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한국부모가 멀쩡히, 얌전히 집에 잘 붙어있(는듯 싶)던, 게다가 곧 시집이라도 보내야할 만큼 나이만 먹어버린 딸이 회사를 그만두고 3개월간 여행을 가겠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수 있을까.
(나에게) 불행히도 우리 집은 아주 일반적인 한국부모를 둔 한국의 가정이었다. 그리고 더욱 (아마도 부모님에게) 불행한 사실은 얌전히 집에 잘 붙어 있는 듯 싶은 그 딸이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절대 남의 얘기를 듣지 않는다는 것.
결국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지분을 많이 차지했던 시간은 수많은 싸움과 반항이었다. 하지만 결국 여행은 결정됐고 부모님은 끝까지 반대한 여행이라는 의지를 보이고 싶었는지 언제 가는지, 언제 돌아오는지를 묻는 것 외에는 단 한 번도 여행준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묻지 않았다.
그렇게 출발하기 전 날이었다.
"그래서 내일 몇 시 비행긴데? 인천으로 가?"
"내일 2시 배. 동해항에서 출발해요."
그 때의 표정은 정말 문자 그대로 ‘헐’.
‘쟤가 왜 이러나’ 싶은 얼굴로 바라보던 엄마는 곧 ‘쟤가 늘 그렇지’의 표정으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던 그 여행의 출발계획은 그랬다.
전날 짐을 싸두고, 일찍 자 새벽같이 일어나 동해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것. 그러나 늘 계획성없는 호빵씨가 그렇듯 출발 전날밤에 되서야 (일찍사면 싸다는) 파리에서 생장가는 기차표를 예약하고 파리에서 하루 묵을 민박집을 알아보고 나서야 배낭을 챙겼다. 결국 새벽이 돼서야 잠들었다.
새벽에 잠들면서도 이건 삼개월의 여행이니 기합이 잔뜩 들어 시간맞춰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내 자신이 이렇게 여유롭고 낙천적인 인간인지 그 때 처음 알았다.
버스가 출발하기 30분전에 일어난 것.
하긴, 새벽에 시간이 얼마 안 남아 아예 밤새고 배 탈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 그래도 졸리니 좀 자야지라고 생각했던 걸 보면 이미 가능했던 전개이기도. 버스 출발한 뒤에 깨지 않은게 어디냐.
여유롭게는 고사하고 머리도 못 감고 세수도 못한 채로 배낭을 들쳐메고 뛰쳐나와 택시 타고 터미널로 직행했다. 물론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부모님은 빈말로라도 터미널까지 태워다주련?하는 말씀은 하지 않았다.
겨우 늦지 않게 버스를 잡아타고 동해로 가는 버스 안.
아침에 그런 위기를 겪었으면 숨을 고르며 당분간은 깨있어야 하는 것이 보통의 인간일텐데 역시 피곤했던지 출발 5분만에 버스 안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눈을 뜨니 타임워프라도 한 듯 동해. 뭔가를 준비한답시고 새벽까지 잠을 못잔 것이 여파가 컸었나보다.
동해-블라디보스톡의 배표를 예약했음->동해항에서 배를 타면 됨이라는 생각으로 온 동해였다.
이동시간과 주변 식당이나 기타등등 알고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몰라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는 예상보다 아주 금방 동해항에 도착했다며 내려줬다.
출발하는 날이 추석 전 주여서 고속도로에 아마도 벌초가는 차가 많을 거라 예상하고 넉넉잡아 버스를 탄 거였는데 차도 안 밀리고 택시도 너무 금방 동해항에 데려다줬다.
그말인즉슨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집에서 머리정도는 감고나와 간식거리를 챙겨 다음 차를 탈 걸 그랬나.
생각보다 작은 규모의 항에 여기가 맞나 쭈뼛거리며 들어서는데 아, 여긴 러시아인가? 싶을 정도로 러시아 사람들이 가득하다. 도대체 이 많은 러시아 사람들은 한국 어느 곳에 다들 숨어있었던가 싶을 만큼.
카운터로 가서 결제하고 배표를 받아들었는데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제 곧 배가 떠난다는 게, 나는 배를 타고 출발한다는 게, 이제 삼개월의 여행이 시작된다는 게.
출발을 실감하기 위해 배가 떠날 때부터 한동안 바람이 잔뜩 부는 갑판에 앉아있었는데도 마찬가지다. 조금 설레고, 무덤덤하고, 무섭고, 될 대로 되라는 여러 가지 마음이 일었다 가라앉았다 한다.
배가 출발하자 동해항 직원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손을 흔들어줬다. 함께 손을 흔들어줬다. 난 어떤 마음인가 갑판에 앉아 생각했다. 딱 한 문장으로 난 설레, 난 그냥 무덤덤해, 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그냥 설레고 무덤덤하고 무섭고 될대로 되라 싶다가도 기대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늘 새로운 시작이 그렇듯이.
갑판에 한참을 앉아있었더니 러시아 아저씨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러시아어로.
웃으면서 나는 러시아어를 못한다라고 대답했지만 포기하지않고 끝까지 말을 걸어주는 러시아 아저씨.
당시의 나는 러시아어를 배워보겠며 어플을 다운받은 뒤 하루 열어보고 그만 둔 상태였는데 그 어플은 로제타스톤 방식의 어플이었다. 사진을 보여주고 단어를 발음하고, 발음을 들으며 문자의 모양새를 익히는 방식이었는데 문제는 하루 배운 단어로 할 줄 아는 말은 남자, 여자, 남자아이, 여자아이, 잉어, 기린, 원숭이, 걷는다, 앉는다, 먹는다, 뛴다 밖에 없었다는 것.
나는 이런 단어들을 안다며 아는 단어들을 러시아어로 읊어줬으나 아저씨는 못 알아듣고, 서로 각자 자기네 나라 말로 뭐라뭐라 한참을 떠들고 있는데 이르쿠츠크와 모스크바라는 단어가 들린다. 그리고 뚜리즘(관광)이라는 단어가 들린다.
뚜리즘!!!하며 고개를 끄덕였더니 갑자기 흥분해서 뭔가를 또 말씀하시는.
한참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이 아저씨는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어보는 것 같다.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더니 어디에 있냐고 묻는 듯 했다. 아, 목적이 그거였구만, 싶어서 여기에 있다고, 이 배 아래에 있다고 바디랭귀지로 설명해줬더니 술냄새를 풍기며 뒤도 안돌아보고 가셨다. 그렇게 몇십분을 열심히 얘기하려 노력하더니 말 한마디에 쿨하게 포기하고 가다니.
배에 익숙해지고 나니 거의 대부분이 러시아인들이 탄 배지만 중간중간 아주 소수의 일본인도, 프랑스인도, 독일인도 보인다. 배는 점점 멀리 떠나 이제 사방에 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이번이 내 생에 배를 타고 가장 멀리 나온 일이겠지.
멀미가 나도록 수평선을 보고 있으니 지구가 둥글다는 말이 아주 조금 이해됐다.
이번 여행에선 어떤 길을 보고, 어떤 하늘을 보고, 어떤 별을 보게 될지 조금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