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빵씨 Nov 30. 2016

#51까미노데산티아고-속도를 내고 싶진 않았어

-곤사르-멜리데


밤늦게 찾아간 곤사르의 알베르게에서는 며칠전부터 헤어졌던 J언니의 동행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원래 봤었던 이 무리들은 다섯명. 이 다섯명은 나처럼 혼자 와서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한명씩 모여서 다섯명이 되고, 천천히 걷다가 비행기 스케줄때문에 중반 이후로부터는 좀 빨리 걷는 중이었다. 빨리 걷다보니 속도가 나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챙겨 같이 걷기는 무리였고, 그래서 J언니와 L언니는 조금 뒤쳐져 나와 신학생과 걷고, 나머지 세명은 함께 걸어 한 마을 정도 앞서나가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다 비행기 스케줄이 빠듯한 J언니는 좀 무리해서라도 한마을을 더 따라잡아야겠다고 생각했고, 혼자 걷겠다던 신학생은 마음을 바꿔 함께 40Km를 걷겠다고 결정하고, 나와 L언니를 엮어가려 했지만 정작 따라가겠다던 L언니는 속도를 쫓아갈 수 없어 천천히 가겠다며 떨어졌고, 정작 천천히 걷겠다던 나는 갑자기 투지에 불타올라 전 날 밤길까지 걸으며 40Km를 걸어 곤사르에 도착하게 된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은 이 세명이 더 합쳐져 여섯명이 출발하게됐다. 이날은 32Km만 걸으면 뿔뽀요리가 유명한 멜리데라는 지방에 가게 된다고 했다. 함께 걸어 저녁에 뿔뽀를 먹자고 했지만, 이제는 정말 천천히 걸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꾀는 무리를 단호히 거절하고 신학생과 둘이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리해서 걷지 않고 천천히 걸어 처음 까미노를 시작할 때처럼 오후 네시가 되면 나타나는 알베르게에서 쉬겠다면서. 전전날 기도와 명상을 위해 혼자 걷겠다던 신학생은 이 모든 상황을 운명이려니 하며 받아들였는지 나와 함께 걸어줬다. 약간 미안하긴 했지만 굳이 같이 걸어달란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베푼 친절이라 거부하진 않았다.  

뭐, 굳이 내가 아니었더라도 이 친구는 이사람, 저사람, 한국인, 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얘기를 들어주느라 혼자 걷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본인이 신학생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인사하고 몇마디를 하고 나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고 있는 것을 보면 저 친구는 천성이 성직자인가 보다. 전세계 어느 나라 사람을 만나더라도 열마디 안쪽으로 적막이 흐르게 하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내가 벤치마킹하고 싶은 능력이었다. 


둘이 걷기 시작하며 내가 처음 걸었던 얘기를 해줬다. 어떻게 이 길을 걷기 시작했는지, 길을 걸으며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 내가 걸었던 길이 어땠는지. 그러고 나서는 딱히 할 얘기가 없기에 카톨릭에 대한 걸 물어봤다.  

이 친구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정말 관심을 기울여 들어주고, 무슨 질문을 하더라도 성심성의껏 대답해준다.  

신학생의 얘기를 들으며 삼십년 가까이 살며 카톨릭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예전에 선배가 급 불교신자가 되어 포교하고 다니는 것을 귀동냥하며 불교에 대한 기초지식을 얻고 불교에 무지했다는 것을 알게 됐듯이.  

재미있게 듣다 스페인 이후에 그리스와 이집트 터키를 갈 예정이라니 친절한 신학생은 그 나라와 연관된 종교사를 얘기해준다. 초등학교 4학년 사회시간에 역사가 나오기 시작하며 그와 동시에 사회과목을 놔버린 내게는 참 귀중한 정보원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이집트 올드카이로에서 신학생에게 들은 지식을 활용하여 아는 척을 할 때 그 소중함은 더욱 커졌다.  


그렇게 걷다보니 생각보다 또 너무 빨리 걷기 시작한다. 전날엔 아무리 걸어도 속도가 나지 않아 마치 10Km쯤 잃어버린 채로 걷는 기분이라 했었는데, 그 잃어버린 10Km를 이 날 보상받는 듯 힘든 기색도 없이 속도가 쭉쭉 나기 시작한다. 뭔가 불안한 예감이 들어 신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아무래도 멜리데까지 갈 것 같지 않나요?

