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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씨 Sep 23. 2016

#32까미노데산티아고-포도밭 우리들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토레스 델 리오

이틀이나 비가 내렸는데도 여전히 비는 완전히 그치지 않았다. 지지부진하게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는 비.  

처음에 비가 오는데 웃을 수 있었던 건 뭣모르는 초반의 객기였다는 것을 우리는 곧 깨달았다. 비가 온다는 건 땅이 질퍽거린다는 뜻이며, 수많은 물웅덩이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방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며, 옷이 계속 눅눅한 상태여서 온 몸이 쪼글쪼글한 상태로 걷는단 말이며, 걷다가 쉴 때 아무데나 배낭을 던져둘 수 없어 14킬로그램의 배낭을 멘 채 쉬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밤사이 알베르게에서 신문지를 얻어 아무리 신발 속에 넣어놨어도 신발은 마르지 않았다. 몸 구석구석이 젖어 쭈글쭈글해진 기분은 아무리 휴식을 가져도 나아지지 않았다. 몸 전체에 습기가 달라붙어 맑고 뽀송뽀송하며 긍정적인 모든 기운을 빨아들이는 듯 싶었다.  

아침에 출발하는 기분은 꿉꿉한 날씨만큼 그리 상쾌하지만은 못했다. 굳이 날씨 때문이라든지 몸상태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오늘의 길이 주어졌으니 걸어야한다. 그리고 함께 걷는 사람에게 되도록 나쁜 감정상태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길을 걷다보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루 24시간 중 적어도 23시간쯤은 같이 지내면서 우리는 많은 얘기를 했다. 주제는 매우 다양했다. 서로의 현재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지만 과거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희한하게도 A와 J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그 전에 학교에서는 뭘 전공을 했고, 부모님은 뭘 하시고, 과거에 누구를 만났는지의 이야기는 쉽게 잊혀졌다. 하지만 내가 맥주를 좋아하고 비둘기를 끔찍히 싫어한다는 것은, A는 채소를 먹지 않는 편식쟁이지만 누군가 해준 음식은 아무리 맛이 없어도 고맙다고 말하며 먹는다는 것은, J는 길을 지나가다 아무에게나 쉽게 말을 걸어 가끔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은, 우리가 했던 사소한 말장난 같은 것들은, 기억에 남아 각자의 머릿속에서 나를, A를, J를 재구성했다. 

(지금도 A나 J는 내 전공이나 과거직업 등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주 가끔 만날 때마다 그 당시 했던 얘기를 하며 낄낄거리는 거나, 슈퍼에 가면 자연스럽게 날 맥주코너에 풀어놓는 거로 봐선 나만 그런 건 아닌듯 싶다.)



비가 억수로 오는 바람에 금세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틀 전부터 우리가 가는 길 옆엔 포도밭이 펼쳐져 있었다.  

처음 그 포도밭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역시 호기심 많은 J였다. 

J는 감정표현에 솔직하고 호기심이 많은 친구였다. 걷다가 힘들다, 즐겁다라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며 쉬어가자고 여기서 머무르자고 조르곤 했다(그러나 A가 아직은 이르다며 더 걷자고 하면 투덜거리며 따라오긴 했다). 또 우리와 대화를 하는 중에도 옆에 새로운 것이 있으면 세상에 처음 태어나 저 물체를 본 어린애처럼 뛰어가 만져보고 한참을 신기해하다 저멀리 앞서나간 우리를 쫓아 뛰어 돌아오곤 했다. 그에 비해 나와 A는 대부분 평상심을 유지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풍경은 풍경일뿐, 가끔 아름답구나, 좋구나, 하며 덤덤하게 감탄할뿐, 길을 벗어나거나 여간해서 속도를 높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포도밭을 발견한 J가 가만 있을리 없었다. 화장실이 필요해 넓게 펼쳐진 들판에서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던 J가 포도를 따 돌아왔다. 수확철이 지났는데 나무에 달려있던 포도는 반쯤 말라 포도와 건포도의 중간단계가 되어 있었다. 일단은 따온 거니 먹기는 하지만 A는 계속해서 J에게 타박하고 있었다. 함부로 남의 밭의 포도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J는 듣는척 마는척 포도밭을 만날 때마다 사라진다 싶었다가 어느새 포도를 따 맛있다며 너희도 먹어보라고 건넨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말이 통할 것 같았는지 내게 동의를 구했다. 

