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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씨 Sep 28. 2016

#33까미노데산티아고-J가 아프다

토레스 델 리오 - 로그로뇨-나헤라

생각해보면 J가 무릎이 아프다고 했던 건 꽤 오래전 얘기였다. 같이 걷기 시작하고 이틀만이었던가.  

A가 스틱을 써봐라, 뒤로 걸어봐라, 잘 때는 발을 높이 올리고 자라는 조언을 해주고, 걸을 때 자주 쉬는 것 외에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게다가 우리 역시 물집이 생기거나 배낭의 무게 때문에 어깨가 아팠기 때문에 그냥 J도 그런 정도려니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했었다. 다리가 아프다 해도 바에 들어가 쉬거나 길에 앉아 쉬면 곧 다시 걸었으니까. 가끔 난 다리가 아파서 더 이상 못 걷겠다며 여기서 침낭깔고 자겠다며 칭얼거리긴 했지만 이제 다음 마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앞으로는 계속 평지만 걸어갈 거라고 달래면 곧 다시 걷곤 했으니까.   

그러나 토레스 델 리오에 도착한 J는 평소와 달라보였다. 보통은 오후 네시까지는 걷는데 이날은 오후 두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 더 이상은 못 가겠다고 선언한 것. 나도 그 김에 오랜만에 일찍 쉬어볼까란 마음으로 잽싸게 J의 옆에서 알베르게 수속을 하고 있는데 A가 고민하기 시작한다. 다음 마을까지 갈 것인지, 우리와 함께 여기에 머무를 것인지. 

A 너도 오늘 딱 하루만 같이 쉬자. 우리 버리고 갈 거야?

하며 회유한 결과 결국 A도 일찍 쉬기로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대낮에 알베르게에 들어오니 샤워하고 빨래까지 마쳤는데도 해가 떠있다. 게다가 기분상으로는 백만년만인듯 싶은 맑은 날씨다. 늘 알베르게에 들어갈 때쯤엔 지쳐있어 씻고 빨래를 한 뒤엔 '침대밖은 위험해'의 상태로 뒹굴뒹굴하는 편인데 이 날엔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 아까울 정도다. 


내친 김에 혼자 동네산책을 나섰다. 오랜만의 혼자 걷는 길이다. 토레스 델 리오는 우리가 그동안 지나갔던 대부분의 마을처럼 작지만 아기자기하게 정돈되어있는 마을이었다. 낯선 곳을 헤집고 다니는 동양여자 하나가 낯설법도 한데 그동안 이 마을을 지나쳤던 순례자의 영향인지 마을 사람들은 눈이 마주치면 살짝 웃으며 지나쳤다. 

원래는 네다섯시까지 걸어야 하는데 일찍 길을 마치고 느끼는 공기는 글쎄 뭐랄까. 굳이 예를 들자면 예전 학교다닐 때 중간고사 기간에 집에 일찍 돌아올 때의 기분과 살짝 비슷하다. 분명히 내일도 힘든 일정이 이어질테지만 당장 하늘은 너무 맑고, 공기는 여유롭고, 아직 내게 낮시간은 충분히 남아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이런 기분은 다른 여행지에서 걸었던 산책과도 살짝 다르다.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좋다, 생각하며 흘려 걷는 것이 여행지의 산책이었다면 여기서는 걸으며 이 마을에 가게는 어디에 있는지, 풍경이 어디가 좋은지 마치고 돌아가 A와 J에게도 말해줘야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오랜만에 저녁으로 순례자메뉴로 스테이크까지 먹고 신나게 돌아왔는데 문제가 생겼다. J의 무릎이 생각보다 더 안 좋아 하루를 여기서 더 묵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A는 기다리지 않고 혼자 걷겠다고 하고 J는 내게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J는 이 상태로 천천히 걷다 무릎이 더 안 좋으면 산티아고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한다. 난 오늘밤 동안 생각해보겠다고 하며 J의 무릎을 위해 일단 배낭정리를 시켰다. 필요없는 것은 다 버리라면서.  

내 배낭에도 별별것들이 다 들어있지만 이 배낭은 더 심각하다. 왜 산티아고로 걸어가려는 배낭에 자기 살던 곳에서 쓰던 일상 가방을 그냥 통채로 넣은 듯 싶은 토트백이 들어있는 것이며, 짐이 무겁다며 휴대폰도 들고오지 않았던 아이의 짐에 페이퍼백 책이 세권이 들어있는 것인가. A와 나는 이런건 버리라며 물건을 골라내며 잔소리하고 J는 꼭 필요한 거라며 골라낸 기념품 펜을, 책을, 다른 물건을 집어넣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한참동안 실랑이를 하고 나서 버린 짐의 크기를 보니 한 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쉬어야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J. 시베리아횡단열차 계단에서 넘어져 모스크바서 진료받으며 사 온 약을 줬다. 2주 동안 의사의 지시대로 꼬박꼬박 발랐지만 워낙 큰 용량이다보니 반절이상 남아있었다. 키릴문자로 적혀있다며 의심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J는 미국제약회사의 로고를 발견하고 괜찮을 것이라며 받아 내 설명에 따라 두 종류의 약을 바르고 잠들었다.  

