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두 가지의 차이를 만들까?
대중에게 알려진 각종 공포증이 있죠. 이 공포를 불안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기 상태를 과장해서 표현하려 할 때, 강렬한 단어를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공포는 명확한 대상이 있을 때 발생합니다. 막연하게 확인되지 않은 우주나 심해, 신, 미래 등은 공포의 대상으로 채택되지는 않습니다. 불안을 일으키는 요소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공포에 질린 인간은 고양이 앞의 '쥐'가 됩니다. 이것은 폭력에 당하는 개인역시도 마찬가집니다. 폭력에 시달리고 있으니 공포에 시달립니다.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죠. 그래서 일방적으로 피해만 받습니다. 온몸이 굳어버립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해도 인간의 반응은 마찬가집니다. 여담으로 어떤 사람들은 소설을 쓰면서 폭력을 당하다가 죽음의 위기가 닥치면 죽을힘으로 저항을 하게 된다는 시나리오를 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내용을 본 학교 폭력 피해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학교 다닐 때, 안 맞아 봤네
불안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듭니다. 언어적 표현에서도 등장하죠. '안절부절' 혹은 '초조하다'라는 말입니다. 언제나 경계태세에 맞추어서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이 불안을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한 '신호'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신호 불안' 혹은 '예기불안', '기대 불안'이라는 말도 쓰죠. 어떤 일이 생길 것을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돌발행동도 일으킵니다.
프로이트는 의학 논문을 인용하면서 위험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불안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재빨리 그 장소에서 도망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신호 불안'이라는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불안이 너무 지나치면 공포처럼 변합니다. 그것을 두고 '리비도 합리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리비도가 스스로 처리되게 만들기 위해서 공포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죠. 이는 신경증에서도 종종 등장합니다.
이러한 리비도 합리화의 좋은 예시가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종종 '이성 공포증'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말도 잘하고 아주 친근하게 대하는데 실제로 대면하게 되면 사람이 굳어버립니다. 온몸이 뻣뻣해지기도 하고 또 말도 잘 안 나옵니다. 단답형으로만 이야기하게 되죠. 대상에게 투자할 리비도가 합리화되는 작업입니다. 그만큼 좋아한다는 의미도 숨어있습니다. 경험이 많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게 지독하게 변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포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좀 과도한 일반화라고 이야기해야 할까요? 제 친구 중 하나는 4살 때 동네 강아지를 귀여워하다가 머리통을 세게 물렸습니다. 머리에 피가 날 정도로요. 그런데 그 친구는 지금까지 개에 대해서 공포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아지 보면 또 좋아하죠. 아마 그런 사람들이 꽤 많을 겁니다. 개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높은 데서 떨어져서 고소 공포증이 생겼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높은 데서 뛰어내리는 놀이를 즐기기도 하죠? 그것도 웃으면서요.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고소공포증의 경우는 책임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높은 위치에 가게 하는 것을 막는 것이지요.
정신분석을 통해서 이러한 증상이 사라질까요? 앞뒤 전후 과정 다 맞춰서 의미를 파악하면 가능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게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주체가 공포스러워하고 싶지 않아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죠. 공포스러워하고 싶다면 정신분석은 막을 수 없습니다. 분석가가 치료해서 건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포란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무서움, 두려움, 경외감입니다. 첫 번째 무서움이란 '천적'에 대한 것입니다. 고양이 앞의 쥐가 느끼는 것이죠. 혹은 폭력에 맞설 수 없는 인간이 느끼는 것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두려움은 리비도 합리화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성 공포증처럼 너무 좋아해서 반대로 꼼짝하지 못하는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경외감이란 존경심의 하나입니다. 종교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때의 '경외가 존경하기 때문에 등장할 수 있는 의미로 쓰입니다. 예를 든다면 존경하는 스승에게 야단을 맞으면 제자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공포도 상황에 따라 단일한 감정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정도로 구분이 지어질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대해서 제 분석 경험 중 하나가 떠오르긴 합니다. 강박증에 시달리는 어떤 분이 저에게 분석을 요청했던 경험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유달리 쥐를 무서워했습니다. 쥐만 보면 꼼짝없이 얼어서 몸이 움직이지 않았었죠. 자기도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고요. 생각하면 쥐를 쫓아내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공포의 개념들을 설명해주었는데 그는 자신이 쥐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는 의견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은 언어 연상을 통해 그의 병과 직결이 되었죠.
