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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씨 Nov 23. 2016

#49까미노데산티아고-사소한 다툼같은 것

-오스피탈 데 라 콘데사-사모스

부대찌개를 찾아왔던 부엌있는 알베르게는, 전날 밥 지을 때부터 느꼈지만 상상 이상으로 열악했다. 겉으로 보기엔 예쁘고 깔끔한, 현대식으로 지어진 공립 알베르겐데 말이다. 우리 모두가 이 알베르게는 전시행정으로 만든 것이 분명하다고 입을 모을 정도였다.  

쿡탑의 온도를 중이상 올리면 알베르게 전체의 두꺼비집이 내려오는 것은 한 예였다. 건물 전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전력 기준이 터무니없이 낮은 건지 라디에이터조차 자기 몸체를 미지근하게 만드는 정도 외엔 더 이상 열을 내뿜지 않았다. 난방이 안되는 것 치고 침대와 침대의 간격은 또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 옆사람의 온기를 받을 수도 없었다. 산속에 자리잡은 이 알베르게엔, 창문과 지붕을 치는 바람소리가 그대로 전해 들어왔다. 생각보다 더 걷고 저녁식사도 늦고 해서 12시가 넘어 녹초가 된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추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새벽 5시까지 추워서 깼다 잠들었다를 반복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미리 배낭이라도 챙겨두겠다며 나와 부엌에서 짐을 쌌다.  

부엌에서 짐을 싸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에 미쳤다. 이 날도 아침을 먹어야 할텐데, 전날을 돌이켜보면 물을 끓이는데 몇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짐을 챙기다 다시 쿡탑으로 가 6시경 냄비에 물을 올렸다.   

그리고 그 물은 7시가 다 되도록 끓지 않았다.  



전날까지 함께 걸었던 신학생은 저녁을 먹으며 말했었다. 함께 걷는 것이 즐겁기는 하지만 자신은 순례의 목적으로 이 길을 왔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혼자 걸으며 기도와 생각을 해야할 것 같다고. 모두가 아쉬워하긴 했지만 이해는 했다.  

내가 끊임없이 누군가와 함께 걷고싶어 하는 것처럼, 신학생은 혼자 걷는 것을 원했다. 각자의 목적이 있는 것처럼, 신학생의 목적은 순례고 우리의 욕심으로 그의 목적을 방해해선 안 됐다. 그렇기 때문에 이날 아침식사는 신학생과 하는 마지막 식사이기도 했다.  

물을 끓이는데 하나 둘씩 일어나 부엌으로 내려왔다. 다들 추워서 잠을 제대로 못자 상태가 안 좋았다. 그 중 A의 상태는 심각했다. 전날 저녁 라디에이터를 껴안고 있을 때보다 얼굴이 더 나빠졌다. 딱 봐도 ‘아, 쟤가 심하게 아프구나’하는 얼굴상태에 아침을 먹는 도중 화장실을 몇 번이고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같이 앉은 사람들이 몇 번이나 괜찮냐고 물었지만 하나도 안 괜찮은 얼굴로 계속 괜찮다고 대답하며 억지로 밥을 먹고 다함께 길을 나섰다.  


산을 넘어 가는 길, 신학생은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예고했던 대로 쑥쑥 앞질러 나갔다.  

L언니와 J언니는 함께 걷고, 나는 A와 걸었다. 평소 같으면 이 언니들을 앞질러 나갔을 A가 속도를 못냈다. 한걸음 한걸음 걷는게 정말 힘들어 보였다. 마음 같아선 이곳에서 하루 더 쉬라고 하고 싶었지만 어젯밤 알베르게 안에서 느꼈던 추위를 생각하면 쉽사리 이 알베르게에서 쉬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찌됐든 다음 마을까지는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A가 심상치않아 보였는지 앞서가던 언니들이 계속 돌아보며 괜찮냐고 물었다. 입으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안 괜찮은 것이 분명한 이 아이는 계속 되는 질문에 짜증이 났는지 아픈 얼굴에 귀찮음과 짜증을 더 추가했다. 그런 A를 보며 내가 말했다. 

다음 마을에서 하루 더 쉬고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짜증스런 얼굴로 본인은 더 갈 수 있단다.  

몸이 아프면 쉬는 게 낫지 않느냐고 물었다.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차피 시간도 많고 몸도 아픈데 쟤는 왜 고집을 부리지?라는 의문이 든 순간, 어라, 저거 어디서 많이 봤던 광경인데 싶었다. 다리가 아프다는 내게 A가 끊임없이 남아서 하루 더 쉴 것을 권하고, 나는 죽어도 가겠다며 고집을 부리던 순간이 딱 저랬을까?  

그 순간 궁금해졌다. 나도, A도, 아픈데도 계속 걷고있는 수많은 순례자들도 왜 저렇게 계속 걷겠다고 하고 있는 걸까.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쉬어야 하는 상황인데 말이다.  