여긴 수확이 끝나고 농부들이 남겨놓은 것이라고. 그러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먹어도 된다고. 그렇지 않느냐고.  

하지만 내 생각 역시 A와 같았다. 나중에는 J가 포도를 따들고 오면 ‘우리는 쟤 몰라요’라며 도망치고 J는 그런 둘을 키득거리며 붙잡아 포도를 나눠주며 걸었다. 비가 오면 다시 벗었던 우비를 뒤집어 쓰고 가끔은 몸이 날아갈만큼 센 바람을 맞으며.  



이 날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서인지 J는 계속 재잘재잘 떠들었다. 아침부터 좋지 않은 기분으로 걸어서인지 나는 가끔 크게 웃고 장난을 치다가도 말이 없어졌다. 오후쯤되자 우리 대화의 주제는 연애가 됐다. 질문을 도맡아하는 J가 역시 우리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너는 어떨 때 이성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지, 연애와 결혼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내 (당시) 남자친구는 어떻게 만났는지 등. 그러다 불쑥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사실, 까미노에 오기 일주일 전 만난 사람이 있는데 굉장히 호감이 간다고 그렇지만 예정된 일정이 있어 한달 넘게 이 곳을 오게 됐는데 그 사이 이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휴대폰도 노트북도 아무 것도 들고 오지 않은 J는 A의 아이패드를 빌려 보냈던 이메일에 그가 답변하지 않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잘 될 거라고, 네가 아무 것도 안 갖고 있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 늦게 답하는 걸 거라고 말하는 나와 달리 A는 끝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매정한 것 같으니라고. 

이 문제로 J는 많이 고민했었던가 보다. A의 희망을 단칼에 자르는 답변이 끝나고 다른 주제로 대화가 넘어가도 어느 순간 다시 주제는 연애로 돌아가 있다. 그런 J의 얘기를 듣고 있다 나도 아침부터 하지 못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실 아침부터 내가 눅눅한 기분으로 출발했던 건 새벽에 했던 전화때문이었다.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 들른 기념으로 새벽같이 남자친구에게 했던 전화에서 서운한 일이 있었던 거다. 비록 전화 막바지에는 사과는 했지만 틀어진 기분은 오전내내, 오후가 되도록 나아지지 않았던 거였다.  

있잖아, 사실은 하며 새벽에 벌어졌던 일을 둘에게 얘기해줬다.  


J도 함께 고민해줬지만 뾰족한 수가 없고, A는 길가에 핀 풀을 꺾거나 바닥의 웅덩이를 피하는데 관심을 기울일뿐 우리의 얘기에 그닥 관심이 없다. 어차피 J의 상대도, 내 남자친구도 당장 이곳에 있는 사람도 아니며 이미 알고있던 사람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이 무리 중 유일한 남자기 때문에 남자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설명해 보라고, 전 세계의 남자를 대표해서 A를 괴롭히자며 끊임없이 끌어들였다. 주로 A는 그건 아냐, 헤어져, 관심이 없네, 이상해 등등 지극히 부정적인 발언을 해 그나마 좋게 상황을 해석하려는 둘의 의지를 꺾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매정한 것 같으니라고.  

하지만 혼자서 이야기를 담고있는 것보다 이야기를 하는 편이 마음이 풀리기는 한다.  비록 해결은 안 돼 어느 한 구석은 계속 찜찜해 하고 있지만. 이야기를 꺼내놓고 혼자 마음이 풀려 밝아졌다. 결국 연애든 사람을 만나는 과정이든 상대에게 찌질해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 노력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곳저곳에 찌질한 면모를 드러내고 부끄러워하고 조금쯤은 안심하는 과정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나는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전에서 각각 다른 환경에서 자랐지만 나이대가 비슷한 셋이 함께 고민하는 지점이 같을 수도 있구나란 생각을 했다.  

어느새 비가 멎었다 포도밭 너머 커다란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 사이로 걸어가는 길에 말했다. 


와, 멋지다. 우리 지금 무지개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어요.

옆을 걷고 있던 A가 살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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