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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씨 Dec 21. 2016

#57까미노데산티아고-28일과 17시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바르셀로나

피스테라에 다녀온 날 밤이 되서야, 나는 결국 최저가 비행편 검색 어플을 열었다. 이제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도 마지막 밤, 비행기 예약을 더이상 미룰 수 없었다. 어플을 켠채로 다시 한 번 이 일정으로 가는 것이 맞는지를 고민했다. 한참을 폰을 손에 쥔 채로 멍하니 앉은 끝에 바르셀로나-카이로행 비행기 티켓과 카이로-이스탄불의 티켓을 결제했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이후 까닭모를 가벼운 우울감에 빠져 관광의욕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아직도 계속 다녀야할지 집에 돌아갈지는 확실치 않지만 8년 전부터 가고 싶던 이집트 정도는 가줘야할 것 같았다. 

그리고 사실, A와 J가 도착한 날, 난 그리스에 안 갈지도 모르겠다고 하자 왜 안 가느냐고 묻는 A에게  

‘그리스는 다음 번에도 갈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하자 피식 웃으며  

‘그럼 이집트도 다음에 갈 수 있어. 터키도 그렇고. 그냥 집에 가는 게 어때?’ 

라는데 살짝 빈정 상해 이집트 일정을 포기하기 싫은 오기가 살짝 생기기도 했달까. 일단은 바르셀로나에 가면, 이집트에 가고, 이스탄불에 가서 돌아다니다보면 여행의 의지가 다시 솟구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산티아고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방법엔 저가항공, 기차, 버스가 있었다. 미리 예매를 하면 싼 저가항공의 특성상 까미노만 걷는 사람들 중엔 산티아고-바르셀로나 혹은 산티아고-마드리드의 표를 끊어놓고 걷는 경우도 있었다. 아마도 산티아고에서 대도시까지 이동하는 가장 싸고 빠른 방법일 이것의 단점은 사람들은 자기의 몸 상태가 어떨지, 얼마만큼의 속도로 걸을지 예상할 수 없다는데 있었다. 걷다보면 어느 순간 무리해서 빨리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유를 살펴보면 대부분 산티아고에서의 비행기 스케줄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중반부에 접어들면 힘들고 괴로운데 거기에 내 페이스보다 더 빨리 걸어야 한다니, 그때부터 까미노는 더 괴로워지곤 했다. 

이와 반대로 너무 일찍 걸어 산티아고에서 한참을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성취감에 하루 이틀은 신나지만, 한적하고, 평화롭고, 걷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 심심하고 지루하고 할 일 없음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런게 싫어 아무런 예약도 하지 않고 왔던 내게는 이미 예약이 끝나 기차나 버스보다 비싼 비행기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기차와 버스는 각각 13시간과 17시간. 가격대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지만 기차는 새벽같이 출발해 저녁의 바르셀로나에 닿고, 버스는 오후에 출발해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늦게 도착해 낯모르는 도시의 저녁에서 숙소를 찾으러 가고싶지 않았던 나는 버스를 택했다.  



꼭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내가 스페인의 기차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은 아주 드물게 있었다. 사아군에 도착해 장 보러 갈 때 내 앞에 있던 기차 건널목과, 다음날 길을 잘못 들어 릴리고스에 강제소환당하던 날 28Km동안 마을하나 없이 펼쳐진 평원 저 멀리 끝없이 이어지던 기찻길.  

낮에 기차를 타면 분명히 그 길을 되짚어 갈텐데 그 길을 다시 보고싶지 않았다. 그리고 밤에 버스를 타면 하루치의 숙소비도 절약이 되니. 

아침에 사람들과 헤어져 까르푸에 들러 17시간 버스여행을 대비한 식량을 샀다. 먹을 것을 사던 중 에스트레야 갈리시아 500ml캔 행사하는 것을 보고 무겁지만 잔뜩 사서 가방에 챙겨넣었다. 싸기도 엄청 싸지만 갈리시아 지방을 벗어나면 이 맥주는 다시 안 팔테니 말이다.  

