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쿠츠크
3박4일간 흔들리며 온 열차는 흔들리지 않는 땅에 나를 내려주고 떠났다. 기차 안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지하도를 건너 역 밖으로 나왔다.
이르쿠츠크는 기차 안에서 봤던 자작나무 숲과 바이칼호수가 펼쳐져있는 전원의 풍경을 예상하고 내렸는데 예상외로 굉장히 도시다. 약간, 실망이다.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숙소를 구하는 일. 앙가라 강을 건너 검색했던 호스텔로 향해 갔다. 비록 예약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비수기니 빈 침대 한두개 쯤은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없다.
아.
똑똑한 사람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실패의 경험에서 배움을 얻는다’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렇게 기업에서 자기소개서를 받을 때 실패의 경험과 극복한 경험담을 물어보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는 확실히 학습 능력이 부족한 일인이다.
첫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까스로 호스텔을 잡았을 때 예약 어플리케이션이란 것이 있다더라 하는 얘기도 분명히 들었는데 예약하려는 시도를 1도 않고 그냥 와버리다니. 하지만 이미 비슷한 일을 겪은 경험탓에 놀라지는 않는다. 학습 능력은 없으나 위기엔 점차 무뎌지는 걸까. 하하하.
스태프에게 바로 다른 호스텔로 연결해 달라고 한 뒤, 맘 편히 와이파이를 켜고 4일간 못했던 인터넷에 빠졌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사태의 심각성은 느꼈기에 모스크바 부터는 미리 예약해 들어가겠다며 호스텔예약 어플을 깔았다.
내가 도착한 곳은 바이칼호수가 있는 이르쿠츠크.
바이칼호는 ‘성스러운 바다’, ‘세계의 민물창고’, ‘시베리아의 푸른 눈’, ‘시베리아의 진주’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유명한 곳이라고 하다.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29023&cid=47340&categoryId=47340) 이르쿠츠크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곳에 바이칼 호수를 구경하러 오고 나 역시 마찬가지로 바이칼호를 구경하러 왔다. 이 엄청난 규모의 호수 안에는 알혼섬이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은 원시샤머니즘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 정보를 얻은 후에 나도 역시 귀를 팔랑거리며 ‘오! 좋아 알혼섬에 가겠어’라며 목적지를 정했다.
아마도 처음의 어리바리 나였더라면 다음날 아무 생각없이 알혼섬에 가겠다며 삐약거리며 돌아다녔겠지만, 도착해 두어번 호스텔에서 퇴짜맞은 경험은 아주 천천히 학습화되어 머릿속에 남았다.
그래, 가는 길은 미리 물어봐야지, 숙소도 좀 알아봐야지, 역시 난 학습능력있는 인간이라니까. 겨우 그 정도로 뿌듯해지는 마음으로 호스텔 스태프에게 물었다. 알혼섬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태프는 말했다. 버스터미널에 가서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고, 그 근처에서 미니버스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지만 정확한 시간은 잘 모른다고, 아마도 오전 10시정도에 버스가 있는 것 같다고,
마지막 방법으로 내일 새벽 호스텔 앞에 픽업하러 오는 미니버스가 있는데 그걸 타면 그냥 버스를 탈 때보다 100루블정도 더 든단다. 잠시 고민하다 100루블을 아껴 그냥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참고로 말하지만 그럴 땐 그냥 100루블 더 들여 호스텔 앞에서 픽업해 주는 차 타고 가는게 속 편하고 좋다고 생각한다. 사실 100루블이랬자 요즘 환율로 1,800원정도다)
직원에게 가는 길도 물어봤고, 근처에서 장을 봐다 배부르게 밥먹고 샤워하고, 비록 평점이 좋진 않지만 중심가에 위치한 모스크바의 호스텔까지 예약해두고 나니 새벽 한시가 다 돼갔다. 그렇게 깊이 잠이 들어 푹 아침까지 잤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몇 시간 자지 못했는데 귓가에서 모기가 잉잉거렸다. 겨울의 러시아를 상상하며 파카까지 챙겨왔는데 모기라니 대체 이게 웬말인가. 목까지 이불을 푹 덮고 잤더니 모기가 얼굴을 문다.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 썼더니 너무 더워서 못자겠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겨울의 러시아를 상상했는데 말이다. 여행 전에 누가 그랬는데 여긴 10월만 돼도 겨울이라고. 어쩐지 억울해지는 마음으로 새벽 네시가 조금 넘어 모기를 잡으려 시도하다 실패한 후 완전히 잠이 깨어 거실로 피신했다. 잠은 포기하고 알혼섬에 들어가는 차 안에서 잘 예정이다.
