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호수: 알혼섬
이제는 알혼섬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들어가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던 나는 다음날 새벽 정말 일찍 일어났다. 거실에서 한참 짐을 챙기고 있는데 어제 새로 들어온 독일인 아가씨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팔을 벅벅 긁으며 거실로 나온다. 모기 때문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이상하게 전날밤은 모기가 없더라니, 그게 다 이 친구가 대신 물려줬기 때문이군. 내심 다행이다 싶었지만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모기 기피제를 뿌리라고 줬다. 멋모르고 정말 고맙다며 스프레이를 뿌리는 그 친구를 보며 약간의 양심의 가책이.
어제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씻고 준비해 7시 10분쯤 숙소를 나섰다. 알혼섬으로 출발하는 버스는 8시. 전날 터미널에서 숙소까지 걸린 시간이 대략 30분 정도였다. 이제는 가는 길도 방법도 알고 있으니 이 정도라면 여유있게 터미널에 도착해 버스를 탈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전 문장을 읽으며 뭔가 모를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아마도 내 여행의 테마는 어긋남인 듯 역시나 변수는 존재했다. 7시 10분의 이르쿠츠크는 해가 뜨지 않았고 지나다니는 버스도 트램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트램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트램을 기다리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트램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10여분쯤 걸었을까, 다음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쯤 차가 온다.
겨우 잡아타고 중앙시장에 도착하니 7시 40분쯤. 여기서 터미널까지 걸어가기엔 약간 시간이 빠듯할듯 싶어 미니버스를 타야겠다며 시장에 들렀는데 그 시간 주차장엔 미니버스가 한 대도 없다. 이제 더 이상 선택지가 없다. 또 버스를 놓칠까봐 입에서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빨리 걸어 겨우 버스터미널에 5분 전 도착했다. 간신히 표를 사고 차에 올랐다. 아, 하루에 한 번씩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언제쯤이면 이 여행은 편안하게 술술 풀려나갈까.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차는 어제 리스트비앙카에 들어가던 것처럼 큰 버스가 아니라 16좌석정도 되는 봉고차다. 기사아저씨와 기사님의 여자친구같아 보이는 사람을 포함해서 10명정도가 타고 6시간 동안 달리고, 배를 타고 또 달려 알혼섬으로 들어간다.
러시아의 도로포장상태는 그렇게 좋지 않은지 차는 계속 덜컹거렸고 좀 심하게 흔들려 ‘헉’하고 놀라면 차안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응? 이거 나만 이렇게 이 도로가 덜컹거리는 거야?
나올 때는 해가 뜨지 않아 그러려니 했는데 해뜬 후에 보니 이 날은 꽤 흐린 날씨다. 그러더니 곧 비가 내리기 시작하며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 정도라면 한국에선 히터를 틀법한 날씨다. 하지만 추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달랐다. 기사아저씨가 갑자기 차를 세우고 트렁크로 가 파카를 꺼내 갈아입었다. 같이 탔던 러시아인들 역시 죄다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따뜻했던 러시아 날씨에 너무 익숙해져 러시아는 한국이랑 비슷하게 따뜻한다 보다 생각했던 멋모르는 동양인. 무거운 짐을 안 들고 다니겠다며 두꺼운 옷이 들어있는 큰 배낭을 이르쿠츠크의 호스텔에 맡겨놓고 왔다. 덕분에 가는 내내 차 안에서 달달 떨어야 했다. 하아, 다시 말하지만 이 여행은 언제쯤이면 평화로워질까.