J가 짐을 정리하고 약을 바르는 동안 나는 내일의 일정을 결정했다. 만약 J가 쉬더라도 계속 걷기로 하는 걸로. 

하지만 계속해서 셋이 함께 가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런 마음이 통했는지 아침에 일어난 J가 무릎이 괜찮다며 같이 걸을 수 있겠다고 한다.  함께 걷지 못해 아쉬워하는 건 나 뿐만이 아니었나보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출발하자마자 J는 오늘은 많이 걷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늘 4시까지는 걸어야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A역시 대도시에 가는 김에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고 싶다며 일찍 쉬겠다고 쉽게 동의했다. 그렇게 거의 쉬지않고 걸어 오후 열두시가 되기 전에 20킬로미터쯤 떨어진 로그로뇨에 도착했다.  

까미노에서 두 번째로 만나는 대도시다.  



근처 바에서 느긋하게 앉아 츄러스와 커피도 먹고 알베르게에 자리를 잡고 도시를 구경하러 나섰다. 

 까미노길은 굳이 비율로 따지자면 작은 마을과 도시를 9대 1정도의 비율로 지나쳐가는 기분이다. 도시는 길도 포장되어 있고 차도 많지만 가장 다른 점은 순례자의 길이라는 표식이 굉장히 옅다는 생각이 든다. 곳곳에 순례자를 위한 노란 화살표가 있는 듯 싶은 작은 마을과 달라 화살표나 조가비 표식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신경을 쓰고 길을 걸어야 한다. 전날의 마을구경이 산책으로 분류한다면 이 날의 구경은 관광에 가깝다. 길에는 순례자가 아닌 관광객들이 대부분이고 길거리의 바에는 예쁘게 차려입고 나와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런 사이에서 오랜만에 배낭없이 관광을 하려니 여기가 스페인이 아닌 듯 어색하다. 내가 처음 들어간 스페인은 까미노길을 시작하면서부터였고 그렇기 때문에 스페인과 까미노는 같은 선상에 있었던가보다. 이제 10월도 막바지로 접어드는 스페인은 겨울이 되려는지 춥다. 분명 길을 출발하던 때는 반팔입고 시작했었는데.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까미노길에서 이틀을 여유롭게 보내고 나서인지, 내가 줬던 약이 효과가 있어선지 J도 더 이상 못 걷겠다는 소리 없이 잘 따라온다 싶었는데 오후가 되자 다시 J가 발목과 무릎이 아프다고 호소한다.  

이제는 평지가 계속 된다며 험한 길은 다 지나갔다며 달래 21Km지점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목표했던 마을에 너무 일찍 도착한데다 A가 도착한 알베르게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얘기하는 것을 잊어먹었지만 침대만 있으면 만족하는 나나 J와는 달리 A는 위생상태나 부대시설 등을 굉장히 신경쓰는 까다로운 사람이다)  

어떻게든 다음 마을로 가고 싶은 A가 J를 구슬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7.2Km만 더 걸어가면 되는데 가는 길은 거의 평지고 험하지 않다고, 앞으로 한시간 반이면 충분히 도착할테고 도착하면 마사지도 해주겠다고.  

J는 거의 울상이 되기 일보직전이었지만 나도 A도 가겠다고 나서니 따라올 수 밖에. 결국 오후 세시반쯤 원래 목적지보다 총 28Km를 더 걸은 지점에 도착했다. J는 오는 내내 내일도 모레도 20Km정도만 걷겠다고 나와 A에게 다짐을 받고 도착해 침대위로 쓰러져 버렸다.  

아, 침대에 쓰러지기 전에 잊지않고 A의 마사지는 받았다.  

킥킥거리며 끊임없이 노동을 강요하는 두 여자 틈에서 인생에서 최고 긴 15분이라 투덜거리며 스톱워치까지 맞춰놓고 안마해주던 A는 J가 끝나자 역시 투덜거리며 내 어깨도 안마해줬다. 씻고 약을 바르고 저녁도 거른 채 피곤하다며 일찍 잠든 J를 보며 계속 아프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내일도 모레도 이 셋이 함께 즐겁게 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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