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출발전-부서진 인형처럼 쉬는 날

by 호빵씨

퇴사를 결심하고 난 후에 모든 일이 쉽게 풀려가진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느낌상으론 길고 긴 폭풍같은 퇴사의 과정을 거치고 난 후 나는 모든 의욕을 잃었다.

한동안 동네 도서관을 배회했다. 오는 전화도 받지 않았고, 누구를 만나러 가지도 않았다. 출근시간에 맞춰 도서관으로 가고 퇴근시간에 맞춰 집으로 갔다. 기계적으로 책을 읽고, 읽은 책을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해 두고 또 새로운 책을 빌려다 읽었다. 도서관이 휴관하는 날엔 골목을 걸었다. 걷다가 앉아서 쉬다 다시 걸었다. 가끔은 기차를 타고 나가기도 했다.

그것이 내가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의욕을 잃었다’는 문장이었다. 나는 부서진 인형처럼 무엇을 할 엄두도 내지 않았다.



의욕없이 기계적으로 활자를 읽던 때라 책으로 배움을 얻겠다는 생각같은 건 하지 않았다. 최대한 쉬운 것만 골라읽는 독서생활을 소설에서 시로, 사회과학 코너로 이어가던 그 때였다. 여행서적을 모아둔 서가에서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를 읽었다. 망한 나라 나우루 공화국의 역사가 그려진 책. 언젠가 이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떠올렸다. 서른두살의 삼월이 되면 그동안 모은 돈으로 일년동안 세계일주를 가고싶다고 생각했던 일을.

아직 서른두살이 되지도 않았고 일년동안 세계일주를 할만큼 돈이 모이지도 않았지만 머릿속을 굴려보니 3개월 정도의 가능성은 보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3개월 정도로 기간을 짧게 해서라도 다녀오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내친 김에 가고 싶었던 곳을 적어보았다. 어차피 할 일은 없었으니까.

나는 나우루공화국에 가고 싶었고, 몽골의 평원을 보고 싶었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싶었고, 사막에 가보고 싶었고,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한동안 살아보고 싶었고, 북유럽과 동유럽에 가보고 싶었고, 터키와 그리스에 가보고 싶었고, 이집트에 가보고 싶었다.


어라,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비행기를 타고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야 하는 나우루공화국을 제외하면 한 번에 다녀올 수 있겠다 싶었다. 몽골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북유럽으로 넘어가 동유럽으로 내려와 그리스, 터키, 이집트를 보고 돌아오면 되지 않을까? 북유럽을 제외하고는 그리 물가가 비싸지도 않을테고 이동은 배나 버스 기차를 이용하면 싸게 다녀올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계획하는 3개월의 여행이 현실도피는 아닐까 고민했다. 그러면서 딱 여행을 준비하는 것만큼의 마음을 쏟아 일자리를 알아보고 이력서를 메일로 보냈다. 내 여행계획이 블로그와 블로그 사이를 떠돌고, 여행사를 대행하여 받을 수 있다는 관광비자의 절차를 알아보고 있을때, '귀하와 다음 번에 함께할 수 있었으면 한다'는 무감각한 문장으로 가득찬 답장을 받기도, 가끔은 몇 군데의 면접을 보러 블라우스며 치마며 하는 것들을 꺼내 입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메일엔 대답이 없었다.


그 사이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 가를 생각했다. 일보다 여행을 선택해야 할 몇 가지의 이유를 떠올리면, 그만큼의 일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도 함께 떠올렸다. 어느 쪽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우울해졌고 쉽게 싸움을 걸고 아무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 것과 맞물려 내 전 직장에서의 마지막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동안 직장인들과 그들이 갖는 평균시간의 근로, 임금, 여름휴가같은 것들을 계속해서 질투해왔다. 그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뭔가를 느낀게 아니라 그냥 그랬다.


당장 다음 주부터 출근할 수 있느냐고 묻는 일자리에 결정해 연락해줘야 하는데 그 다음 주에 또 면접 일정을 잡고, 12월에 출발하는 카이로-인천의 편도티켓을 알아봤다. 아직 아무것도 절박하지 않은가보다 싶다가 내 생애 살면서 절박했던 일은 도대체 뭐였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다음 주부터 출근할까, 여행갈까를 고민할 때 당시 남자친구는 말했다.

“만약 이번에 안가면 앞으로도 시베리아 횡단열차타러 안갈 거야? 아니잖아. 이건 시간이 많이 필요한 여행이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녀와.”

그렇게 3개월의 여행이 결정됐다.


어차피 블로그에 여행정보를 얻는다고 왔다 갔다 하기는 했지만 자로 잰 듯 자세한 계획을 짜고 여행을 다니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내 여행은 몽골-러시아-스웨덴-노르웨이-체코-루마니아-오스트리아-그리스-터키-이집트였던 루트가 출발 한 달 전쯤 러시아-핀란드-노르웨이-체코-루마니아-오스트리아-그리스-터키-이집트로 계획이 바뀌었다.

그리고나서 출발하기 일주일 전, 책상 위에 세워둔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걷고있다는 친구가 보낸 엽서의 한 줄

길이 참 아름다워, 너도 언젠가 꼭 이 길 위에 서게될 날이 올거야.

라는 문장이 계속 눈에 밟혀 결국 루트를 러시아-핀란드-노르웨이-스페인-그리스-이집트-터키로 수정했다.

출발전날까지 준비된 것은 블라디보스톡에 가는 배표, 러시아비자, 시베리아횡단열차 기차표, 이스탄불에서 한국 돌아오는 비행기표.


그나마 러시아가 하도 위험하다는 말에 약간 겁먹어 기차표를 미리 예매해 둔 것이 거의 전부인 여행계획, 게다가 러시아를 벗어나서부터 정보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 늘 내 여행이 그렇듯 비슷한 출발이다.


일단 닥치고 나서 후회하는 건 내 특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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