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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씨 Nov 25. 2016

#50까미노데산티아고-같이 걸어줘서 고맙습니다

-사모스-곤사르

전날 너무 피곤했는지 8시도 되기 전 잠이 들었다. 사모스에서 잔 기부제 알베르게는 큰 강당같은 곳에 낡은 침대가 놓인 곳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았던 이 알베르게의 사람들은 그 넓은 알베르게에서 술마시고 음악을 시끄럽게 틀어놓았다. 하지만 내게는 피로가 쌓여 가물가물한 기억의 마지막 순간에 들리던 빠른 비트의 댄스음악 정도. 그대로 깊이 잠들어 거의 12시간을 자고 일어났다.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던 듯 싶다. 비행기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 전날 사리야까지는 걸어갔어야 하는 J언니는 베네딕트 수도원 구경을 위해 12Km 못간 사모스에 머무르게 돼, 다음날엔 40Km 떨어진 곤사르까지 무조건 걸어야 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내일의 일정을 강조하는 걸 듣긴 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잠들었는데 그 사이 신학생이 무슨 약속을 한 건지 이날 곤사르까지 책임지고 J언니를 데려다 주겠다며 자꾸 나도 같이 가자고 권한다.  

나는 혼자 걷고 싶은 마음도 있고 이제는 좀 천천히 걷고 싶어 그냥 4시까지 걸은 뒤에 있는 마을에 들어가겠다고 하며 일단 사리야로 출발했다. 길이 험해 속도가 나지 않았고, 아침 일찍 사모스의 알베르게에서 제일 먼저 출발했는데도 엄청 오래 걸려 사리야에 도착했다. 그 과정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던 L언니가 뒤쳐졌다.  

이제 빨리 걸어야 하니 뒤쳐지는 사람은 지체없이 두고 간다. 이런 A같은 사람들 같으니라고. 


이틀전부터 우리는 레온주를 벗어나 우리의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있는 갈리시아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제 이 날만 걸으면 100Km안쪽으로 거리가 남게 된다.   

그동안 주를 넘어간다는 것에 별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갈리시아에 들어서서는 그동안 환경에 비해 뭔가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자면 그동안 넓은 산과 들에 방목되는 소를 보며 ‘아, 스페인의 소고기는 믿고 먹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어두컴컴하고 냄새나는 축사에서 공장식 사육을 당하는지 갇혀있는 소들을 보며 와르르 무너졌고, 지나가는 순례자에게 사교적이었던 스페인의 개와 고양이들이 갑자기 이를 드러내고 짖기 시작했으며, 길엔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물은 아침에 떠나기전 알베르게의 수도꼭지에서, 길가의 음용수 수도꼭지에서 떠 마시며 이십일 넘게 살아왔는데 이 지방부터는 생수를 사먹어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주가 바뀌어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틀전부터는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에 도착해도 슈퍼나 바와 같은 편의시설이 없는 곳이 많았다. 


함께 걷던 무리 중 누군가가 가이드북을 뒤져 말했다. 갈리시아 지방은 스페인에서도 소외된 곳이라고, 그래서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낮다는 정보를 줬다. (나중에 산티아고에서 벽에 ‘Galicia is not spain’이라고 쓰인 낙서를 보기도 했다) 

그런 길을 걷다 문득 릴리고스 강제소환 당하던 날이 번뜩 떠올랐다. 물 충전을 제대로 못해 20Km가 넘는 건조한 길을 불안에 떨며 목말라하며 꼬박 걸었던 그 날이. 레온에서부터 출발해 내가 릴리고스에 강제소환 당하던 걸 목격하지 못했던 신학생에게 그 얘기를 하며 이런 데서는 물 충전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하면 나중에 목 마른데 낭패 볼지도 모른다며.  


그 말이 씨가 되었을까. 그때부터 수도꼭지도 슈퍼도 바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내 500ml 물통 하나의 물을 네사람이 나눠 마시며 걸어야 했다.  

그러고보면 까미노의 경험은 내 여행습관을 제대로 교정해 놓았다. 이제 슈퍼 문 닫을 때를 대비해 항상 배낭엔 이틀정도의 식량을 짊어지고 다니고, 아침에 길을 떠나기 전 물은 제대로 충전해 두고, 우비도 휴지도 물통도 자주 쓰는 물품은 손만 뻗으면 잡히는 곳에 구비해두고 있다. 덕분에 슈퍼가 문닫아 억울하게 굶는 일도 없어졌고, 우비를 꺼내지 못해 쩔쩔매는 일도 없어졌다. 이제 어디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배낭여행객으로 성장하고 있는 걸까.  

장하다. 나님! 



