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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씨 Sep 30. 2016

#34까미노데산티아고-순례자의 저녁만찬

-나헤라-그라뇽


우리가 웃고 떠들며 걷는 사이 어느덧 까미노도 초반에서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주가 바뀌어서인지 풍경은 미묘하게 변하고 알베르게 역시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보니 가이드북을 들고 걸어, 그 마을의 알베르게를 보고 가장 좋은 곳을 고른다거나 영 시설이 별로면 그 다음 마을로 간다거나 해서 개중 최대한 좋은 곳에서 자는 듯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셋에게는 처음 생장에서 받은 종이 세장이 까미노에 대한 정보의 끝이었다. 그 중 유용하게 쓴 알베르게 정보가 적혀있는 종이는 한 장이었다.

A4앞뒤 한장의 종이엔 빽빽한 표로 생장에서 800Km 떨어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마을정보가 들어있었다. 그 표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는 마을의 이름과 이 마을과 다음 마을 사이의 거리가 대부분이었다. 표에는 뭔가 더 많은 것들이 쓰여있는 듯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안내지는 불어로 적혀있었고 셋 중 누구도 불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무릎이 아픈 J는 며칠전부터 계속 하루에 20킬로미터 이상은 걷지 않겠다고 말했고, A는 그 거리가 성에 차지 않아 자주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대략 그만큼의 거리는 지켜 걷고 있었다. 그렇게 이날 도착한 마을은 그라뇽. 작은 마을에 그려진 화살표를 따라 도착한 알베르게는 음, 뭐랄까, 그게, 건물 안에 그려진 그래피티랄까, 꽤 어두운 헛간같은 조명 같은 거랄까, 굉장히 자유롭다.

히피같은 차림의 호스피탈레로가 나타나 알베르게를 소개해줬다. 이곳은 기부제 알베르게라고 한다. 기부제 알베르게는 순례자들이 묵고 다음날 적당히 돈을 내고 가는 시스템이다. 잘 곳과 씻을 곳만 내주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저녁식사를 함께 제공해주는 경우도 있는데 이 알베르게는 후자다.

오, 저녁식사, 오, 침대! 하면서 왠지 횡재한 기분으로 배낭을 풀 준비를 하는데 A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지더니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 바닥을 확인하고, 침대 밑과 벽을 살핀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말한다.

여긴 베드벅이 나올 것 같아. 난 여기서 못자.


이 마을에서 자겠다고 결정을 내리고 나면 몸은 이상하게도 '이제 한 걸음도 더 걸을 수 없어'의 상태가 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움직여야 하는 모든 걸음은 평소보다 다섯배쯤은 더 강한 중력의 영향을 받는 듯 싶다. 이미 이 마을에서 쉬기로 결정했고 알베르게까지 찾았는데 (내 기준에서이긴 하지만) 멀쩡한 알베르게를 두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야 한다니, 움직이는 것이 기분이 좋을리 없다.

이 알베르게는 기부제래. 마음에 안 들면 돈을 조금만 내도 되잖아. 저녁도 준다고 하고. 사람도 없어서 조용하게 잘 수 있겠어. 따뜻한 물도 잘 나올거야. 봐봐 저기 전기콘센트도 많다. 자, 세탁기를 찾아볼까?

끊임없이 이 알베르게의 장점을 찾아내는데 A는 들은척도 않고 배낭을 메고 나가버린다. 굳어진 얼굴로 따라 나가 난 지쳐서 여기서 한발짝도 움직이고 싶지 않다며 길바닥에 앉아버렸다. 알베르게 안에서는 나와 함께 장점을 찾아냈던 J는 이곳에서 자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나를 보며 결단을 내린듯 가방을 벗더니 근처에 알베르게가 있는지 찾아보겠다고 나섰다.

물론 베드벅을 안 겪어보긴 했지만 그래도 그게 다 뭐라고 저렇게까지 난리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공주처럼 편하게 잤던 것도 아닌데 하루쯤 더 안 좋은 곳에서 잔다한들 무슨 큰 변화가 생긴다고. 혼자 속으로 중얼대며 앉아 있는데 5분이 지나지 않아 J가 돌아왔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좋은 소식은 이곳 말고 또 다른 알베르게가 있어. 교회에서 운영하는 건데 여기도 기부제 알베르게, 침대는 없고 매트를 깔고 자야하는데 작고 아늑해. 그리고 저녁도 준대. 그런데 나쁜 소식은 여기서 삼십분쯤 걸어가야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A는 따라나섰다. 더 이상 선택지는 없었다. 중력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발을 질질 끌며 J를 따라 나섰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작은 골목을 지나치고 J가 다시 말했다.

짜잔, 삼십분 걸린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지. 여기가 그 알베르게야.

