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러시아-안녕, 블라디보스토크

-블라디보스토크

by 호빵씨

노숙의 위기는 있었지만 그럭저럭 즐거운 기분으로 편안히 잠을 잤다. 바닥이 출렁거리지 않는 침대에서 자는 기분은 역시 좋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블라디보스토크역에 짐을 맡겨놓고 시내를 돌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당시 나는 여행의 시작을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삼고 있었는지 블라디보스토크 일정은 과도하게 짧게 잡아놓았다. 도착하고 그 다음날 밤이면 그대로 떠나는 일정이다. 사실, 시베리아 횡단열차 말고 러시아에 기대했던 바도 없어 처음 기차표를 예매할 때는 도착한 첫날 바로 기차를 타고 떠나는 것도 생각했었다. 혹시 일정이 꼬여 기차표 예매한 것을 날리게 될지도 모른다며 하루 늦게 표를 예매한 것이 블라디보스토크 관광 일정이 되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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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관광을 시작한 러시아의 첫 느낌은 의외로 따뜻하다.

구름 한점 없이 푸른 하늘, 따갑기까지 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 한국의 가을날 같다.



러시아에 대해 기대가 없었던 건 상상할 수 있는 폭이 좁아서이기도 했다.

배 타고 25시간이면 오는 곳인데도, 이곳은 툰드라, 시베리아평원의 눈, 자작나무, 이반데니소비치가 묽은 귀리죽을 얻어먹으며 모르타르가 얼어붙는 그런 땅에서 강제노역하는 겨울의 이미지가 전부였다. 여기에 조금 더하면 일제강점기나 6.25 전쟁기쯤을 배경으로 쓴 소설들이 내 러시아 이미지의 전부였다.

그래선지 여기가 러시아가 맞나싶다. 건물들도 굉장히 크고 예쁘고 오래된 것 같은 것들이 유럽건물 같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유럽인 줄 알았으나 여긴 아직 아시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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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신기한 것들이 보이긴 한다. 와, 여긴 레닌 동상이 엄청나게 많네, 러시아에서 나갈때쯤이면 레닌 정도는 읽을 수 있겠어(끝까지 키릴 문자를 완벽하게 익히진 못했지만 실제로 레닌만큼은 읽을 수 있게 됐다) 와, 여긴 무명용사의 비래, 여긴 영원의 불이래, 이곳엔 정말 전투, 혁명에 관한 이미지를 곳곳에 구체화시켜뒀구나 싶은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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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정도의 감상뿐인 것은 그냥 도착해 아무 생각없이 하루 산책하는 여행자에겐 사시사철과 기후와 시간에 따른 변화, 혹은 정치 사회적 배경에서 기인한 문화를 겪어볼 시간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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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내를 걸어 굼백화점을 구경하고 근처 놀이터에서도 놀아도 역시 시간은 남는다. 그래서 약간 거리가 있는 전망대까지 걸어올라가기로 했다. 여전히 따뜻한 가을 날씨에 마치 영화 세트장의 한 장면 같은 거리와 건물들을 걸으며 계속 좋다, 좋다를 연발하며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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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블라디보스톡의 전망을 만나니 좋지 않을리가 없다. 전망대에서 그늘을 따라 해시계놀이를 하며 한참을 앉아있다 다시 걸어 돌아왔다.

곳곳에 세워져 있는 레닌과 푸쉬킨과 고리키와 기타 등등의 동상을 만나며 공원과 해군박물관을 지나 다시 역으로. 한나절 걸었더니 이제 길도 낯익어 지도없이 걸어도 헤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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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걸은 기분이지만 그래도 우리 기차는 밤 10시 30분에 출발한다. 아직은 해도 지지 않았고 시간도 많이 남았다. 이번엔 바닷가를 구경하겠다며 다시 반대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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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 해변을 따라 걷고 있는데 저 멀리 관람차가 보인다. 관람차를 타며 이 즐거운 기분을 더 만끽하고 싶어졌지만 걸어가기엔 약간 멀어보인다. 걸어서 그곳까지 다녀오긴 시간이 약간 빠듯해보였다. 10분쯤 관람차를 타러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다 결국 움직이기로 했다. 지금 관람차를 타지 않는다면 다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못 탈테니까.

모든 것이 다 비슷하겠지만 여행 중엔 특히 하고 싶은 일을 나중으로 미뤄두면 오래 후회한다.

여행중에 ‘나중’은 다시 만나기 희박한 어떤 것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다시 하지 못하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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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마음을 먹고 파워워킹으로 유원지에 도착해 속전속결로 티켓을 끊고 관람차를 탔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보며 신나서는 내려가면 유원지를 한 바퀴 둘러봐야겠다 했는데 그 사이 매표소도 문닫고 문도 다 잠그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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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늦게 결정했더라면 관람차도 못탈 뻔 했다. 역시, 여행 중에 나중은 없다.


근처에서 댄스공연하는 것도 한참을 보다 걸어 돌아왔다. 이제 삼박사일의 기차라이프를 대비해 적당히 먹을 걸 사가야 한다. 나름 4일간의 메뉴를 고민해 근처에서 장보고 역 안으로 들어와 무사히 짐을 찾고 드디어 내 열차 플라츠카르타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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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명이 낮은 걸로 예약했더니(러시아의 기차는 숫자가 낮은 것일수록 새 기차다) 블로그에서 봤던 사진보다 시설도 좋다. 사람들의 덩치가 커서인지 좌석이 넉넉하게 넓다. 아직 화장실을 보진 못했지만 이 정도면 쾌적하게 삼박사일을 갈 수도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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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만족했지만 기차가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자 갑자기 긴장감이 찾아왔다.

배가 떠날 때보다, 첫날 노숙의 위기를 겪을 때보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돌아다닐 때보다 훨씬 더 낯선 곳에 와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긴장감이 점점 더 커져 손끝이 떨리기 시작할 때쯤 시베리아횡단열차가 출발했다.


열차는 생각보다 더 흔들렸고, 밤이어선지 근처의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뭐라도 말을 해보고 싶어 앞자리에 앉은 포스풍기는 러시아 언니에게 귤을 건넸더니 굉장히 쿨하게 ‘스파시바’하며 받은 뒤 다시 자신이 읽던 책으로 눈을 돌렸다.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었지만 얼굴에 써있는 ‘난 영어를 몰라’의 포스에 눌려 조용히 지급받은 시트를 자리에 깔았다.



이 기차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 친해지게 되려나,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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