A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무리해서 걸으려고 하는 거야? 어차피 넌 시간도 충분하잖아? 

이번 질문은 A의 몸상태를 걱정해서 한 질문이라기 보다는 순수하게 궁금해서 한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아침부터 괜찮냐, 쉬어라를 메들리로 들어온 A에게는 한계에 가까운 질문이었던가 보다. 

결국 폭발해버렸다.  

자기한테 신경쓰지 말고 가버리라며, 너 꼭 내 할머니 같다고. 정말 힘든 얼굴로 애써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국말을 골라내 화를 내는데 확신이 들었다. 이 자식 아마 영어로 화를 냈더라면 분명 더 심한 말을 했을 거다.   

그 순간 나도 기분이 상했다. 물론 듣기 좋은 꽃노래도 세 번이면 족하니 귀찮긴 했겠지만 다들 자기 몸 생각해서 그렇게 걱정해주는 건데 말이다. 결국 나 역시 폭발해버렸다.  

알았다고, 앞으로 너한테 아무 말도 안하겠다고, 그리고 니가 아직 니 상황을 자세히 모르나본데 너 지금 걷고 있는게 굉장히 힘들어 보인다며, 신경 안쓸테니 잘 가라며 앞질러나가 L언니와 J언니에 합류했다.  

조금 더 걷다보니 뒤따라오던 A는 보이지 않았다.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언제나 그랬듯 내가 폭발할 때는 몸이 피곤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성숙한 사람이 되지 못해서 언제나 내 컨디션에 따라 주변을 보고, 반응하는 것이 달라지곤 한다. 부정적인, 그러니까 예를 들어 피곤하다, 졸립다, 배고프다와 같은 상황에서는 같은 사건을 만나더라도 뾰족하게 대응하고 나중에 제정신이 돌아온 후에 후회하곤 했다. 특히 몸이 피곤할 때면 주변을 포용해줄 여유가 훨씬 부족해지곤 했다. 그래서 피곤해지면 이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스스로 내 감정을 단속해야 했는데, 늘 뒤늦게 후회하듯이 그런 자제력은 피곤함과 함께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다. 

추워서 잠을 제대로 못잔데다 화까지 내고 났더니 안그래도 피곤했던 몸은 더 피곤했고, 걸으면서도 눈이 감기기 직전이었다. 바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난 후 잠은 조금 깼지만 기분은 계속해서 우울했다. 카페인으로 잠깐 정신이 반짝해지자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아픈 애를 그렇게 버리면 안됐다는 죄책감이 스멀스멀 밀려들기 시작했다.  

L언니와 J언니는 처음 A를 만났을 때부터 얘가 까칠한데다 나를 버리고 가는 걸 몇 번 목격했던지라 오늘 A의 반응이 그리 놀랍지는 않다는 의견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처음엔 친절했던 A의 행적을 이야기해줬다. A와 처음 생장에서 만났던 일을, A와 J와 함께 걷던 까미노 초반의 일들을, J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밝았는지, 알베르게에 도착해 A가 틀어줬던 음악이 어땠는지, 함께 걸으며 얘기했던 일들이 얼마나 좋았는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일인데 까마득하게 먼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바로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나기도 했다.  그럴수록 A를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은 점점 더 심하게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찾으러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버렸다.  


그렇게 걷다 사모스에 도착할 때쯤엔 완전히 지쳐있었다. 그리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정말 혼자서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 스케줄 때문에 오늘은 더 걸어야 하는 J언니에게 이제 나는 오늘 여기까지만 걷겠다며 잘 걸어가라고 인사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저녁거리를 사려는 나와, 간식거리를 사려던 언니들이 슈퍼에 들렸다 나오는데 아침에 헤어졌던 신학생이 샤워를 마친 뽀송뽀송한 얼굴로 발랄하게 걸어오는 것을 봤다. 슈퍼에서 우리를 보자마자 이 동네에 베네딕트 수도원이 있는데 이 곳에서 4시가 되면 수도원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안내했다. 베네딕트 수도원은 폐쇄적인 곳이라 평소에 구경하기 힘든 곳이라고 했다. 

거기에 넘어가 버린 이 언니들, 결국 내일 조금 더 걷고 일단 오늘은 여기서 쉬기로 결정해버렸다. 들어가 짐을 풀고 나오려는데 전날 오세브레이로에서 헤어졌던 S씨가 들어오고 있다. 여기엔 베네딕트 수도원이 있는데요, 하며 S씨에게 말을 걸었고 우리는 모두 함께 수도원으로 향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 수도원의 역사와 장소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구경하고 함께 저녁을 먹고,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었다. 저녁을 먹으러 간 바에서는 마침 와이파이가 됐다. 와이파이에 연결하자마자 A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밤이 늦도록 답은 도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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