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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씨 Dec 30. 2016

#60스페인-람블라스 산책

-바르셀로나

전 날 하루종일 돌아다녀 넉다운 된 상태로 시체처럼 잠들었다 일어나 깨자마자 식당으로 내려갔다. 제공되는 조식에 혹해 선택한 호스텔답게 이 날 역시 훌륭했다. 숙소를 못 찾고 방황하다 결국 우리 숙소로 들어왔던 막내와 수다를 떨며 오래오래 식사를 하고 어디에 갈까를 얘기했다. 

이틀동안 열심히 돌아다닌 덕에 가고싶었던 곳은 웬만큼 다 갔다. 찾아보면 나를 솔깃하게 만드는 관광지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굳이 열심히 돌아다닐 필요없이 그냥 숙소근처를 산책하듯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래도 우리 숙소는 람블라스거리 초입이니 번화가를 돌아다니는 거다.    



바르셀로나에 온 첫날이었나. 무작정 돌아다니던 내 기억 속에 갑자기 예전 친구 블로그에서 봤던 젤라또집이 불현듯 떠올랐었다. 뇌 저편 기억 속에 파묻혔다 튀어나온 것이 겨우 젤라또집이라니. 아무튼, 그래서 첫 날에 이 젤라또집의 이름과 위치를 검색하고 람블라스 거리 어디께에 있다는 것도 알아냈는데  전 날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거였다. 

그러나 무의식 저편에서 젤라또집의 존재를 꺼내왔던 내 자아는 그리 만만히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와 파김치가 되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떠가며 다시 검색을 하고 보다 정확히 위치를 파악해냈다. 그 날은 람블라스 거리 너무 안쪽에 들어가 찾았었던 것이 실패원인이었다. 이 가게는 우리 숙소에서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리고 결국 찾아 사 먹었다.  

장하다.  

하지만 다음엔 좀 더 굉장한 일에 그런 집착을 보여주기 바랄 뿐이다. 예를 들면 전세계를 뒤흔들어 놓을 사상의 발견이라든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예술작품의 창작이라든지 하는.  

이 날은 천천히 걸어 바닷가까지 걸어갔다. 걸어가며 지도를 보니 그 근처에는 콜롬부스 기념탑과 몬주익 언덕과 올림픽 경기장이 있단다. 아, 여긴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그 바르셀로나지, 마라톤! 황영조! 하며 좀 더 친근한 느낌이 들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 올림픽은 벌써 이십여년 전. 심지어 막내는 그 올림픽은 이름만 들어봤단다. 나도 꽤 나이를 먹었구나.  

어쨌든 걸어 콜롬부스 기념탑 앞으로 갔다.  

러시아에서도 느꼈듯이 한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제일 잘 나가던 시절의 영광을 보존해두려는 열망을 갖고있는 것 같다. 기념탑을 세우고 박물관에 제일 화려했던 시절의 유물을 늘어놓고 말이다.  

단 한번도 세계를 제패해본 적 없는 나라에서 살아와선지 그런 그들의 열망이 그렇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물론 대단한 발견이긴 했지만 그저 스페인의 돈을 지원받은 다른 나라 젊은이가 죄수들을 속여 뱃길을 떠난 것이 천사의 가호를 받는 모습으로 미화되어 꼭대기가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높이 탑을 세워놓은 모습에 어쩐지 삐딱한 마음이 들었달까. 그러니까 성공했으니까 결국엔 이렇게 대접해주는 거 아냐? 뭐 이런.



나도 막내도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걷는 길이어서 자꾸 딴 길로 샜다. 어차피 목적지가 없는 걸음이었으니 이걸 딴 길로 샜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싶긴 하지만. 

근처에 몬주익언덕이 있으니 가볼까?하며 방향을 틀었던 둘은 지도상의 위치와 일치하는 시야 범위에 경사로가 있는 것을 보고 (물론, 당연히, 언덕이니 경사로일 수 밖에) 저런 곳을 걸어올라갈 수 없다며 빛의 속도로 포기하고 근처 바닷가에서 크레페도 먹고,  

좌판도 구경하고,  갈매기에게 빵을 던져주는 사람들을 피하며  

저 멀리 보이는 쇼핑센터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러는 과정에서 오분에 한번 쯤은 벤치에 앉았던 것 같고, 한번 앉으면 햇살이 따가워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앉아 있었다.   

하릴없이 멍하니 그렇게. 날씨가 좋아 그런 식으로 도시 곳곳을 헤집고 다니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마음에 드는 도시를 마음속에 새겨두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에 있었지, 이곳에서 이곳의 구조물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지, 그런 사소하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일을 만드는 것. 



특별히 뭔가 한 기분은 아니었는데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 이번 저녁은 내가 스페인에서 먹는 마지막 저녁이었다.   

빠에야가 먹고 싶다는 막내를 따라 빠에야와 타파스가 포함된 메뉴 델 디아를 먹고 바르셀로나 대성당으로 향했다.  

11월 말이 된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전날 본 까딸루냐광장 앞 백화점도 크리스마스 조명을 켜기 시작했고 대성당 앞에도 크리스마스마켓이 들어서 각종 트리용품과 미니어쳐 말구유의 재료를 팔고 있다. 전날 들어갔던 성당의 미사에서 신학생이 이제는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촛불을 켜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한주에 하나씩 제단에 초를 켜서 크리스마스가 다 되었을 때 모든 초에 불을 밝힌다고.  

크리스마스마켓의 모든 것들은 예쁘고 깜찍하고 반짝반짝 빛났다.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의 느낌이 그렇듯이 말이다. 분위기에 휩쓸려 트리도, 오너먼트도 구유의 재료들도 사고 싶었으나 이걸 산다면 분명히 집에 가기 전에 조각조각 분리되어 배낭 속을 떠돌고 있을 듯 싶었다. 그저 구경에 만족했다.  

이제 다음날이면 이슬람 문화권으로 이동하니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이 날, 이 저녁으로 끝날 듯 싶었다.  

다음에 유럽이나 미국쪽으로 여행을 간다면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늘 준비를 시작하는 모습만 보다 돌아오지 않고 제대로 크리스마스까지 보고 돌아오도록 말이다. (나는 주로 비수기에 여행을 다녀 유럽에 처음 왔던 때도 10월 11월만 보고 돌아갔었더랬다)     

그렇게 마지막 밤을 보내고 따뜻하고 좋은 날씨, 멋진 건축물, 산책의 좋은 기억을 바르셀로나에 남겨둔 채 공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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