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러시아-무섭지만 괜찮아

-블라디보스토크

by 호빵씨

돈 뿐 아니라 정보검색 의지까지 없는 내가 삼개월의 여행을 계획했을 때, 믿는 구석은 하나였다.

처음도 아닌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나 처음도 아닌데에서 떠올렸던 배낭여행의 기억은 옛날 옛적 대학생 때, 그러니까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비행기를 예약하면, 드라마에서 비행기표 소품으로 보던 항공사마크가 그려진 봉투에 든 표를 실물로 받고, 가이드북 하나 들고 나가 각 지역의 인포메이션센터를 동아줄 붙잡듯 의지하며 숙소를 예약하며 다니던 때였다.

그 다음에 비행기표가 이티켓으로 바뀌고 스마트폰도 생기고 했던 시절에도 여행은 갔었지만, 그 지역은 네팔 같은 곳. (여기도 지금은 엄청 바뀌었지만 그때는) 역시 숙소도 그 지역에 직접 돌아다니며 구하고, 각종 표 예약같은 것들도 직접 가서 하고 그랬었다. 그래서 배에 타는 순간까지도 첫날 숙소를 잡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성수기도 아닌데 자리야 얼마든지 있겠지, 예전에도 그랬으니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이렇게 써놓고 보면 대책없이 낙천적이기만 한 듯 싶은데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 겉으로는 센척하지만 겁은 엄청나게 많았던 것.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은 여러 부분에서 있었는데

첫 번째는 도서관에서 봤던 발행한지 10년은 더 지난 가이드북.

거기엔 여행자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것이 책의 주요목표인것 마냥, 그곳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불이익, 그러니까 각종 공권력에 의한 사기와 사람들에게 당하는 인종차별, 사기, 폭력피해 같은 것들을 나열해 놓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증언.

나랑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180이 넘는 거구의 소유자였는데 러시아에 가서 그대로 털렸다는데 그 얘기를 아는 사람을 통해 전해들은 것이다. 하물며 180이 넘는 거구인데, 힘도 엄청 센데, 넌...



전날 늦게 일어나 정신없이 급하게 움직이기도 한데다 주변 상황도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바람에 환경에 적응하느라 그 얘기를 곱씹을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하루를 꼬박 배에서 정신없이 보내고 저 멀리 수평선만 보이던 끝으로 육지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공포는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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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입국이 안되고 쫒겨나면 어쩌지? 오늘 잘 곳은 없는데 어디로 가서 구해야지? 여기 사람들이 영어를 잘 못한다던데 표는 무사히 바꿀 수 숙소는 제대로 구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나를 때리거나 돈을 뺐지 않을까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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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두근거림보다 공포로 인한 두근거림이 더 커져있을때 배는 정박했고 드디어 육지에 발을 내디뎠다. 원래 도착시간은 두시였지만 입국수속을 기다리고 하다보니 네시가 다 돼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오늘의 미션은 블라디보스톡 항 바로 옆의 기차역에서 예매한 기차표를 바꾸고(요즘 여행기보니 기차표도 이티켓으로 바뀌었다는 듯), 간단한 저녁거리를 사들고, 숙소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은 배에서 한국인 여행자를 한 명 만났고, 이 친구도 숙소 예약은 안 했지만 숙소 가는 길은 알아와 나랑 같이 가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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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포의 일부는 맞았다. 사람들이 영어를 전혀 쓰지 않아서, 심지어는 항구에도 기차역에도 영어로 된 표지판을 결코 찾을 수가 없어서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은 영어를 아주 조금할 줄 아는 러시아사람의 도움을 받아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기차표를 바꾸는 첫 번째 미션은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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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말밖에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슈퍼마켓의 위치를 물어보는 것은 어려웠지만, 역시 손짓발짓으로 가까스로 슈퍼마켓 위치를 알아내고 간단한 저녁거리를 사는 두 번째 미션도 성공했다.

물론, 바로 옆 역에서 표를 바꾸고, 역에서 5분거리도 되지 않는 슈퍼마켓에서 저녁거리를 샀을 뿐인데 시간은 두 시간이 넘게 흘러갔다든지 말 안 통하는 곳에서의 답답함과 스멀스멀 밀려오는 무서움은 제대로 느꼈다든지 하는 주변의 이야기는 남았지만 말이다.


이제 마지막 미션만 남았다. 해가 지기 전에 숙소를 잡고 편히 쉴 수 있는 곳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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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마지막이 만만치 않다. 가는 법을 역에서부터 알기 때문에 다시 역으로 나와 버스를 타고 숙소까지는 무사히 갔다. 그사이 해는 저물기 시작했다. 자리만 잡고 밥을 먹으면 이제 모든 것은 끝난다 생각했지만 호스텔에 이미 예약이 다 차버려 자리가 없단다. 근처 호스텔을 연결해줄 수 있는지를 물었더니 알아보고는 역시 없다며 호텔밖에 자리가 없다고 했다.

앞으로 어떤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첫날을 호텔에서 보내기엔 예산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호스텔의 와이파이를 빌려 미친듯이 검색을 하다 또 다른 호스텔을 찾아냈다. 친절한 호스트는 대신 전화해 준다고 했지만 그쪽에서 받지 않는단다.

새로 알아본 호스텔은 아까 버스를 타고 지나왔던 역 근처였다. 자리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나가기는 부담스러웠지만, 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손짓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해야한다는 것은 무서웠지만 더 이상 선택지는 없었다.


고맙다며 다시 길을 나서는 나와 일행에게 호스트는 전화번호를 주며 말했다. 혹시 그쪽 리셉션에서 영어를 하지 못하면 전화하라고, 그러면 자신이 통역해주겠다고.

결국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호스트의 친절에 무섭기만한 러시아에서 그래도 여기 좀 괜찮네 정도로 바뀌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역앞으로 돌아갔다.그리고 아까 본 호스텔을 찾는데 주소상으로는 이 비슷한 지점에 있을듯 싶은데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호스텔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외국인 몇 명이 ‘혹시 000 호스텔을 찾냐?’며 말을 걸었다. 맞다고 대답했더니 헤매고 서있던 코앞의 건물이라며 알려줬다. 자신들도 한참을 헤맸었다고 하면서.

‘좀 괜찮은 곳’에서 ‘참 괜찮은 곳’로 이미지가 급상승하는 순간!


도착한 숙소의 직원은 역시나 영어를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반나절정도의 러시아에 꽤 적응됐는지 통역전화까지 요청할 필요없이 손짓 발짓과 아라비아 숫자를 이용하여 무사히 침대도 얻었다.


다행히 여행 첫 날, 노숙은 안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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