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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씨 Oct 05. 2016

#35까미노데산티아고-하루를 마무리하는 건 멋진일

그라뇽-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

6:30AM 

알베르게의 아침이 시작되는 순간.  

보통은 이미 삼십분 전부터 깨있지만 침낭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알베르게 안의 피할 수 없는 소음인 코고는 소리를 무시한 채 일분이라도 더 자려고 노력하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 씻고 배낭을 챙기는 소리를 들으며 침낭 밖으로 나가야 할 때를 가늠한다. 대체로 A나 J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나서 일어나곤 한다.   

길을 떠날 준비는 항상 같다.  

씻고 어젯밤 사용한 침낭을 말아 정리하고, 세면도구 및 기타 짐을 정리해 넣고 알베르게 곳곳에 널어 둔 빨래를 걷어 챙긴다. 무거운 짐은 아래, 가벼운 짐은 위에, 시간이 좀 더 난다면 최대한 배낭을 납작하게 싸도록 노력한 뒤 우비, 휴지, 물통 같은 자주 쓰는 물품은 배낭을 멘 채로도 손을 뻗어 잡을 수 있을 곳에 넣는다. 며칠 사이에 몸에 익어 어느덧 익숙하게 짐을 꾸리고 있는 나 자신에 뿌듯해하기도 한다.

하루종일 마실 물을 담고 나면 어느덧 하루를 시작할 때다. 

9:00AM 

아침엔 어둡고 졸려 대체로 말없이 걷는 것에만 집중하는 편이다. 걷기 시작하고 한시간 혹은 두시간쯤 지나 첫마을에 도착할 때쯤이면 나나 J가 커피를 마시자고 졸라댄다.  

마을에 들어가 바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바에서 파는 간단한 샌드위치인 보카디요나 계란요리인 또르띠야 같은 것으로 요기하거나 전 날 사둔 빵이나 비스켓같은 것을 먹는다. 물론 이건 다음 마을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있을 때의 얘기다. 

가끔 전 마을과 10Km이상 떨어져 있으면 배낭안의 빵을 씹으며 계속 걸어갈 수 밖에. 

11:00AM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생생한 시간이다.  

카페인의 힘으로 힘차게 걸을 수 있고 아직 걷기 시작한지 오래지 않아 지치지 않았다. 주변에 신기한 것이 있으면 가장 적극적으로 참견할 때기도 하다. 만약 우리의 족적을 선으로 잇는다면 이 시기의 걸음은 일직선보다 지그재그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게 걷고 있으면 J가 노래를 불러달라고, 너희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며 재잘재잘 말을 건다.  

그 중 셋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은 선택놀이. 주로 J가 질문하는 방식이다.  

만약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다면 어떤 메뉴를 먹을 것인지, 나중에 자녀는 아들과 딸 중 어느 쪽을 낳고 싶은지, 예쁘고 성격 이상한 사람과 못생기고 착한 사람 중 사귄다면 누구를 만날 건지, 나중에 어느 나라에서 살고 싶은지 등.   

처음엔 심드렁한 듯 별 대답않던 A는 어느새 J의 유도심문에 걸려 열심히 대답하고 있고 그 사이 J는 다음 질문을 하고 근처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오고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우며 뿌듯해하고 있다.  

1:00PM

이제 슬슬 지치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쉬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배가 고프면 길가에 앉아 지나온 마을 빵집이나 슈퍼에서 산 점심거리를 먹으며 쉰다. 길에 앉아있을 때는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고 주변에 신기한 것이 보여도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이 시간엔 주로 그나마 가장 멀쩡한 A가 얘기를 하는 편이다. 이 시간은 어떤 면에서 서로에게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기도 한데, 랭귀지체인지가 일어나는 시간은 이때쯤이기 때문이다. 랭귀지 체인지라는 거창한 이름은 달려있지만 사실 서로 각자의 언어로 신조어, 속어, 비어를 알려주는 시간에 가깝다. 대부분의 일에는 귀찮음을 표하는 A는 내가 모르는 속어를 알려줄 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열의있는 선생님이다. 너 이건 알아? 로 시작해 '몰라'라는 답변이 나오면 은근 신나하는 듯도 싶다. 새로운 신조어를 배우면 그날 대화에 적용해 완벽한 복습까지 이루어지곤 한다. 한국과 미국의 CM송에서부터 시작해 속어와 신조어가 범람하는 이 시간에는 그동안 알아듣지 못했던 욕이 이런 의미였구나를 알게되며 뒤늦게 감정이 생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서로의 문화를 잘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가끔은 A가 J에게 한국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주고 있으면 정정해 주기도 한다. 참 신기한건 그동안 살아오며 애국자가 되어야 겠다든지 조국과 민족에 자긍심을 느끼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 널리 전파해야겠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하면서 커본 적은 없지만 A가 이상한 소리를 하고있으면 그 순간에만은 이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된, 우수한, 민족문화를 전파해줘야할 것 같은 이 기분은 대체 뭐지.  

3:00PM

이쯤 되면 하루 걸을 분량의 90%쯤은 다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점점 쉬는 횟수가 많아지고 쉬는 시간도 길어진다. 발걸음은 점차 느려진다. 생장에서 나눠줬던 다음 알베르게까지의 거리정보를 보고 얼마나 더 가야할지를 가늠하고 일정표를 보며 갈 길이 얼마나 험한지를 살핀다. 생장에서 준 종이를 들고있는 A와 나와 달리 J는 론세스바예스에서 출발해 이마저 종이도 없다. 너무 힘들어 여기서 더 안 가겠다며 버티는 J에게 ‘저 종이에서 그러는데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다음 알베르게가 있어’, ‘이제 조금만 올라가면 오르막이 끝난대’와 같은 거짓정보로 사기를 진작시키기도 한다.  

한동안 사람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밭과 산을 넘으면 저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운이 좋으면 오늘은 따뜻한 물이 잘 나오고 난방도 잘 해주는 알베르게에 들어갈 수 있을 거다.  그러면 곧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맛있는 밥을 먹고, 베드벅이 나오지 않는 튼튼하고 깨끗한 침대에 누워 뒹굴거릴 수 있겠지. 좀 더 운이 좋다면 저녁을 먹는 바에서, 혹은 알베르게에서 와이파이가 될 지도 모른다.  

오늘 알베르게에선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를 얘기하며 걷다보면 어느덧 마을입구에 다다랐다. 까미노 위에서의 하루도 지나간다.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도 꽤 멋진 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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