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고스-레온
본의 아니게 강제소환당했던 릴리고스의 저녁.
하루종일 공포에 떨었으며 생각보다 많이 걸어 정강이도 계속 아팠지만 알베르게에 들어가 씻고, 저녁을 해먹고, 따뜻한 침대에 눕자 긍정적인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뭐 고생은 했지만 A랑 계속 걸을 수 있으니까, 뭐, 정말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상태 좋은 알베르게도 들어왔으니까, 게다가 본의 아니게 많이 걷는 바람에 다음날 레온까지는 이십킬로미터정도만 걸어도 되니까.
레온.
에스파냐 카스티야이레온 자치지역을 구성하는 레온주의 주도이며 우리가 이 길을 걷는 동안 두 번째로 방문하는 대도시였다. 지난번 처음 방문했던 대도시인 부르고스에서는 밤늦게 도착해 아침 일찍 떠나는 바람에 즐길 여력도 없이 지나가 버려 우리는 레온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다. 부르고스를 떠난 이후부터 하루에 30~40킬로미터를 걷던 메세타를 지나며 우리는 항상 레온에 대한 얘기를 하곤 했었다. 아마도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을 그곳엔 시간을 들여 천천히 도착해 한나절 동안 완전히 즐기자고 했었다.
이날 따라 알베르게 우리 방엔 사람이 꽉 차, A와 이층침대의 아래 위를 나눠쓰게 됐다. 이층침대의 단점은 아무래도 허리펴고 앉아있기엔 힘든 낮은 천장과 더불어 침대에 누운 사람의 뒤척임이 서로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 씻고 저녁을 먹자마자 침대에 뻗어버렸지만 몸이 너무 피곤해선지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위에서 삐걱거리는 움직임이 그대로 전달되는 걸로 봐선 A도 상황은 비슷한 듯 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A에게 말했다.
우리 내일 레온에 가면 진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역시 침대 윗칸에서 A가 대답했다.
-응, 나는 큰 아이스크림 먹을 거야.
-오, 나도 아이스크림! 그리고 맥주를 잔뜩 마셔야지.
-레온은 큰 도시니까 와이파이도 되겠지?
한동안 우리 침대 아래위로는 레온에 가면 뭘 할지, 그곳엔 무엇이 있을지, 무엇을 살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우리는 레온에 가서 립밤과 판초우의를 사고 와이파이를 하고, 관광을 하고, 간만에 색다른 메뉴로 맛있는 저녁식사와 아이스크림을 먹고 내가 수다스러워질만큼 맥주를 마실 거다. 아마도 레온은 대도시이고 우리는 생각외로 원하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그 정도 편의 정도는 제공해줄 수 있을 거다.
레온에서 하고싶은 일의 목록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가물거리는 눈으로 한참을 떠들다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잠들어버렸다.
아침이 되자 다리는 점점 더 아파왔다.
그동안은 A와 비슷한 속도로 걸었고, 다리가 아프기 시작한 전 날의 경우엔 출발하고 한시간 정도는 A를 따라갈 수 있는데 이 날은 출발하자마자 뒤쳐졌다. 다음 마을의 바에서 기다리겠다는 A를 먼저 보내고 겨우겨우 첫마을 바까지 도착하고 나니 A와 늘 보던 한국인 무리들이 한 테이블에서 다함께 커피를 마시고 일어서려는 참이다. 커피를 주문하고 그들이 앉은 테이블 옆에 앉았다. 그들은 짐을 챙겨 곧 떠나겠지만 그래도 A 정도는 내가 커피를 마실 때까지 기다려줄 거라 생각했는데 이들과 함께 일어선다.
서운한 마음이 생길 법도 한데 너무 당연하다는 듯 일어서니 '아, 이 친구의 사고방식은 나와 다르구나'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어차피 이 속도로 A를 따라가는 건 불가능해 그냥 레온의 알베르게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리가 늘 그렇듯이 그 도시에 들어가 제일 처음 나타나는 알베르게에서 묵기로.
기대했던 대도시로 가는 발걸음을 축복하듯 날씨는 맑았다. 날씨도 좋으니 오랜만에 혼자서 여유부리며 걷자며 천천히 쉬다 길을 나섰는데 곧 외로움과 무서움이 밀려들었다. 첫날도 이튿날도 혼자 걸었었고, 바로 전날도 혼자 걸었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일 A와 함께 걸을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했고, 전날엔 실제로 이제 너는 네 몫대로 걸어가라며 인사까지 하고 헤어졌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오늘은 진짜 이별도 아니고 20Km만 걸어 가면 만날 수 있는데 말이다.
혼자 절뚝절뚝 걸으며 평소보다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혼잣말을 하면서 걸었다. 레온에 가면 나는 립밤을 사고, 도시를 관광하고, 엄청난 저녁과 함께 맥주를 잔뜩 마시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먹을 테다. 대도시엔 어디서든 와이파이가 빵빵 터질 거다.
기분을 상쾌하게 하기 위해 노력을 하면 할수록 어쩐지 더 기분은 가라앉았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그토록 기다리던 레온인데 대체 왜.
보통 길을 걷다 보면 마을과 마을 사이엔 한참동안 아무 것도 없는 벌판이나 도로가 이어지고, 곧 시야 저멀리 마을이 눈에 들어오곤 한다. 네시간 정도를 걷고 있는데 저 멀리 대도시의 풍모가 느껴졌다. 작게 보이던 마을도 가까이에 가면 갈수록 점점 크게 다가왔다 다시 스쳐 지나가곤 했지만, 대도시는 느낌부터 달랐다.
