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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씨 Oct 07. 2016

#36까미노데산티아고-11일의 마법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부르고스

어느날 밤이었다. 알베르게에서 저녁을 해 먹고 J와 둘이 놀고 있을때 처음 보는 프랑스인 아저씨가 인사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친절하고 유머감각있는 그와 우리는 금세 친해졌고, 한참 웃으며 대화하던 중 그가 물었다. 너희는 몸이 아프지 않냐고.  

J와 내가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하며 아픈 곳을 줄줄이 대며 힘들다고 말했더니 그가 말했다. 이 길에는 11일의 마법(eleven days magic)이란게 있어서 11일 전까지는 몸이 너무 아프고 힘들지만 11일이 지나면 그 모든 통증이 사라진 듯 없어져 그냥 걸어갈 수 있게 된다고.  

그 말을 들은 후 J와 나는 우리가 걸은 날을 세보았다. 생장에서 출발했던 나는 10일, 그 다음날 론세스바에스에서 출발한 J는 9일째 되는 날 저녁이었다.

이제 11일의 마법이 일어날 차례라며 희망을 가지고 출발한 11월의 첫 날. 이 날은 20킬로미터 정도만 걷기로 정했다. J의 다리도 아픈데다 20킬로미터를 걸어가면 그 다음 도시인 부르고스까지는 중간에 마을 없이 21킬로미터가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꽤 빨리 걷는 편이었지만 하루에 40킬로미터 넘는 거리를 걸어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까지 무리를 하면서 걸을 필요는 없었다.


이 날의 첫코스는 12킬로미터 떨어진 ‘산 후안 데 오르테가’까지 가는 것. 오후에 비가 온다는 시리의 안내가 맞는지 바람이 정말 세차게 불었다. 산길 시야 저 멀리 풍력발전기가 열심히 돌고 있었다. 예전엔 큰 선풍기같은 풍력발전기는 별 감정없이 보거나 바람이 부네, 라는 정도의 감성으로 봤었다면 요 며칠사이엔 그 존재가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풍력발전기가 있다는 말은 그 동네에 바람이 꽤 자주, 세게 분다는 뜻이고, 그 말인즉슨 걷는 우리가 그 자주, 세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걸어야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며칠 걷는 동안 우리는 자연현상에 매우 예민해졌다. 하루의 대부분을 길에서 보내는 우리에게 자연은 생각보다 훨씬 영향을 미쳤다. 기분도 체력도 감상도 온전히 내 자신에서 비롯된다기보다 날씨와 길의 경사같은 것들에서 상당부분 비롯됐다. 이제는 비도 바람도 해도 추위도 예전처럼 아, 저런게 있구나 하고 흘려지나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까지는 괜찮았다. 오늘은 마법이 생긴하는 11일 차에다 어제는 A가 어깨 안마도 해줬으며, 가장 멋진 사실은 이 날은 20킬로미터만 걸으면 되니까 말이다. 함께 노래부르고 신나게 걷다가 도착한 다음 마을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침으로 비스켓과 아몬드를 먹었다.

산 속 마을답게 하나밖에 없던 바에서 그리 맛있지는 않지만 카페인 보충 겸 마신 커피가 뭐가 잘못됐는지 그 때 이후로 갑자기 토할 것 같아졌다. 이 길을 걸으며 사용하지 않을 듯 싶어 가방 깊숙이 쳐박아 둔 구급약통을 꺼내 약을 먹었는데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속은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고 힘이 없다.  

그동안 쭉 멀쩡했던 내가 갑자기 이러니 둘은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대신 아파줄 수도 없고 그들이 뭔가를 해줄 수도 없었다. 그냥 오늘은 20킬로미터만 걸으면 되니 좀 더 무리해서 걷고 도착한 후에 쉬도록 하자며 계속 걸을수밖에 없었다.  

보통은 하루에 한 번 정도 바에 들어가는게 전부인데, 비가 내려 쉴 곳이 마땅치 않은 데다 아픈 나 때문에 중간중간 자주 바에 들렀다. 둘이 차와 음식을 먹으며 내게도 뭘 좀 먹어보라고 권하는데 도저히 뭔가를 넘길 수 있는 몸이 아니다.  그냥 옆에서 뜨거운 물만 청해 마시고 약 먹고하는 정도가 전부다. 할 것도 없어 와이파이가 되는 바에서 그동안 온 메시지에 답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서러워졌다.  

나는 왜 비오고 바람부는 낯선 땅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  

우울한 기분으로 아무 말 없이 한참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은 너무 아프고 힘이 든다며 푸념했다. 한창 어디선가 활동하고 있을 시간대의 사람들과의 대화는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화는 토막토막 끊기고 나는 계속 힘이 없었다. 그러다 고개를 드니 A와 J가 여전히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함께 걷고 있는 둘이.  

눈이 마주치자 괜찮아?하고 묻는 둘에게 괜찮다고 말해줬다.  이제 얼마 안 가면 목적지에 도착하니 열심히 가서 푹 쉬자고 억지로 웃었다. 다음 마을까지의 거리는 3킬로미터, 그 다음은 1.8킬로미터, 그 다음이자 최종목표인 마을까지는 6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다. 평소 같으면 금세 걸어갔을 거린데 몸이 아프니 힘들다. 오후에 온다던 비는 성급하게도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가는 길이 산길이라 J도 무릎이 아프다며 자꾸 처졌다. 보통의 페이스대로라면 오후 한시쯤 도착할 거리를 세시쯤 도착했다.  

