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나는 가짜 나를 이기려고 애를 쓰고 있을까?
진짜 '나'와 가짜 '나'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나'는 뭘까하고 화두를 던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여기에 대해서 무엇으로 이야기를 했을까요? 정말 내가 나를 속인다고 썼을까요?
융이 말한 성격 구분의 방식을 우리는 많이 채택합니다. 페르소나라는 말은 겉으로 드러나는 나의 성격적인 측면입니다. 그리고 나의 내면에는 아니마/아니무스가 있다고도 하죠. 그런 이분법적인 구분을 그대로 가져와서 슬프지만 늘 웃는다는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도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리고 늘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니까 사회에서 억압받는 진정한 나 자신을 어떻게 풀어주어야 하는지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들이 원하는 나'와 '내가 원하는 나'를 구분 지으려는 태도도 등장하죠. 정말 그렇게 나누는 게 옳을까요? 아니. 그런 대중적인 인식을 떠나서 프로이트도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진짜 나'와 '가짜 나'는 정말 싸울까요? 우리의 발달단계는 '내가 원하는 나'에게 제약을 부과하는 걸까요?
어떤 사람들은 때론 '진정한 나'와 '가짜 나'를 구분하고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을 꾸며내기도 하고요. 진정한 나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거짓된 나 자신을 버리는 연습을 하는 아주 추상적인 움직임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존감을 들먹입니다. 진짜 나를 지키고 있다면 자존감이 높고 타인에게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요. 그렇게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걸까요? 그런 내용에 대한 정신분석의 입장은 어떨까요?
정신분석에서 이런 논의가 나오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나르시시즘 서론]의 오역 때문인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한글판에도 번역이 되어 있지만 '자기기만'이라는 번역어가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번역어입니다. 그런데 이 번역어가 원래는 전혀 다른 의미였습니다. 원래의 번역어는 '자기 지각'이라는 말로 사용합니다. 단순한 실수로 넘어갈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기만이라는 용어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 지각과는 그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자기기만은 자기 문제의 인정하고 말고의 차원에서 검토되는 것이지만 자기 지각은 주체의 지각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환각과 같은 것이죠. 무엇인가를 인정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의 문제입니다. 이는 프로이트의 맥락을 잘 모르고 번역을 했다고 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서론]은 정신분석에 [나르시시즘]이란 정신 장치를 도입하면서 신경증과 정신병을 이론적으로 구분하려 시도한 내용입니다만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기는 셀카 찍고 자기 관리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맙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정신분석적인 의미에서는 완전히 엉뚱해집니다.
나르시시즘은 나르키소스 신화에서 차용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 [나르시시즘 서론]에서도 나르키소스를 인용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들뢰즈 같은 학자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디디에 앙지외의 비판을 인용합니다. 왜 나르키소스 신화를 인용하지 않았냐고요. 이유는 간단하죠. 거기서 안 가져왔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 연구하는 사람들조차 나르시시즘을 대부분 나르키소스 신화에서 가져옵니다. 프로이트를 안 보고 연구한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요. 슈레버의 편집증과 같은 어려운 사례에도 접근해서 연구하려면 나르시시즘 개념들이 필요합니다.
나르시시즘 개념이 없어도 전이 신경증의 분석은 가능합니다. 치료는 진행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런 오역들이 난무해도 어느 정도 수용이 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뇌'를 희생양으로 삼으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을 테니 말이죠.
사실 진짜 나, 가짜나 이런 구분은 권리 실천의 차원에서 탐구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나의 권리를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가 중요하거든요. 나의 권리를 실천한다면 책임도 내가 질 수 있는데 실천하지 못하면 책임을 질 수가 없죠. 자기 권리를 실천할 수 있는 경우와 실천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옳겠죠. 흔히 이야기되는 자존감은 그렇게 이야기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단순히 체면의 문제로 자존감을 검토한다면 그동안 숱하게 강조되어 왔던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는 모래성과 같을 것입니다.
저는 진짜, 가짜를 나누는 것을 일종의 신비주의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정신분석적인 태도와는 별개입니다. 예를 든다면 흔히 말하는 다중인격 역시도 정신분석에서는 인격이 분열되어서 그렇게 등장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나타나는 환영에 따라서 자아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으로 검토하죠. 자아의 기능성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도 포함하는 것이고요.
흔히 이야기하는 '진짜 가짜 나'는 강박증에서 인격변화 요소로 보는 것이 더 옳습니다. 프로이트는 그런 부분을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소설을 통해서 묘사합니다. [쥐 인간]을 분석하면서 강박증 모델로 인용합니다. 그것을 과거에는 무의식 자아와 자아의 대립으로 보았었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무의식 자아라고 쓴 것은 프로이트의 실수 측면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다룰 때, 부모님의 문제를 많이 꺼냅니다. 엄마가 나를 제대로 돌봐주지 않았다. 부모님이 나에게 무관심했다. 그래서 자아가 자라도 아직 어린 거나 마찬가지다. 자아는 그렇게 허약하다. 이런 감성적인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아는 방어기제로 자신을 둘러싸고 까칠하게 세상을 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신분석가가 이 사람의 자아를 상처 받지 않게 도와주는 일을 할까요? 처음에는 조금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상처 받지 않게 해주는 건 아닙니다. 정신분석가는 악마와도 같이 속을 긁어놓을 때도 있습니다.
너 능력 있는데 하기 귀찮지?
그의 행동의 의미를 같이 탐구하고 들어가면서 인지하고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방어할 수 있게 돕는 것이 분석가의 일입니다. 그것은 옛 상처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방식에서 탈피"하는 것입니다. 상담 환경이 포용적이라고 해서 무의식이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병은 공감과 위로를 좋아합니다. 자아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은 공감과 위로를 먹고도 자랍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냉정합니다. 병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과감하게 메스를 댑니다.
게다가 정신분석은 신비주의로 받아들이고 있던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설명하는데 집중합니다. 예를 들어서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신비현상으로 생각되는 신경증 증상이 정신분석가의 시각에서 살펴보면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죠.
'진정한 나'라는 말의 신비주의화는 그대로 신경증을 형성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정신분석은 선택의 기회를 줍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면 그렇게 살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다면 현실로 한걸음 나와야만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