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횡단열차: 블라디보스토크-이르쿠츠크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첫 밤은 내 짐을 훔쳐가지 않을까를 고민하며 뒤척이며 설잠을 잤던 것과(그러나 실제로 훔쳐가도 몰랐을 정도로 되게 허술함) 저 멀리에서 미세하게 ‘니옛(아니오)’, ‘다(네)’를 잠꼬대하던 아저씨, 그리고 코골이 아저씨 정도로 기억이 날 듯.
자고 일어나보니 내 옆자리엔 밤사이 사람이 바껴있었고, 웬 어린 소년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눈이 마주치자 인사로 추정되는 러시아어를 말했다.
인사를 하기 위해 아는 러시아어를 머릿속에 굴려보았지만 남자, 여자, 남자아이, 여자아이, 잉어, 기린, 원숭이, 걷는다, 앉는다, 먹는다, 뛴다, 관광, 예, 아니오, 감사합니다의 범주 안에 내가 찾는 말은 없었다. 그제서야 생각났다.
나는 러시아어로 인사말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뭐한다고 러시아어로 인사도 안 익혀온 걸까.
할 일은 없고,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긴장하며 자느라 피곤하지만, 잠은 오지 않아 계속 앉아있는데 안개가 자욱히 낀 곳에서 사방이 붉어지며 해가 뜨고 있다. 플라츠카르타 칸 사이에 있는 사모바르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커피를 타와 홀짝대며 앉았다. 새로 들어온 승객들이 분주히 시트를 매만지는 사이로 붉은 하늘과 산과 숲을 봤다. 내 반대편 창가에선 해가 뜨고 내 편에선 끝없이 평원과 자작나무 숲이 이어진다.
점점 날이 밝아온다. 이것은 호빵씨가 상상했던 횡단열차의 풍경 그대로다.
호빵씨의 앞에 있던 여자는 새벽에 내리고 대신 사람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부부가 탔다.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미소를 지으며 각자 나라말로 인사를 했으나 그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열차 첫날의 나는 이 안에서 무엇을 해야하는가 잠시 생각하다 한참을 멍하니 창밖을 봤다.
특별히 어떤 생각을 떠올리려 하지도 않고, 어딘가를 보려고 하지도 않고,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도 않고 정말 멍하니 앉아있었다. 마치 머릿 속을 디스크조각모음하듯.
산발적인 기억들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기억이 떠오르고 그 기억에 따른 감정이 생기기도 전에 가라앉고 새로운 기억을 떠올렸다. 그 사이 차창밖은 흐렸다, 비를 뿌렸다, 다시 갰다. 창밖으론 여전히 넒은 들이, 나무들이 지나갔다. 그것들은 스쳐 지나가며 아무런 잔상을 남기지 않았다. 참 오랜만에 가진 멍하니 있는 시간이었다.
산발적인 기억은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왔지만 슬프거나 아픈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여행을 생각하기 전 도서관에 다니던 시절에 이 열차를 탔더라면 그땐 이 시간이 정말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격한 감정 상태를 한고비 넘기고 출발한 게 오히려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보니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이제 여행이 시작된지 삼일도 되지 않았지만 몇달치의 분량처럼 주변은 계속 변하고 난 내 속도보다 빠른 풍경에 휩쓸려 어리둥절 지내고 있다고. 그렇지만 나는 잘 있다고, 그동안 이런 사람을 만나고, 이런 풍경을 보고 저런 걸 느꼈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아마 여행이 점점 더 진행되면 그런 순간이 더 많아지겠지.
그 사이 기차는 역에 정차하고 출발하는 일을 반복했다.
하루가 지나가고 이틀이 지나가자 이제는 열차의 움직임에도 익숙해졌다. 처음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떠올렸을 때는 연착이 잦고, 사람들이 숨 쉬기도 힘들게 가득차 있는 마치 설국열차의 3등칸 같은 모습을 떠올렸지만, 이 기차는 깨끗하고 객차 안에 붙은 시간표대로 정해진 시간에 서고, 정해진 시간에 잘 출발한다. 비록 모스크바시간 기준으로 모든 시간표가 붙어 있어 계산을 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3박4일의 기차에서는 역시나 그리 할 일이 많지 않다.
흔들리는 기차를 돌아다니는 것도 한 때. 식당 칸을 구경하는 것도 한 때. 정차한 역에서 나가 플랫폼에 선 좌판을 보는 것도 한 때. 그러다보니 낮잠을 자고 일어나고 하는 일이 반복되며 시간감각이 무뎌진다. 바깥은 밝았다 어두워지지만 기차 안에 있다보면 바깥의 풍경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또 기차에서는 하릴없이 쉽게 입이 심심해지고 쉽게 배가 부르고 또 쉽게 배가 꺼진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먹을 것으로 반절은 채운 것 같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나게 큰 짐을 가지고 탄다.
내 배낭은 60리터 15킬로그램쯤 되는 데 그것보다 1.5배는 큰 짐을 일인당 두 개씩은 들고 타는 듯 싶다. 처음 기차에 타서 침대 아래에 배낭을 넣고 이렇게 큰 내 배낭이 공간의 삼분의 일도 채우지 못한다며 놀랐는데, 곧 다른 러시아인들이 그것보다 더 큰 짐을 들고 타서 자리가 남으면 여기에 짐을 넣겠다고 꽉꽉 채워넣는데 더 놀랐다. 그 짐 안엔 한 판 가량의 삶은 계란은 물론 러시아 전통음식처럼 보이는 고기요리, 토마토, 생선요리 등 참 다양하다.
첫 날 기차를 누비고 돌아다니다 내 자리로 돌아와 그들에 비해 간소한 짐을 열어 크래커를 먹을 때였다. 앞자리의 인상좋은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하나 드시겠냐며 건네자 고개를 젓던 아주머니는 다시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먹으려 싸온 삶은 계란을 나눠줬다. 고맙다며 받아먹자 토마토도 먹겠냐며 나눠준다. 그 다음은 고기.
그렇게 말 한마디 걸지 않고 미소와 바디랭귀지로만 대화하며 매 끼니때마다 계란과 토마토와 고기를 나눠주던 아주머니는 3일이 지난 후 치따에서 역시 사람좋은 웃음을 지어준 뒤 내렸다.
점차 바디랭귀지에 익숙해져 자신감이 붙은 나는 옆칸의 우즈베키스탄 청년과 청년의 아버지와 친해져 몇 마디의 러시아어와 몇 마디의 우즈베키스탄어를 배우고 한국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렇게 소소한 시간들이 모인 삼박사일 기차를 타다보니 열차 안에서 제법 아는 얼굴이 보인다.
이르쿠츠크까지 두 역이 남은 울란우데역 앞 플랫폼에 정차해 잠깐 내렸을 때도 플랫폼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인사만 해도 꽤 많은 사람이 있다. 할 줄 아는 러시아말은 별로 없지만 첫번째 횡단열차에서는 시간을 잘 보냈다.
다시 기차가 출발하고 두시간쯤 달린 후 내 오른쪽으로 바이칼호수가 나타났다. 눈 앞으로 계속 이어진 물가에 반짝이는 자작나무 숲이 끝도 없이 서있었다.
이제 곧, 두 번째 목적지인 이르쿠츠크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