오후인데도 비가내려 어둑한 산 저쪽으로 멀리 마을이 보이는 순간, 그 동안 어떤 마을을 만났을 때 이처럼 기뻤던 적은 없었다. 저기 목적지가 보인다며 둘에게 말했다. 오늘 함께 걸어줘서 정말 고맙다고, 너희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만큼 못 걸었을 거라고.



그러나, 언제나 샴페인을 먼저 터뜨리는 건 금물이다.  


도착한 마을의 유일한 알베르게가 문을 닫은 것이다. 아니 왜?하며 생장에서 준 종이를 살피는데 불어를 모르는 셋의 눈에도 어렴풋이 이것 때문인가 싶은 글자가 보인다. mars~octobre, 이 알베르게는 3월부터 10월까지만 운영한다는 듯.

다시 한 번 그래서 아니 왜?하며 잠깐 생각한 순간 깨달았다. 이 날은 11월 1일, 그러니 이 알베르게는 어제까지만 열었다는 걸. 20킬로미터를 필사적인 힘으로 걷고 마을을 발견한 뒤 겨우 웃음을 찾아가고 있던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다음 마을은 중간에 아무 것도 없이 21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다. 오후 세시에 21킬로미터를 더 걷기 시작하면 언제 도착할 지 알 수 없다. 상황을 해결해 보고자 J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알베르게가 또 없느냐고 물었다.

없단다.  

근처에 호스텔이 보이기에 가서 가격을 물었다. 밖에서 보기에도 시설이 좋아보이던 호스텔 주인은 알베르게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숙박료를 불렀다. 결국 셋 모두 21킬로미터를 더 걸어 다음 마을인 부르고스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출발 전 비를 피해 근처 바에 들어갔다. 여전히 무엇을 먹고 소화해낼 속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뭐라도 먹지 않으면 그만큼을 걸어갈 자신이 없어 보카디요를 시켰다. 반토막을 억지로 밀어넣고 있는데 A가 먼저 가겠다고 둘은 더 쉬다 오라며 가버렸다.  

좀 더 쉬다 출발한 나와 J. 셋이 걷다 둘로 줄어들은 길은 줄어든 사람의 분량보다 훨씬 더 말이 없어졌다.

우리는 아마 A를 만나지 못할 거야.

J가 말했다. 나도 어렴풋이 그럴 것 같다 생각했다.  

대도시인 부르고스는 알베르게가 세 개나 있는데다 밤중에 도착해 A를 찾아 알베르게를 돌아다닐 수는 없을테니. 걸으면서 J는 이제 더 이상은 안되겠다며 내일은 부르고스에서 하루 더 쉬겠단다. 그리고 걷다 시간이 안되거나 무릎이 더 아프면 산티아고를 포기하고 돌아가겠단다. 너는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며.


산길은 생각보다 쉽게 끝났지만 공장과 물류센터같아 보이는 것들만 죽 늘어선 재미없는 길이 이어졌다.  

내가 살던 도시 변두리 어디쯤 풍경인 것 같은 재미없는 길을 걸으며 줄곧 생각했다. 이제 J도 마지막일지 모르겠다. 난 이들이 정말 좋지만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건 길 위에서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법을 배우는 거라 이해하려 했다. 이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쿨하게, 좋게 헤어지는 방법을 아는 거라고. 나는 지금까지 그런 걸 잘 하지 못해 지나간 길마다 미련을 흩뿌리며 주변 사람들에게 질척대지 않았던가.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배우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달래려 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수 없었다. 끝까지 함께 걸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21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다던 부르고스는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도시 깊숙한 곳에 있는 알베르게는 생각보다 찾기 어려웠다. J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열댓번 길을 물어보고 겨우 도착하니 저녁7시가 넘어있었다. 리셉션에서 몇몇 아는 얼굴을 보고 반가워하며 신발장에 신발을 넣는데 익숙한 A의 신발이 보였다. A가 여기 있다며 기쁜 얼굴로 올라가니 바로 우리 전 침대다. 길을 헤매는 바람에 겨우 우리보다 20분 정도 먼저 도착했단다. 

도착하고 모든 긴장이 풀리니 힘이 들어 뭘 먹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너희는 오늘 밥 같은 것을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뭐라도 먹어야 한다며 J가 잔소리했지만, 그런 J를 포함해 모두들 피곤해서 저녁은 못 먹겠다고 건너 뛰었다. 씻고 온 몸에 파스를 도배한 뒤 누웠는데 여전히 발바닥, 종아리, 어깨가 걷고 있는 것처럼 욱신거리며 아팠다.  


이 날 총 걸은 거리는 42킬로미터, 마라톤이라도 한 번 뛴 거리다. 깜깜한 알베르게 안에는 코고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몸은 천근만근 피로해 당장이라도 침대 밑을 뚫고 꺼져버릴 것 같았지만 새벽 두시가 넘도록 종아리와 어깨가 아파 잠을 못자고 뒤척거렸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11일의 기적은 일어날까. 그리고 내일은 누구와 걷게될까. 

지친 몸으로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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