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호수: 리스트비앙카
잡뜨라의 충격적인 뜻을 알게된 후 망연자실히 서있던 나와 일행.
하지만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며 중앙시장에서 트램으로 한 정거장쯤 되는 버스터미널로 걸어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결코 잊지 않을 단어 “잡뜨라”만 열 번쯤 들을 수 있었다.
아, 망할 놈의 잡뜨라. 망할 놈의 정보도 없는 러시아 여행기들, 이 망할 놈의…
하면서 화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화는 마치 불이 번져나가듯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가장 먼저 번진 생각은 난 왜 새벽 네시에 일어나 열시에 있는 버스를 놓쳤나였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억울함이 생겨났다.
얼마든지 새벽에 나갈 수도 있었지만 늦게 일어난 일행을 기다리느라, 길을 알아보겠다고 했는데 확실하게 알아보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지만 그들이 무시하고 지나가서, 하는 생각이 들자 주변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단 매표소에서 몇발짝쯤 떨어져 마음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한번 불길이 번진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점점 더 부글부글 끓어올라 누구라도 건드리면 폭발할 듯 싶어 어디로든 가기로 했다. 그리고는 다시 매표소로 돌아가 리스트비앙카로 향하는 표를 한 장 끊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이르쿠츠크는 바이칼호수 옆에 있는 도시, 보통 여기에 들르는 관광객은 바이칼호수를 구경하기 위해 들르기 마련이다.
바이칼호수를 보는 방법은 엄청난 호수의 크기만큼이나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보통은 큰 기차역이 있는 이르쿠츠크에 내려 버스를 타고 리스트비앙카라는 동네에 가서 바이칼호수의 아랫부분을 구경하거나, 버스타고 배타고 8시간쯤 걸려 바이칼호수 안에 있는 알혼섬을 보는 것이 관광객이 주로 가는 방법이다. 원래 내 계획은 후자. 알혼섬에 들어가 이틀밤을 자고 다시 나와 밤기차를 타고 모스크바에 가는 일정이었는데 이날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알혼섬의 하루를 포기하고 리스트비앙카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즐겨야지, 새벽에 블로그를 검색하다 대충 본 정보로 리스트비앙카까지 가는 창밖 풍경이 그렇게 예쁘다던데, 알혼섬은 내일 들어가면 되지 라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기분은 나아지지 았았고 굳어진 얼굴로 버스는 출발했다.
리스트비앙카 가는 길이 그렇게 예쁘다지만 나는 전 날 잠을 설치고 화를 내며 에너지를 소모해 버린 사람.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마취된 듯 잠들어버렸다. 눈을 떠보니 눈 옆엔 바다같은 바이칼호수가 펼쳐져 있고 곧 도착했다며 내리란다.
아마도 내 화의 일정부분은 잠을 못 잔 피곤함도 섞여있었던 듯 한시간 넘게 버스에서 푹자고 나니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고나니 사실, 모든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처음 호스텔을 나설땐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해 늑장을 부렸었다. 처음가는 길에 익숙하지 않아 헤맬수도 있는 일이고, 낯선 사람들이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을 걸어오면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이다. 굳이 누구의 잘못이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사소한 사건을, 있어서는 안되는 일로 받아들인 내 탓이기도 했다. 그리고 솔직히 따지고보면 새벽에 일어났던게 것도 사실 모기 때문이지, 섬에 들어가려고 일찍 일어났던 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조금만 진정하면 아무것도 아닐 일이었는데.
내 앞에 펼쳐진 바이칼 호수는 엄청나게 넓었다. 마치 바다처럼. 너무 커서 호수라는게 믿겨지지 않아 살짝 물맛을 봤다. 호수가 맞았다.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와 있는 사람들은 일요일의 휴양지처럼 한가롭고 시끄럽게 웃고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는 호수에 들어가 수영을 하고, 누군가는 호수에 돌을 던지고, 누군가는 펼쳐놓은 음식을 먹었다.
호숫가엔 마뜨로슈까와 털모자, 주술용품 같은 기념품을 파는 좌판과 이 곳의 특산품이라는 오믈과 건어물을 파는 좌판이 잔뜩 널려있었다. 근처 가게에서 맥주와 컵라면을 사고 오믈을 한 마리 사서 호수를 보며 먹었다.
호수주변을 산책하고 한참을 앉아 돌멩이도 줍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했다. 우리 옆에 앉아있던 아빠와 함께 온 꼬맹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여기저기 참견하며 뛰어다니다 돌멩이를 줍더니 우리에게 달려와 하나씩 선물해줬다. 고맙다고 말해줬더니 갑자기 쑥스러운 얼굴로 아빠 뒤에 쏙 숨어버렸다.
호수 근처로 햇빛이 반짝이며 일렁거렸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아까전까지 화를 내고 있던 내 자신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여행을 나가면 마냥 좋기만 할 줄 알았는데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에 감탄만 하고, 새로운 것을 쭉쭉 흡수하며 멋지게 돌아다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난 때때로 옹졸하고, 소심하기도 한 평소의 나다.
내가 평소의 나인 것처럼 풍경 또한 그냥 풍경일 뿐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똑같이 있지만 내 마음에 따라 그것이 의미가 있을수도 없을수도 있는 일이다. 바이칼호가 이제는 아름답게 반짝이는 건 내 마음이 변했을뿐이다.
그렇게 호숫가에서 한참을 있다 다시 버스타고 이르쿠츠크로 돌아왔다.
터미널에 도착해서는 다음날 알혼섬에 들어가는 버스시간을 몇 번이나 확인한 뒤 나왔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하룻밤을 연장하고 이른 저녁을 먹은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새벽엔 제발 알혼섬에 들어갈 수 있길, 그리고 섬에서 나올때 만약 같은 일이 벌어지면 기차표를 날려 이후 일이 아주 곤란해지니 그땐 제발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길.
(참고로, 나중에 나보다 한달쯤 늦게 이르쿠츠크에 다녀왔다는 여행객을 만났었는데 그 사람은 오후한시 넘어서 미니버스를 타고 들어갔더랬다. 알혼섬가는 미니버스는 아마 요일별로 시간이 다르고 그때그때마다 변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너무 미니버스를 믿지 마시고 꼭 잘 아는 주변사람에게 물어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