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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씨 Sep 21. 2016

#31까미노데산티아고-비가 시작되었다

사리키에키-시라우키-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밖으로 나갔다. 

시리의 예보와는 달리 비가 오지 않아 잘 됐다며 들어오는데 준비하고 아침밥을 먹는 동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거세게 내리진 않아 아침밥을 먹고 우비를 입고 길을 나서는데 그때부터 미친 듯이 내리는 비란. 전날까지는 생장에서 우비를 9유로나 주고 샀으나 써먹을 일이 없다며 괜히 산 건 아닌지 후회하려던 찰나였는데 금세 ‘나의 선견지명이란’하는 마음이 됐다. 그동안 쓸데없이 무겁다며 약간 귀찮아 하고 있었는데 얇은 비닐같은 A의 우비를 보자 내 건 튼튼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간사한 인간의 마음이란.  


비가 내려 좀 느지막히 출발하는 길엔 오르막부터 시작이다. 비가 좀 잦아지기를 기다려 시작했는데도 시작과 거의 동시에 두세번 번개가 치고 앞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질만큼 심하게 비가 내렸다. 

J는 오르막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옷이 흙투성이가 됐고, 우리 모두는 조심해서 걷는다고는 했지만 발이 한 번 이상 웅덩이에 빠져 신발 안이 질퍽거렸다. 고작 4일 째지만 까미노를 걷는 중 이런 비는 처음이다. 어제까진 그렇게 쨍쨍 내리쬐던 하늘이 딱 하루만에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변할 수 있다니 신기한 노릇이다.  



사실, 여행을 시작할 때 비를 예상하며 계획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블로그의 여행기를 볼 때도, 친구가 찍어온 여행지의 사진을 볼 때도 하늘은 늘 파랗고(만약 사진속이 흐린 하늘이나 비가 내리는 풍경이라면 자체적으로 기억에서 삭제한다) 그러다보니 내가 여행을 떠났을 때는 맑고 화창하며 쾌적하기까지 한 적당한 날씨가 내 여행길 내내 함께 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그럴리가. 비도 자연현상의 하나이고, 실제로 내가 사는 곳 역시, 1년 동안의 강수일을 365로 나눠보면 평균 3일에 한번꼴로는 비가 올텐데 말이다. 하지만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듯이,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이상하게 여행을 떠나면 맑은 날씨만이 내 뒤를 쫓아다닐 거라고 믿게 된다. 

내게 '여행을 간다'라는 문장 속 숨은 기대는 새로운 곳에 대한 경험,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과 함께 맑은 날씨가 기본으로 포함돼 있는 듯 싶다. 맑고 쾌적한 날씨는 즐거운 여행과 세트로 포함된 상품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기대하고 길을 떠나지만 돌아다니다보면 생각처럼 완벽한 날씨는 드물다. 덥고, 끈적거리고, 축축하고, 추운 불쾌함과 비, 눈, 바람같은 것들이 내가 살고있는 곳과 마찬가지로 나를 찾아온다. 

여행을 다니는 일은 그동안 관심갖지 않던 내 몸과 내 주변 풍경의 존재감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나타나는 순간들이다.  그럴 때 만약 비라도 오면, 눈이라도 온다면 나는 아주 쉽게, 여행의 신이 나를 버린 것마냥 절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까미노에서 그런 길을 처음으로 걸으니 힘들다기보단 재미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으악, 으악’하며 비명을 지르며 물웅덩이를 피하다 발이 빠지는 것도, 비가 얼굴로 들이쳐 마치 세수하는 것처럼 젖는 것도, 짜증이 난다기보단 그냥 재미있는 이벤트 같다. 비는 내리붓는데 그 길에서 발이 빠졌다고 키득거리고, 미끄러져 넘어져도 옷이 엉망이 되었다며 모두 웃는다. 만약 나 혼자 걷고 있었더라면 십중팔구 힘들다며 이미 징징거리며 나는 왜 여기서 이 꼴을 당하며 걷고 있는 걸까를 고민하고 있을텐데 함께 걷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재미있다니 이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미끄러운 오르막을 힘들여 올라가자 철로 된 구조물이 보였다. 산티아고에 다녀온 사람들의 사진에서 많이 봤던 것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피레네 산맥쯤에 있는 건 줄 알고 아무리 가도 안 보이길래 내가 길을 잘못 들어 구조물을 그냥 지나친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가보다. 카메라를 꺼내고 싶었으나 비가 너무 와서 하루 종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냥 폰카로 만족하는 수밖에.  

사진은 찍었으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누굴 찍은 건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구조물을 지나 내려오는 길.  

힘들다며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던 J가 말했다. 나중에 이메일로 사진 보내달라고, 어차피 얼굴이 제대로 안 보이는데 그냥 나인 척 해도 되겠다고.   



아침부터 퍼붓던 비는 다음날까지 쭉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다시 퍼붓다를 반복했다. 몸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정직해서 '비가 퍼부어도 친구가 있으니 즐거워' 의 마음은 안타깝게도 오래 가지 않았다. 이틀 연속 천천히 걷고는 있었지만 모두들 평소보다 쉽게 지쳤다. 네명 중 유일한 흡연자인 잭은 아침부터 말없이 니코틴과 알코올의 힘으로 걷고 있고, 잘 웃고 쉬고를 반복하던 J는 맑을 때보다는 말수가 적어졌다. 

