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소아냐-사리키에키
새벽 여섯시 반.
그동안 다닌 곳의 호스텔에서라면 아직은 한밤중인 시간이다. 혹시 시차적응에 실패해서, 잠을 설쳐 이 시간에 일어났더라도 부스럭대며 움직여야할지 그냥 조용히 다시 자야할 지를 고민해야하는 시간. 하지만 까미노에서 여섯시 반은 다르다. 이 시간쯤이면 모두 일어나 각자의 침낭을 정리하고 씻고 하루의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
이제는 드디어 손전등이 있는 동행이 있으니 일찍 출발할 수 있겠다며 급하게 짐을 싸고 있는데 일곱시 반에 떠날 예정이라던 잭이 말한다.
“저는 짐을 다 쌌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는가 싶어 시계를 보니 사십오분이다. 그리고 내 짐은 아직 더 싸야한다. 기다리게 하기 미안해서 먼저 가라고 보냈다. 겨우 동행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느리적거리느라 그냥 보내는 모양이다. 아마도 나는 까미노에서 누군가와 함께 걸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듯 싶다. 어제 하루 걸어보니 혼자 걷는 것도 제법 괜찮았다. 첫날처럼, 둘째날처럼 그냥 걸어야겠다. 이제 날이 밝을 때까지 꼼짝없이 알베르게에서 기다려서 출발해야지. 일곱시 사십오분이니 삼십분만 더 기다리면 해가 완전히 뜨겠지. 그런데 내가 뭘 얼마나 느릿느릿 했다고 짐 좀 싼다고 한시간 십오분이나 걸린 걸까?
다시 찬찬히 시계를 보니 시간은 여섯시 사십오분. 그냥 얘가 예정보다 먼저 출발한 거였다.
밖이 너무 깜깜하지 않으면 손전등없이 출발하려고 잠깐 나가봤는데 어둡다. 어느 곳이나 시골 동네는 가로등을 환하게 켜지 않는다. 이 상태로 걷는 건 조난당하기 쉽다. 정보부족에 아무 생각없이 다니는 나지만 안전만큼은 제일로 생각하고 있기에 포기하고 돌아왔다.
멍하니 앉아 짐을 꾸리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제 숙소 안을 활보하던 고양이가, A가 싫어해서 저녁에 알베르게 밖으로 내쫓았던, 다시 돌아와 내 다리를 부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린다. 이 곳의 고양이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매우 좋아한다. 고양이는 좋아하지만 동물을 만지는 건 무서워하는 나도 겁먹지 않고 만질 수 있을 정도로. 어차피 내겐 한시간 삼십분이 남아있으니 한참 예뻐해주고 같이 놀 시간은 충분했다. 짐 챙기는 사람들 옆에서 한가하게 고양이와 놀고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데려가라며 농담한다.
고양이를 동행해 산티아고에 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진지하게 ‘너도 언니따라 750킬로미터 걸을래?’라고 물었더니 급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역시 나는 혼자 이 길을 걸어야 하는 모양이다. 아니, 그것보다 이 녀석 한국말을 알아듣는 건가?
멀리 가는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막 짐을 꾸려 문을 나서던 A가 같이 걷겠냐고 묻는다. 손전등이 있냐고 물었더니 있다고 하길래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쪽을 따라 나섰다.
새벽의 산길은 매우 어둡고 별이 많았다. 손전등이 없었더라면 혼자 걷는 것은 무리였겠다 싶었다. 내 공식적인(?) 까미노 첫 동행은 이제는 몇 번 봤다고 제법 낯이 익은 A, 그리고 그와 어제부터 동행하기 시작했다는 J.
A는 전에 얘기했듯이 뉴욕에서 살고 있는 나와 동갑인 친구. 일을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시작하는 길이라고 했다. 모아놓은 돈이 떨어질 때까지 여행하다 돌아갈 거라고 했다. J는 A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온 한국교포.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고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걷기위해 40여일 일정으로 왔단다. J는 론세스바예스부터 순례를 시작했다고 했다. A가 한국말을 잘한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은 없었지만 J는 더 못했다. 하지만 참 친절하고 자신감 넘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영화나 미드에서 보던 대책없이 밝은 미국인 캐릭터를 실제로 보는 느낌이랄까. 끊임없이 재잘대는 J덕에 몇 시간도 안 돼 A와 다섯번 넘게 만나면서 했던 대화보다 훨씬 많은 얘기를 했다. 왜 이곳에 와 있는지, 각자 여행 전엔 어떤 일을 했었는지, 좋아하는 배우는 누군지 등등. 엄청 웃으며 즐겁게 걷다보니 벌써 해가 뜨고 두시간 반이 훌쩍 지나 있었다.