그렇게 뿌듯해하며 열심히 걷고 있는데 이 날은 이상하게 속도가 나지 않았다. 700Km 가까운 거리를 걸으면서 우리에겐 대략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이정도쯤 걸으면 1Km, 얼마만큼 걸으면 몇 킬로미터 뒤의 다음 마을이 나오겠구나 하는 것들. 

그러나 분명히 체감상으로 12Km를 더 걸은 것 같은데 나온다던 마을은 나오지 않았다. 또 이날은 많이 가야 하는 날이기 때문에, 한번 들어가면 한참을 쉬게 되는 바 금지령을 내렸는데도 생각보다 빨리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약간 산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험한 길도 아니었는데 이상한 노릇이었다. 마치 누군가 땅을 늘려놔 한참을 더 걸어야 하는 것처럼. 

그런 길을 다들 이상해하며 걷고 있는데 저멀리 뭔가 심상치않아 보이는 표지판이 하나 나타났다. 멀리서 보기에도 울긋불긋 낙서가 잔뜩 되어있고 뭔가가 주변에 많이 버려져 있는 표지판.  

드디어, 까미노도 100Km로 접어들었다!

오늘은 쉬지않고 걷기로 했지만 이곳은 왠지 그냥 지나치면 안될 것 같아 한참을 앉아있었다. 100Km는 아직 먼 길이긴 하지만, 천천히 걸으면 4일, 빨리 걸으면 3일 안에도 끊을 수 있는 거리란 자신감도 들면서 이미 산티아고에 도착한 듯 싶은 축제분위기가 돼 버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실제로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보다 이 지점에서 더 기뻤던 듯 싶기도 하다. 


내가 나름대로의 700Km분량의 까미노 스토리를 가지고 있듯이 함께 걷는 사람들도 다 각자만큼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넷이서 표지판 앞에 앉아 서로 걸어온 일을 이야기했다. 

그런 얘기를 나누며, 흔한 감상이지만 이 길을 걸은 건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도와줬던 마을사람과 알베르게 호스피탈레로들, 처음 동행을 구하고 싶었을 때 나타났던 A와 J 그리고 잭, 길거리에서 만나면 ‘부엔 까미노’하며 인사해줬던 사람들,  클랙션을 울리며 손을 흔들어주던 운전자들, 다리가 아플 때 약을 발라주고 걱정해주던 낯모르는 사람들, 길을 물으면 팔을 끌어 제자리에 데려다주던 사람들, 비오는 날 사과와 토마토를 나눠줬던 할아버지, 등에 쥐났을 때 배낭을 대신 메줬던 신학생, 지금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과 한국에서 SNS로 문자로 소식을 나눴던 친구들, 적당한 간격이면 나타났던 마을과 비바람을 피해 잘 수 있던 알베르게, 고양이와 길과 커피와 음식과 노래와 웃음같은 것들.

살아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상관없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나와 함께 했기 때문에 이렇게 걸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까미노와 마찬가지였다. 사소하거나 중요하거나, 기억에 남거나 기억에 남지않는 내 주변에 모든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살지는 않았지만 성실하게 살았고, 적당히 게으르게 살았지만 나태하거나 내 인생을 버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 그런 모두들에게 함께 걸어줘서 고맙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더 걷다 92Km지점쯤 갔을 때 길 가의 십자가에 사람들이 기념품들을 걸어둔 곳이 있었다.  

자신이 신고 온 신발을 벗어두기도 하고, 자기 물품, 비행기표 등 여러 가지를 남겨둔 곳이었다.  

비행기 수화물 태그, 티셔츠, 사진, 신발과 같은 것들을 들여다보다 수첩 속에 간직해 다니던 동해항-블라디보스톡의 배표를 꺼냈다. 

내 까미노는 이 배표에서부터였다. 표를 한참을 들여다보다 뭔가를 적어 십자가 밑에 두었다.  

함께 걸어줘서, 같이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뭐, 물론 이렇게 마치 막 산티아고에 도착한 것처럼 신났지만 다음 마을은 쉽게 나타나진 않았다. 

그리고 6시 넘어 겨우 포르토마린에 도착했는데 분명 전날 같은 알베르게서 묵었던 우리보다 늦게 출발했던, 걸으면서 앞지르는 걸 보지도 못했던, 외국인들이 샤워를 끝내고 여유롭게 놀고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갑자기 불타올라 7Km더 떨어진 곤사르까지 따라가는 바람에 100Km의 날은 마치 끝나지 않겠다는듯 지치고 길었다. 


그렇지만 까미노에서 처음으로 걸어보는 밤하늘은 맑았고, 구름한 점 없어 별이 무수히 많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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