게다가 아무리 발에 익은 신발이라 하더라도, 여행와서 많이 걸었다 하더라도, 하루에 삼십킬로미터 가까이를 배낭을 메고 걸었더니 발엔 물집이 생겼다. 하필이면 발바닥 한가운데 땅과 닿는 부분에 생겨 한발 한발을 내딛는 게 아프다. 그런 데에 신발은 계속 질퍽거린다. 전날 묵었던 알베르게에서 신문지를 얻어 신발 속에 넣어놓았었지만 그걸로는 역부족이었다. 물집이 생기지 않게 하는 수칙 중 하나가 쉴 때 발을 말리는 거라고 하던데 최악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오르막길에서 J가 무릎이 아파 잠시 쉬는 중 잭이 먼저 걸어갔다.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더니 곧 보이지 않았다. 담배도 피고 아침부터 술도 마셨는데 멀쩡하게 걸은 셋보다 잘 걷는다며 역시 이십대초반이라며 부러워하며 다시 올라갔다. 산 위에 올라가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보이지 않는 잭. J가 말했다.  

“우린 이제 완전히 잭하고 떨어진 것 같아”  

먼저 가더라도 어딘가 알베르게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계속 걸었다. 작별인사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가진 않았겠지.  

계속해서 무릎이 아프다고 하는 J에게 A가 말했다.  스틱이 있으면 무게를 분산시켜줘 무릎이 덜 아플 수 있다고. 마침 들어간 슈퍼마켓에서는 한쪽 구석에서 순례자용 기념품을 팔고 나무로 된 지팡이도 팔고 있다. 지팡이 앞에서 오분쯤 고민하던 J가 내게 말했다. 너는 지팡이가 필요없느냐고. 나는 스틱에 익숙하지 않아 오히려 더 짐이 된다고 거부하자 또 오분쯤 고민하다 결국은 사들고 나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오분 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바로 후회한다.  

결국 새로 산 스틱은 오분 만에 A에게로.  

마음에 드는 건지, 버리지 못해 들고 다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지팡이와 A는 꽤 잘 어울렸다.  J와 나는 A의 새 지팡이에 이름도 지어줬다. ‘한나’라고. A의 소울메이트라며. 잭이 사라진 대신 새 친구 한나가 생겼다며. 나중에 A가 80세가 되었을 때 한나라는 진짜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고, 그 때 알고보면 한나에게도 A라는 지팡이가 있을 거라며.  

둘이 키득거리며 잠시나마 현실의 고통을 잊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A는 역시 재미있는 건지, 재미없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계속 걸어갔다.    



오후가 되자 비는 조금씩 멎어갔지만 누적된 피로는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점차 말수가 적어진 세사람이 얼굴을 찌푸리며 걷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세상 그렇게 밝을 수 없는 두 순례자가 우리를 지나쳐 올라갔다. 저 사람들도 우리처럼 비오는 길을 걸었을텐데 어떻게 저렇게 힘이 나는 걸까, 하며 멀어지는 두 그림자를 지나쳐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그리고 한참 뒤 우리가 여전히 걷고 있을 때, 아까 봤던 그 사람들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역시나 기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우리 옆의 철문을 열고 나왔다. 꽤 오랫동안 여기서 뭘 한거지 하며 옆을 보는데 아, 이거 흘려보았던 블로그들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아까 지나쳤던 사람들이 한참동안 여기 있었든 말든, 지친 얼굴로 그냥 지나치려는 J와 A를 붙잡고 멋진 것을 보여주겠다며 들어갔다. 


그것은 바로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

이라체 수도원 옆에 있는 이 수도꼭지는 보데가스 이라체라는 와인제조업체에서 순례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한다. 붉은 얼룩이 남아있는 왼쪽에서는 와인이, 오른쪽에서는 생수가 나오는, 프랑스길에서 만나는 독특한 곳 중 하나다.

둘에게 여기는 내가 사진으로 봤던 곳이라며 한쪽은 와인이 한쪽은 물이 나온다며 설명해 줬더니 둘이 열광했다.  

여기에 노숙자들이 진치고 있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며, 미국에 돌아가면 공짜 와인이 나오는 이 수도꼭지를 전파하겠다며.  

그러나 사실 J와 A는 둘 다 술을 별로 안 마시는 사람들이고 나는 와인보다는 맥주를 더 좋아한다. 결국엔 한잔 따랐던 와인을 셋이 나눠먹다 조금 버리긴 했지만 와인샘을 즐기는데 취향과 주량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참을 사진 찍고 졸졸 나오는 와인을 한컵에 담으며 우리는, 아까 우리를 지나쳤던 사람들처럼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아까까지 처져있던 정직한 몸 역시 축제분위기에 취해 잠깐 속았는지 힘들다는 생각도 사라졌다. 이런 작은 기쁨들이 길을 끝까지 걷는데 힘이 돼주겠지. 

걷다 쉬다를 반복하며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길을 걷다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했던 잭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헤어질 거였으면 앞서가기 시작했을 때 잘 가라고 인사라도 해줄 걸 그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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