그리고 한국까지 가져가겠다던 이 맥주는 이후 바르셀로나에서 한캔, 카이로에서 한캔, 이스탄불에서 한캔 하는 식으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한 후 버스를 타러 터미널에 도착했다.  

한참을 기다려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려는데 차창에 붙은 경유지들이 정말 낯익다.   

산티아고-라 코루냐-루고-부르고스-로그로뇨-사라고사-바르셀로나

이중 로그로뇨까지의 여정이 다들 내가 걸어서 지나쳤던 곳이었다. 내가 걸어갔던 길을 기차로 지나치기 싫다며 버스를 골랐는데 이것 역시 까미노와 비슷하게 되짚어가는구나.  

내가 걸었던 28일은 차로 17시간도 안되는 길이었구나. 뭔가 억울하다고 해야할까, 놀랍다고 해야할까,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순례자들이 걷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는 산길이나 들길을 주로 걷고, 버스는 주도로로 달리기 때문에 익숙한 산과 도시를 보기는 하지만 정확히 걸었던 길을 그대로는 보지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날이 곧 어두워지며, 장거리 버스만 타면 잠이 드는 나는 주변 경치를 볼 일이 별로 없다는 것. 이제 어찌할 방법이 없으니 그 정도쯤으로 넘어가야지. 



버스는 계속 달려 내가 거쳐갔던 도시를 들러, 내가 모르는 길로 들어가 손님을 태우고 다음 도시로 출발했다.  

까미노는 사람들이 별로 살고있지 않은 곳을 지나쳐가는지 걸으며 항상 도시를 지날 때마다 이 나라의 도시규모는 왜 이리 작고 한적한 걸까를 생각했었는데 주도로를 타고 중심가에 들르니 작게 봤던 도시들도 제법 크고 번화했다. 이런 것도 버스를 타고 다시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몰랐던 사실일 거다.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고 예상처럼 곧 잠든 후, 졸고 깨고를 반복하다 보니 시간도 공간도 흐릿해졌다. 날이 어두워지니 더 비슷했다. 그저 잠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일어나 주변을 보다 다시 잠들고, 가끔 서는 터미널에서 내려 화장실에 가고 주변을 걷다 다시 버스에 오르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가던 중, 역시 졸다가 눈을 떴는데 낯익은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폰페라다의 그 길이었다.  

알베르게에서 새벽같이 나가 걷기 시작하다, 이 골목에서 등에 쥐가 나 속수무책으로 앉아 하릴없이 빵을 뜯어먹으며 가로등이 아직 꺼지지 않은 거리를 바라보던 그 곳. 이런 몸으로 그 날을 완전히 걸어갈 수는 있는 건가, 나는 앞으로 계속 걸을 수 있을까, 부은 정강이와 아픈 등 때문에 아무 대안도 마련할 수 없어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던 그 곳.  

버스는 한참으로 느껴지는 찰나를 지나 길을 스쳐갔다.  

골목을 벗어나는 순간 고개를 빼고 그 길 깊숙이 내가 앉아있던 그 벤치를 눈으로 더듬었다. 그 곳에 14Kg짜리 배낭을 주체하지 못해 앉아있는 내가 보일 것 같았다. 

 

지긋지긋하게 걸었다고 생각했지만, 다음부터는 절대 걷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가로등이 켜진 폰페라다의 거리를 본 순간 언젠가 다시 이 길을 걷고 싶다, 생각했다. 


걷다보면,  

뒤늦게 출발해 아무도 없는 피레네 산길을 시냇물을 떠 마시며 걷고,  

얼굴로 들이치는 빗물로 세수할 만큼 억수로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고,  

마을에 하나 있는 알베르게가 문을 닫아 억지로 20Km를 더 걷고,  

정강이가 아파 절뚝거리면서도 동행을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그러다 몇 번쯤은 울고,  

또 새로운 사람과 함꼐 걷고,  

수많은 별을 보고,  

웃으며 세상의 끝에 찾아가는 지금의 나를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28일 같은 17시간을 거쳐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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