 

진심으로 40Km를 걸은 다음날 바로 32Km를 걷고 싶지는 않았기에, 바에서 쉬자며 들러 맥주를 시켰다. 이건 천천히 걷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드디어 찾았다.  

이번 여행 최고의 맥주를! 

이제 나는 스페인어로 맥주와 생맥주를 구분해 주문할 수도 있다고 뻐기며 생맥주를 달라고 했으나 생맥주가 다 떨어졌다며 준 이 것, 에스트레야 갈리시아.  

길에서 냄새나고, 물도 더러워보였던 이 지방의 맥주라면 그닥 끌리지 않는다며 한모금 마셨는데 이거 엄청 맛있다. 둘 다 한모금 마신 뒤 눈을 반짝이며 먹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산티아고에 도착해서까지 우리의 공식맥주는 에스트레야 갈리시아였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 길을 나섰는데도 거리가 훅훅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나와 신학생이 예고했던 대로 4시 전에 알베르게에는 도착했으나 그곳은 불안한 예감대로 32Km 떨어진 멜리데였다.  

멜리데에 도착하니 과연 문어요리인 뿔뽀가 유명한 곳 답게 곳곳에 간판이 서있었다. 그동안 특별히 먹는 것에 신경쓰며 여행을 다니지는 않아서 이 지방에서 무엇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이날은 처음으로 그 지방 특별음식을 먹는 날이다.  


사람들이 얘기했던 맛있는 뿔뽀집은 어디인가를 살피며 걷는데 저쪽에서 대낮부터 빨개진 얼굴로 담배를 피고 있던 청년이 아는 척을 한다. 세상에, 잭이었다. 초반부에 A와 J와 며칠 함께 걸었었던 친구. 20대 초반의 잭은 여전히 알코올과 니코틴의 힘으로 걷고 있었다. 반가워하며 처음에 그렇게 빨리 걷더니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너무 빨리 걸어 그 속도대로라면 산티아고에서 비행기를 일주일 대기하고 있어야할 거 같아 일부러 쉬면서 천천히 걷는 중이란다.  

누나는 며칠 사이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요?라고 묻는 잭에게 너도 A와 걸어보라고, 살 빠진다고 대답해주니 그제서야 A가 없는 걸 눈치챘는지 A와 J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J는 다리가 아파 부르고스에서 떨어졌고 혼자 걷다 산티아고를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고, A는 아파 먼저 왔다고 했더니 J가 산티아고를 포기할 줄은 몰랐다며 아쉬워했다. 까미노 초반을 함께 공유하고 중반을 함께하지 못한 사람을 후반에 다시 만나니 신기한 기분이었다. 

나중에 얘기를 하다보니 잭이 만났던 사람들과 우리 각자가 만났던 사람들이 겹치는 사람도 많았다. 이건 비단 잭과 나의 우연은 아니었다. 아마도 사람이 걷는 속도는 다들 비슷해서인지 이름도 잘 모르고 얘기 한 번 나누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상착의를 설명하면 거의 대부분 ‘아, 그 사람 어디어디서 봤었는데 무엇무엇을 했었어’란 대답이 돌아왔다. 늘 비슷한 사람들이 걷다보니 한다리만 건너면 다들 아는 사람들이다. 역시 참 좁은 세상.  

잭과 한참 얘기하다 인사하고 멜리데의 알베르게에 들어갔는데 우리보다 앞서나갔던 네명의 소식은 깜깜무소식이다. 씻고 빨래하고 내 옆침대로 들어온 잭과 한참 수다를 떨고 나서야 이들은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신학생과 함께근처 성당에 미사를 드린 후 함께 만나 뿔뽀와 와인을 먹으러 갔다.  

기대했던 뿔뽀는 맛은 있었지만 그냥 문어숙회같은 느낌.       

저녁을 먹으며 내일만큼은 꼭 천천히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그렇게 될지는. 

매거진의 이전글 #50까미노데산티아고-같이 걸어줘서 고맙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