보통의 작은 마을은 날씨나 길의 경사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략 눈 앞에 마을이 보이는 정도면 대략 3~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정도다. 저멀리 작은 뭉치같은 마을이 보이고 조금 더 가까워지면 마을안의 집이 보이고, 집과 집 사이에 우리가 걸어 들어가고, 마을 밖으로 빠져나갈 길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평소 마을의 처음과 끝이 적당한 시야범위 안에서 끝나고 다음 걸을 길까지 보였다면 여기는 시야범위 끝까지 건물이 들어차 있다.
눈앞에 나타난 도시의 웅장함에 주눅들며 초입에 들어설 때쯤엔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큰 도시에서 A를 찾을 수 있는 걸까. 걱정이 됐다.
들어가는 길에 있던 인포메이션센터에서 지도를 받고 이 곳의 알베르게 위치도 알아냈다. 도시에 들어가고서도 한참을 더 걸어야 알베르게가 나왔다. 기대했던 대도시의 알베르게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허름한 알베르게에 들어서자마자 A가 여기에 묵고 있는지를 물었다. 다행히 이곳에 있단다.
그런데 이 곳 남자와 여자방이 분리되어 있다. (한방에 여러 개의 침대가 있는 호스텔의 도미토리나 알베르게같은 곳은 대체로 남녀가 같은 방에 묵고, 남녀방이 분리되어 있는게 드문 편이다) 호스피탈레로에게 친구를 찾겠다고 허락을 받아 조심스럽게 남자방에 들어갔는데 A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아마도 관광을 나갔나보다.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먼저 도착하더라도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줄 줄 알았는데. 저녁을 함께 먹자고 쪽지를 남겨두고 나도 근처를 구경하러 나왔다.
대도시는 복잡하고 어둡고 추워졌다. 내 주변엔 수없이 많은 건물들이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밝은 얼굴로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런 얼굴이 되지 않았다. 기분이 가라앉아 뭘 봐도 내키지 않는 데다가 곧 비가 내리려는 듯 싶어 얼른 다시 들어가려고 했지만 중간에 길을 잃었다. 쪽지에 남겨놨던 저녁 먹으러 갈 시간이 가까워져 마음이 급해 허둥지둥 걷다보니 천천히 걸을 때는 아프지 않던 다리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한참을 헤맨 끝에 만나기로 한 시간이 거의 다 돼서야 알베르게에 도착했고 기다리고 있던 A를 만나 식당을 찾으러 나섰다.
식당을 찾으러 헤매는 사이 흩날리던 비는 점차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우비를 챙길 생각은 못한 터라 비를 제법 맞아 추워졌다. 우리가 릴리고스에서 떠올렸던 대도시의 식당은 와이파이가 되고, 평소에 먹는 것과는 좀 다른 메뉴를 파는 곳이었다. 그렇게 굉장한 것을 원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주변을 아무리 찾아도 와이파이가 되는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한참을 돌다 포기하고 들어간 눈 앞에 있던 식당엔 우리 외에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며칠 전부터 기대했던 대도시의 저녁식사는 그저 그랬다. 순례자메뉴의 와인을 맥주로 바꿀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안 된다고 해 시킨 햄버거는 비싸고 내용물은 부실했다. 한동안 둘 다 아무 말 없이 각자의 버거와 음료를 먹고 마셨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너는 레온에 하루 더 머무르는 게 어때?
A가 말했다. 하루 더 머무르며 발도 좀 쉬고 J도 만나는게 어떻겠냐고.
나는 괜찮다고 더 갈 수 있다고 하고 싶었지만 아까 식당을 찾을 때조차 A가 걷는 걸음을 따라갈 수 없었다. 천천히 걸을 때는 몰랐지만 속도를 내니 다시 발을 절뚝거리고 걷는 모습을 A도 눈치챘나 보다. 이대로 내가 계속 걷는다고 하는 건 정말 욕심인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다 대답했다.
있잖아 A, 나는 J도 너도 셋이서 함께 끝까지 걷고 싶어.
그런데 J는 그 다음날 레온까지 올지 안 올지도 모르고, 계속 걷게될지 말지도 확실하지 않은 거잖아.
그래서 나는 너랑 같이 가고 싶은 거야.
A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슈퍼에 들러 아이스크림과 맥주를 구입하고 돌아오며 몇 번을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A. 여기 나랑 하루 더 있을래?”
A는 피식 웃더니 내일 몸상태를 보고 결정하겠단다. 이 매정한 미국인 같으니라고.
레온에서는 전날 얘기했던 것처럼 필요한 물건도 사고, 저녁식사도 하고, 알베르게의 부엌에서 아이스크림도 맥주도 먹었지만 전혀 신나지 않았다.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나눠먹고 각자 방으로 흩어지며 우연히 부엌 앞의 방명록을 봤다.
앞 사람들이 남긴 글을 별 뜻 없이 넘겨보다가 A가 (아마도 처음으로) 알베르게의 직원에게 남긴 감사 메시지 밑으로, 한국어로 첨가된 한 줄이 보였다.
ps. 00 파이팅!
뭐야 이 뉴요커. 한국 사람들이 파이팅하고 외치는 게 바보 같다더니. 투덜거리며 이 날 처음으로 살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