상징이란 문명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돼지꿈을 꾸면 로또를 사라고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돼지가 오히려 반대로 흉몽의 의미를 지닌 지역도 있습니다. 그런 상징성의 지역 차이라는 것이 있고 융이 그 부분을 캐치해서 연구를 진행했었습니다. 그런데 강박증에선 유달리 쥐가 그 상징으로 채택이 됩니다. 프로이트의 강박증 분석의 총집 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논문의 제목이 '쥐 인간'임은 이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 같네요.
사람들이 많이 경험하는 공포증 중의 하나는 무대공포 혹은 사회 공포입니다. 만약에 나가서 발표를 한다거나 할 때, 이러한 공포가 등장한다면 큰일입니다. 영화 [코요테 어글리]에 등장하는 바이올렛이 무대 공포증에 시달려서 작곡가가 되고 싶어 하죠? 그런데 이렇게 등장하는 것을 막연하게 공포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시선에 의한 반응'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합니다. 관찰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지요.
타인의 시선에 따르는 비판에 대한 두려움이 숨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경증의 형성체가 만들어지면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이런 말은 있지요. 어릴 때 부모님의 칭찬을 받고 자란 아이는 무대 공포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라고요. 그런데 아닌 경우가 훨씬 많을 겁니다. 이것은 정신 장치를 고려하지 않은 조잡함이 묻어 있는 해석이기도 합니다.
공포 중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포가 있습니다. 우리는 천적 앞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밀폐된 공간에서 맹수와 단둘이 있다고 해봅시다. 공포를 안 느낄 수 있을까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꼼짝없이 얼어붙을 것입니다.
신경증의 결과로 나타나는 공포 반응들은 타인과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통해서 괜찮아질 수 있습니다. 가끔 이런 경우에 인지 치료에서 이야기하는 홍수 법을 활용한다고 억지로 사람 많은 곳에 나갔다가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땐, 혼자서 가는 것보다 자신이 믿고 신뢰하는 동료와 함께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경외감은 벗어날 이유가 없죠. 내가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 당연히 가지게 될 감정일 겁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 앞에서 경외감을 가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죠. 그걸 무시할 수는 없는 겁니다.
정신분석에서 이렇게 등장하는 공포를 이드와 초자아 간의 갈등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프로이트의 방식과는 거리가 좀 멉니다. 에릭 번이 사람이 개발한 에고그램식의 해석입니다. 이것은 아류 정신분석의 하나입니다. 임상에 이런 해석을 적용한다면 신비주의 적인 경향을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만큼 쉽고 재미가 있겠지만 실용성은 떨어지죠.
공포증에 시달리는 분석 주체가 있을 때, 분석가의 역할은 '악마'와도 같습니다. 왜 무서워하고 싶은지 집요하게 물어봅니다. 그래서 분석 주체는 말하기도 싫어집니다. 불쾌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어떤 경우는 저항의 방식을 동원합니다. 아무 말 없이 그만둬버리는 거죠. 치료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 과정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에서 어떤 역동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물리학적인 용어를 통해서 설명할 수도 있죠(그래서 정신분석에 정신 물리학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그 분석의 결과로 등장한 것을 현실에서 어떻게 조율하느냐가 관건입니다.
무서운 것을 안 보고 살아가도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변화하고 그런 것들을 영원히 차단하고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죠. 그때그때 도망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만큼의 에너지를 낭비해야 하거든요. 때론 맞서는 것도 필요합니다.
편해지는 길은 있습니다. 피해 다니면 불안감만 조금 느끼고 말겠지만 그것도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죠. 그래서 분석가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물어봅니다. 무서워하면서 살 것인지 아니면 맞설 것인지요. 선택은 분석 주체의 몫이지 분석가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치료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치료의지는 약 잘 먹으라거나 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억지로 바꾸라는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