우리를 속여넘겼다며 환하게 웃는 J에게 차마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저기, 사실 알고 있었어. 너가 알베르게를 보고온 것처럼 구체적으로 설명했는데 사실 니가 자리 비운건 5분도 안 돼잖아?



돌계단을 올라 도착한 곳에서 아인슈타인을 닮은 이탈리안 호스피탈레로가 환대해줬다. 교회의 위층에 위치한 알베르게는 J의 말대로 아늑했다. 벽난로와 긴 테이블이 있는 거실과 부엌, 작은 화장실, 다락방이 전부인 작고 따뜻한 곳. 낮에는 이 거실에서 순례자들이 어울려 놀고 밤이 되면 다락에 올라가 한편은 남자들이, 한편엔 여자들이 매트를 펴놓고 자는 구조였다.


아까 갔던 알베르게만 못해봐라 하는 마음은 도착하자마자 씻은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혹시 A가 매트를 깔고 자는 것은 마음에 안 든다며 또 나가자고 하지나 않을까 걱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A 역시 이 곳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아마도 벽난로 때문이지 않았을까 짐작하지만.

아늑한 공간 덕분인지 사람들은 짐을 풀고나서 자연스럽게 벽난로 앞으로 모였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가장 따뜻한 곳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고, 혼자서 오든 여럿이 오든 상관없이 서로 안녕, 하고 인사하고 넌 어디에서 왔어?하는 말을 시작으로 반갑게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알베르게에서는 어제 봤던 사람을 오늘 보고, 엊그제 봤던 사람을 오늘 보는 식으로 거의 비슷한 얼굴이 있곤 했는데 이곳에서는 내 일행을 제외하고는 다들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그들 역시 대부분이 그런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벽난로 앞에서는 시끌벅적한 수다가 이어졌고 그 옆에서 J는 누군가와 체스를 두고, 저녁식사를 준비하려고 하니 도와달라는 호스피탈레로의 말에는 여럿이 달려가 감자를 깎고 양파를 다듬었다. 난 힘들어서 이런거 안해 하며 얄밉게 말하는 독일인 아저씨에게 모두가 '너 아까부터 계속 그러더라'하며 농담스럽게 야유하고, 잘 하고 있는지 지켜보겠다며 감자를 토막내는 내 앞에서 사진을 찍는 A에게 '웃기지 말고 너도 도와' 하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다들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꼭 대가족같다. 함께 감자를 다듬으며 A가 말했다.

채소와 고기가 익는 냄새가 퍼졌다. 작은 거실은 어느새 훈기로 가득차 있었다. 다들 서로를 도와 식기를 테이블위에 놓고 다함께 긴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식사가 시작되기 전 호스피탈레로가 각 언어로 된 기도문을 가져와 몇 사람에게 건넸다. 테이블에 앉은 순서대로 기도문을 읽고 나머지 사람들은 조용히 그 말을 들었다. 프랑스어로, 스페인어로, 영어로, 이태리어로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나직하게 기도문을 읊는 소리가 작고 따뜻한 방안에 퍼졌다. 식사가 시작되기전 마음이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패밀리 스타일로 큰 접시에 담긴 샐러드와 고기감자 요리가 날라져왔다. 와인이 큰 병에 담겨 테이블 위에 놓였다. 다들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고 식사를 즐겼다. 아마도 과거 어느날에도 조금 호화스러운 기분의 순례자들은 이런 저녁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싶다. 따뜻한 방안과 와인이 포함된 3코스의 순례자의 저녁식사, 테이블에 둘러앉은 처음보는 사람들. 낯설지만 어딘지 모르게 낯익고 포근한 밤.

식사가 끝나고 호스피탈레로는 아래층 교회에서 저녁미사가 열린다며 사람들을 인도해 다녀왔다. 미사에 다녀와 다함께 저녁식사 뒷정리를 마치고 자리를 정돈한 후 다락에 올라가 침낭을 깔고 매트에 일렬로 누웠다.


더없이 완벽한 순례자의 저녁이었다.



나중에 돌아와 그라뇽에서 들었던 기도문을 구글링해봤다. 그렇게 나온 순례자의 기도문. 그때 들었던 기도문과 단어같은데서 조금 차이는 있는듯 싶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비슷한듯 해서 퍼왔다.


O God, who brought your servant Abraham out of the land of the Chaldeans, protecting him in his wanderings, who guided the Hebrew people across the desert, we ask that you watch over us, your servants, as we walk in the love of your name to Santiago de Compostela.

Be for us our companion on the walk,

Our guide at the crossroads,

Our breath in our weariness,

Our protection in danger,

Our albergue on the Camino,

Our shade in the heat,

Our light in the darkness,

Our consolation in our discouragements,

And our strength in our intentions.

So that with your guidance we may arrive safe and sound at the end of the Road and enriched with grace and virtue we return safely to our homes filled with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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