈린에 가는 거대한 여객선이 왔다갔다하는 사이에서 수오멘리나에 가는 배는(다시 말하지만 배타고 10여분 걸림) 어디있을까라며 찾다가 창구 직원이 저쪽에 있다며 안내해줘서 다시 돌아왔다. 제법 먼 거리를 헤매다 겨우 잘 찾아가고 있었는데 바로 내앞에서 배가 떠나버린다. 다음 배는 한시간 뒤에나 온단다.
카우파토리의 햇빛 잘 드는 벤치에 앉아 그 앞을 돌아다니는 갈매기와 대치하며 일기를 썼다.
그러나 아직 여행이 두 달이 남았는데 갑자기 펜이 안 나온다. 볼펜 한 자루면 되겠지 싶어 한자루밖에 들고나오지 않았는데. 그리고 아무리 햇볕이 잘 든다 해도 이곳은 겨울의 초입에 다다른 북유럽. 점점 손끝이 시려온다. 추워지면 근처를 걷다 다시 돌아와 앉아있다 하면서 한시간을 보낸 후 배타고 수오멘리나로 향했다.
헬싱키 앞에 툭 튀어나온 섬이면서 통째로 요새이기도 했던 수오멘리나는 어쩌다보니 갈 생각도 없이 그 해에 세 번째로 방문했던 요새였다. (첫번째는 이 여행 전에 친구들과 잠깐 다녀왔던 마카오, 그 다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피터폴요새) 그 전에 들렀던 곳들은 요새로 성곽을 세워놓고 그 안에 하나의 도시를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면 여기는 성곽은 세우되 주변 지형지물을 참 열심히 활용해 가장 상상해왔던 요새 느낌이 난다.
언덕마다 남겨져 있는 방공호와 돌담과, 익숙하지 않고서는 어디로 통하는 지 알 수 없는 통로들이 이 곳의 기능이 뭐였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구경온 사람들은 플래시를 켜들고 컴컴한 통로를 따라가기도 하는데 플래시가 없는 나는 그냥 밖에서 구경만 하고 걷는데만 만족하기로 했다.
수오멘리나 입구에 있는 슈퍼에서 시나몬롤과 초콜릿을 사서 걸어다니며 떼어먹었다. 그리고 혼자 중얼중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각나는 노래를 하나씩 부르다보니 아, 이건 내가 외롭다고 생각했을 때 도보 한시간 사십분쯤 되는 회사를 걸어서 출퇴근하며 듣던 노래들이다. 그 때는 정말 몇 백번씩 들었던 노랜데 최근엔 한 번도 듣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또 알아차려보니 외롭다는 생각을 한 것도 꽤나 오래 전 일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찌그러져 있을 때도, 여행을 결심하고 부모님과 싸울 대도, 나는 비록 힘들다며 징징거리기는 했어도 외롭지는 않았다. 누군가 옆에 있어서 계속 내 푸념을 들어줬고 주변에 사람이 채워져 안정된 상태를 의심없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건 멀리 떠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여기서 혼자 걷고 있지만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 가면 당연하다는 듯이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SNS에 사진을 올리고 하겠지. 아마도 물리적인 거리는 떨어져 있지만 오히려 더 자주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며 누군가와 연결되려 하겠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혼자 노래를 듣거나 노래하거나 책을 읽거나하는 일은 잊어버리겠지.
혼자가 되는 걸 못견뎌하는 내 여행에, 그리고 앞으로의 내게 외로움과 안정됨 중 어떤 것이 더 득이 될까를 생각했다. 어떤 것이 정말 내게 더 좋은 걸까.
네시간쯤 섬을 돌고 다시 배를 타고 카우파토리로 돌아왔다.
네시반쯤 도착한 카우파토리는 단 하나의 천막도 없다. 전날도 느꼈지만 정말 이 칼같은 북유럽인들이란. 전날 먹고싶었던 연어스테이크를 배가 불러 이 날로 미뤄뒀는데, 그래서 일부러 점심도 적게 먹었는데 장을 닫아버려 못 먹는 불상사가 벌어지고야 말았다. 역시 여행 중엔 하고 싶은 일을 다음 번으로 미루면 못하게 된다. 전날 배가 터지더라도 먹어버렸어야 했던가.
완전히 파장인 카우파토리를 보면서 스멀스멀 엄습해오는 불길한 사실을 하나 끄집어냈다. 나는 이날 하루종일 헬싱키를 둘러보고, 야경도 보고, 밤거리도 본 후에 밤늦게 야간기차를 타고 로바니에미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네시 반에 이렇게 모두 파장분위기라면 다른 곳도 아마 사정은 비슷할 텐데 아홉시 오십분인 기차시간까지는 대체 뭘 구경할 수 있다는 거지? 저녁이 있는 삶이라며 북유럽의 라이프스타일을 동경했었는데 나는 정말 한국인처럼 당연히 나이트라이프를 기저에 두고 있었구나.
어쩐지 기차표살 때 아홉시 오십분 표로 달라고 했더니 직원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라니 말이다.
그 때 날 좀 말려주지 그랬어요.
일단 빵을 씹으며 어제 갔던 디자인 뮤지엄 근처로 가 그 옆 교회를 보고 개끌고 산책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앉아 구경하다가 생각했다.
어차피 내게는 무제한으로 대중교통을 탈 수 있는 교통권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트램을 타고 헬싱키를 한바퀴 도는 것은 어떨까.
(버스 한 번 타면 2.7유로, 2일 교통권이 10.5유로라 샀으나 대부분 걸어다녀 그닥 많이 쓸 일은 없었다)
지도를 펴고 노선을 탐구한 끝에 순환선으로 한바퀴를 도는 3T트램을 탔다.
트램은 익숙한 길과 처음보는 길을 구불구불 돌았다. 한시간 동안 트램을 타고 거리를 구경하며 핀란드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고 있는 곳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현재를 가장 행복하게 살기위한 도시.
물가는 비싸지만 언젠가 이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역 앞에 내렸는데도 아직 기차시간은 두시간 넘게 남아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아카데미아 서점까지 걸어갔는데, 역시나 6시까지만 영업했단다. 다시 역으로 터덜터덜 걸어와 기념품가게에 가 기념품 펜 말고 싼 펜은 안파느냐고 물어 서랍 저 쪽에 숨겨져 있던 펜도 하나 사들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일기를 썼다. 일기를 쓰지 않으면 정말 할 일이 없었다.
로바니에미까지는 어떻게 간다쳐도 그 후 노르웨이로 가는 방법은 정말 깜깜하다. 버스가 있는지, 기차가 있는지, 그리고 거기서 피요르드는 어떻게 보러가야 하는 건지.
생각같아선 노르웨이 일정을 빼버리고 싶지만 이제 유일하게 예약되어 있는 부분이 오슬로-파리의 비행기표, 파리-생장의 기차표니 어찌됐든 노르웨이는 가야하고 가는 김에 피요르드도 봐야겠지.
로바니에미에서도 인포메이션센터 직원이 친절하고 노르웨이로 가는 좋은 방법(특히 싼)도 제시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