슬슬 배가 고파질 때쯤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에 들어서자 J는 유창한 스페인어로 마을 사람에게 길을 물어봐 식당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더니 꽤 오랫동안 스페인어를 배웠었단다. A도 잘 하지는 못하지만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고. 내 새 동행은 능력자들이라 기뻐하며 한편으로는 이들과 함께 다니면 이제 의사소통은 문제없지 않을까란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반대로 J는 내가 스페인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모르고 만난 이후 계속해서 한국어로만 얘기하자 얘는 이런 상태로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걸까의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같이 다니는 동안 계속 대신 주문해 주고 대신 길을 물어봐줬다. J는 내가 나중에 이메일을 보내기 전까지 내가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찾아간 식당의 이름은 ‘카페테리아 파라다이스’ 맛있는 커피와 역시 맛있는 빵을 파는 낙원이었다. 카페 앞에 도착하자 그 앞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는 잭을 만났다. 역시 사람이 걷는 속도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새벽에 숙소 앞에서 만나 함께 걸어왔다는 브라질 아저씨는 다리가 아파 이 곳에서 쉬기로 했다며 우리와 함께 걸어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어제까지는 나 혼자였는데, 누군가와 같이 걷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러자마자 일행이 생기니 참 신기하다. 800Km의 길에서 어떤 일도 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그 생각보다 훨씬 더 일은 제멋대로 흘러간다. 그렇지만 그렇게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이 길을, 이 일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걷는 동안 모든 새로운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중요하겠지.
걷다가 오후에 팜플로냐에 도착했다. 까미노 길에서 첫 번째로 지나가는 대도시다. 삼일만에 보는 대도시는 낯설다기 보다는 반가웠다. 자연은 아름다웠고 그 길이 정서상 좋긴 하다만 그래도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랐던 4인은 도시가 더 익숙하다.
A는 예전에 이곳에 왔었다는데 여기서 투우를 본 적 있단다. 그러고 보니 곳곳에 투우관련 상품을 팔고 투우박물관도 보인다. 옛 추억을 되살리며 이 곳에 머무르기엔 시간이 너무 이르다. 잠시 도시 입구의 알베르게에서 쉬며 와이파이도 하다 나와 쭉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정한 우리의 목적지는 시주 메뇨르. 그러나 도착해보니 역시 너무 이른 시간이다. 6킬로미터 더 간 사리키에키라는 마을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끊임없이 평지였던 길과는 달리 다음 마을까지 가는 6킬로미터는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하지만 첫날 산을 넘을 때처럼 힘들진 않았다. A와 함께 일정표를 들여다보며 그가 일정표가 의미하는 것을 알려준 다음에 보니 첫째날만큼 힘든 코스는 이후엔 없는 듯 싶다. 여긴 그리 어렵지 않은 길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후 세시가 지나자 어쩐지 이 길이 끝나지 않고 다음 마을따윈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점점 시간이 지나자 네 사람의 대화는 알베르게가 언제 나타날 것인지, 오늘 저녁은 뭘 먹었으면 좋겠는지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잭은 도착하면 와인을 마시고 싶다고 했고, J는 끊임없이 오늘 저녁은 닭을 먹었으면 좋겠다며 닭을 3개 국어로 얘기하며 뒤따라왔다. 까미노 3일차 이제 내가 아는 스페인어는 ‘올라(Hola, 안녕)’,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좋은 길 되길)’, ‘그라씨아스(Gracias, 감사합니다)’ 그리고 ‘뽀요(Pollo, 닭)’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은 결국에 끝났고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도착해 씻지도 않고 바로 식당으로 내려가 음식을 주문했다.
A가 밥을 먹는 내내 아이패드로 보사노바와 재즈를 틀어줬다. 힘들게 걷고 들어와 음악도 밥도 와인도 있는 저녁,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해 아픈 발과 다리는 잊어버릴 수 있었다.
킬로미터와 섭씨의 세계가 아닌 마일과 화씨의 세계에서 살아온 A와 J.
마침 와이파이가 되는 식당에서 이날 우리가 걸어온 27킬로미터가 마일로는 얼마나 되는지 시리에게 물어봤다. 우리가 아무리 영어로 물어봐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던 시리는 A의 말에는 정확히 대답해 줬다. 시리가 대답을 잘 해준다며 신난 한국인 두 명은 이것저것 다 물어보라고 시켰다. 계속 해서 질문에 질문을 하다 A가 물었다
내일 날씨는 어떻게 되냐고.
시리가 답해줬다. 내일과 내일모레는 비가 온단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우리는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제발, 내일은 맑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