일어나 준비하고, 거실에서 가방을 챙겨 섬에 가지고 들어갈 가방과 호스텔에 맡겨둘 가방을 분리하고 나니 7시가 좀 넘었다.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일어나 밥먹고 준비하는 걸 기다려 호스텔을 나왔더니 9시 20분쯤 됐다.
10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려면 서두르면 될 것 같은 상황.
그런데 호스텔 앞에 나가자마자 길을 잘 모르겠다. 우리의 모든 정보는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것인데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러시아의 정보로는 우리 숙소에서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길을 자세하게 포스팅 해놓은 글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럴 땐 구글맵이나 맵스미나 뭐 유용한 어플들이 많이 있다만 호스텔 스태프에게 가는 방법 물어본 것에 세상 모든 일을 다 한 것마냥 뿌듯해하는 초보가 그런 것을 알리 만무했다.
일단은 아는 길인 앙가라강 건너까지 이동한 후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봤다. 아니, 길을 물으려고 ‘excuse me’하며 말 걸었더니 무시하고 지나가버렸다. 투명인간 취급하듯이.
결국 그 근처에서 유일하게 아는 장소인 어제 퇴짜맞은 호스텔로 다시 걸어가 스태프에게 길을 물었다. 스태프는 아주 친절하게 이르쿠츠크 지도를 프린트해 가는 방법을 설명해줬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호스텔의 스태프는 정말 천사였다. 무작정 와서 방달라고 하는 애한테 호스텔 연결시켜줘, 다음날 아침에 새벽같이 찾아와 버스터미널 가는 방법을 알려달라며 또 삐약거리는 애한테 지도 주고 길도 가르쳐줘.
왜 나는 전날 우리 호스텔에서 가는 방법과 시간만 물어본 뒤, 지도도 하나 안 받고 가는 길도 안 물어봤던걸까.
지도를 보니 걸어서 갈만한 거리는 아닌 것 같아 결국 트램을 타고 중앙시장 앞으로 갔다. 이미 버스터미널의 버스는 늦었으니 수시로 있다는 미니버스를 타려는 생각에서였다.
미니버스는 사설로 봉고차를 운행하는 건데 이 시장 앞의 주차장에 가면 봉고차가 잔뜩 서있고 그 앞에는 행선지의 표지판이 붙어있다. 행선지를 확인한 후 기사에게 요금을 지불한 뒤 타면 적당히 사람이 모아 출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미니버스가 잔뜩 서있는 주차장은 찾았으나 알혼섬이라고 적힌 표지판은 없다.블로그글을 봤을때 12시에 출발했다는 글도 있고 해서 안심했던 게 화근이었다. 주차장에 있는 아저씨에게 알혼섬에 가는 차는 없냐고 물었더니 또 굉장히 친절하게 러시아말로 뭐라뭐라 하셨다. 우리는 러시아말을 모른다고 해도 마찬가지.
결국 “잡뜨라”, “잡뜨라”라고 반복하더니 휙 가버렸다.
잡뜨라가 대체 뭔 말이냐며 조금 더 기다리라는 뜻이냐며 영어로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차장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서 잡뜨라의 뜻을 유추해내고 있을 때 말 못하는 외국인 둘을 불쌍하게 본 다른 아저씨들의 도움을 받아 알아냈다.
'잡뜨라'는 러시아어로 '내일'
그러니까 알혼섬에 가는 미니버스는 오늘은 다 끝나고 내일 있단다. 하아, 정말이지 다사다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