두 번 정도 휴게소 같은 곳에 세워주고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 또 한시간 넘게 달려 알혼섬 안으로 들어갔다. 알혼섬에 들어오니 100% 비포장도로. 언뜻 본 가이드북에서 알혼섬엔 최근까지 전기도 안들어왔었다는 것을 본지라 놀라지는 않았다. 사실 비포장도로라도 아까 지난 울퉁불퉁한 포장도로와 별 차이도 없었다. 유난히 덜컹거려 잔뜩 지친채로 후쥐르 마을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갔다. 예약이 안 돼있어 혹시 여기서도? 하며 겁먹어 있었지만 다행히 이곳엔 자리가 있었다. 이곳은 전세계의 모든 여행객에게 유명하다는 게스트하우스였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는지 그 날 우리가 알혼섬에서 본 모든 여행객을 저녁시간에 식당에서 볼 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제공되는 늦은 식사를 하고 후쥐르 마을을 산책하러 출발했다.
알혼섬은 원시 샤머니즘의 기원인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처 리스트비앙카의 기념품 좌판에 그렇게 주술관련 용품을 팔고 있었던가 보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본 사진 속 풍경을 쫓아 부르한 바위에 올라가자마자 넓은 언덕과 곶, 바위, 형형색색의 끈으로 묶인 나무가 어우러져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진은 그곳이 어떤 크기이냐와 상관없이 같은 틀에서 보기 때문에 피사체의 크기를 왜곡하기 쉽다. 거의 모든 것들이 거대한 러시아에서는 무엇을 봐도 오, 여기, 상상한 것보다 큰데싶은 마음이었지만, 이런 풍경은 정말이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거대한 의미로 다가왔다.
'알혼섬은 원시 샤머니즘의 기원인 곳이다'는 문장이 온 몸으로 이해가 됐다. 호수 위의 거대한 섬, 그 안에 펼쳐진 그런 풍경이라면 누구든 무엇에게든 뭔가를 빌고싶었을 거다.
언덕 능선을 타고 호수쪽으로 가 샤먼나무와 바위를 구경하고 언덕에 천천히 올랐다. 아침부터 꾸물거리며 하늘이 이른 오후에 비를 쏟아내고는 해가 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춥긴 했지만, 그래서 이르쿠츠크 호스텔에 있는 내 두꺼운 옷은 계속 그리웠지만, 그나마 비가 안와서 다행이었다. 호수에 손을 담그고, 물수제비도 뜨고 모스크바에서 왔다는 러시아인이 사진을 찍어줬고 내 카메라의 배터리는 간당간당해졌다. 충전기는 이르쿠츠크에 두고 왔는데.
열 마리가 넘는 강아지가 있는 언덕과 낡은 배가 있는 호수변을 지나 돌아와 터미널에 가서 내일 이르쿠츠크로 돌아가는 버스표를 사러 갔는데 표 파는 곳이 닫혀있다. 이번엔 맘편하게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100루블 더 주고 미니버스타고 가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에 가서 표를 예매하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동네를 산책하는데 그 근처 집에 사는 듯한 꼬맹이들 네명이 소리를 지르며 쫓아온다. 그 중 한명은 막대기도 들었다.
뭐지? 얘네들은?
러시아와서 처음으로 느낀 위협적인 행동이 고작 6~7세로 보이는 애들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폐어선과 폐창고 같은 곳을 지나오는데 20여미터 간격을 두고 계속 쫓아오는 꼬맹이들. 그 중 하나는 우리쪽으로 돌도 던졌다. 그러나 일행이 손을 흔들어 주니 저쪽에서도 같이 손을 흔들고 계속 돌담뒤에서 우리를 훔쳐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담 뒤로 숨어버리는 꼬맹이들. 위협적이지만 참 별 거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아이들을 지나 큰길로 나서니 저 멀리 한 커플이 ‘하~이’하며 외친다. 누군가하며 자세히 봤더니 아까 버스를 함께 타고 온 사람들이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도 본 듯 손을 크게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오는 버스에서 러시아에서 대중교통으로 어딘가에 간다는 건 오랫동안 한 곳에 사람들을 묶어둬서 강제로 친목을 다지게 하는 MT같은 건 아닌 걸까 생각했었는데 역시 러시아의 대중교통은 강제 MT가 확실하다.
이것이 환대인지 아닌지 여전히 구분은 가지 않았지만 기묘한 섬에서의 기묘한 첫날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