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불안

프로이트는 탄생 불안에 찬성했을까?

by 박진우

옛날 유럽에는 산파 시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를 받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시험관들이 그런 질문을 합니다. 시험관들은 시험 보는 나이 든 여성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우는 이유가 뭐냐고요. 그러자 그 산파는 이런 대답을 합니다.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당시의 시험관들은 그 답변을 그냥 웃고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그 이야기를 듣고 산파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프로이트 초기 이론일 때 한 이야깁니다. 나중에는 이런 이야기에는 그렇게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프로이트가 '탄생 불안'을 주장했다고 이야기하는 서적이 있습니다. 전문가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죠. 멜라니 클라인과 같은 학자들도 이 방향성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책을 본 사람들은 정신분석에서 '탄생 불안'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이미 불안의 구체적인 모델을 개발을 했는데, 탄생 불안이 그 모델에 합쳐질 수 있었을까요?


탄생의 과정에서 아기가 경험하는 내용이 불안의 신체 반응과 같은 것이라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긴 합니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주장한 프로이트의 제자도 있었죠. 그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프로이트의 논문 중에서 [저지, 불안 그리고 증상]이라는 게 있습니다. 한국어판에서는 [억압, 불안 그리고 증상]으로 번역이 되어 있고요. 억압으로 쓴 번역어는 원래의 의미를 따지면 억제가 맞습니다. 그런데 방어기제인 '억제'와는 구분하기 위해서 저지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꽤 많은 분량의 이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탄생 불안의 개념을 이야기한 오토 랑크를 비판합니다. 즉, 정신분석 체계에서는 탄생 불안이라는 개념 자체가 쓰일일이 없다는 거죠. 그 역사적 맥락을 좀 살펴봐야겠네요.


오토 랑크는 프로이트가 좋아했던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최초의 비의사 분석가이기도 했고요. 이 사람이 이름이 좀 알려지고 나서 미국에 강연을 갔습니다. 거기서 단기 분석 치료와 탄생 불안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이 프로이트의 생각이라고 떠들어 댄 겁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프로이트는 격노했죠.

탄생 불안은 정신분석이 이야기하는 발달단계와 불안의 유형을 축소해버리는 작용을 했습니다. 즉, 정신분석 체계 내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죠. 인간은 최초에 자아를 가진 상태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언어를 배우면서 자아가 형성이 된다는 것인데, 탄생 불안은 그것을 무시하는 개념인 겁니다.


게다가 단기치료 역시 그렇습니다. 프로이트 입장에서는 구조를 관찰하면서 그것을 바꿔가는 것을 두고 치료라고 생각했습니다. 단기 치료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이죠.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따로 [컨디셔닝]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생활 정상화 프로그램이라는 타이틀을 붙였습니다. 효과는 어땠을까요? 치료효과라고 부를 만한 현상들은 나타났었습니다. 분석이 아님에도 굉장히 유익한 효과들이 등장한 것이죠. 그것은 그 주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즉, 분석이 아니라도 랑크가 이야기하는 '단기치료'의 긍정적 효과는 등장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 랑크는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당시의 미국인들에게는 충격이었죠. 그런데 프로이트도 원래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프로이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점을 바로잡아주니까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 완전히 달라져버린 겁니다. 이 점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혼동하고 있는 팔루스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이 문제는 더 많이 곡해했습니다. 미국에 들어간 정신분석이 어느 정도 난도질당한 상태였었고 그 상태에서 페미니즘의 개입은 정신분석을 더 심각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팔루스 문제는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정신분석을 비판할 때, 성욕이 아니라 팔루스를 더 많이 비판합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이 가부장적이라 비판합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성기에 너무 많이 집착한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는 여성에게도 팔루스가 없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프로이트를 안 읽고 '남근'에만 집착해서 프로이트를 비판한 겁니다. [여성의 성욕]과 같은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이 기관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내용이 있지만 이 정도로만 이야기하죠. 랑크와 프로이트 이야기로 되돌아가 봅시다.


랑크는 프로이트와 편지로 싸웁니다. 당시 어니스트 존스가 회장이었던 정신분석 협회에서도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랑크는 굴하지 않았죠. 젊은 학자의 패기였을까요? 최종적으로는 프로이트에게 사과합니다. 그것도 자기 의지로 그랬다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프로이트의 건강이 너무 안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랑크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빠도 프로이트의 존재가 더 중요했을 겁니다. 이 사건은 나중에 프로이트와 다른 정신 분석가들로부터 랑크가 병리적 이득을 얻었다고 평가됩니다. 탄생 불안을 이야기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많이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회복지를 공부하신 분들이라면 오토 랑크의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사회복지 개론에서 <진단주의와 기능주의> 학파를 배울 때, 소개되는 인물이거든요. 정신분석 이론을 토대로 한 진단주의 학파에 반대해서 만들어진 기능주의 학파가 있습니다. 그 기능주의 학파의 대두에 오토 랑크의 이름이 등장하죠.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게, 진단주의라는 말 자체가 정신분석에서 성립이 안됩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을 하는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조금 그렇죠. 인간을 진단한다는 것이 규정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게다가 진단이란 방향성의 설정이지 낙인찍는 게 아닙니다.


1962년에 개봉한 존 휴스턴 감독의 영화 [프로이트 더 시크릿 패션]에서도 정신분석의 오독 문제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오역 문제도 그렇지만 미국에 들어가면서 사라진 프로이트의 맥락도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그 점은 고려한다면 영화는 재미있어도 프로이트에 대한 오해는 더 심각하게 만드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불안이 닥쳐오게 되면 안절부절못합니다. 혹은 목을 조르는 기분도 들죠. 뭔가가 닥쳐올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리는 겁니다. 그렇다고 폐소 공포증과 같은 것이 심한 불안감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안은 공포와 구분이 지어져야 합니다.


불안은 몸에도 영향을 줍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불안하게 되는 경우로 보는 것이 더 옳습니다. 그런 예시들도 있죠.


얼마 전, 어느 50대 부인이 자꾸 이유모를 불안감에 시달린다고 문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부인은 몇 년째 상담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상담을 받으면 괜찮다가 또 집에 혼자 있으면 불안해지는 겁니다. 원인은 찾지도 못하고 상담만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었죠.


다른 분과 상담하고 있으니 제가 섣불리 개입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 분과 상담하는 분도 이름이 있는 전문가였고 대학 시절 가르침을 받았던 분이라서 더 조심스러웠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조금 들어보고 저는 건강관리를 권했습니다. 신체가 약해져도 불안이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주변에서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볼 수가 있을 겁니다. 쇠약해진 몸이 현실의 변화를 견디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 부인도 큰 수술로 신체가 많이 쇠약해져 있는 상태였었습니다. 체력적인 보완이 필요했는데 그 점을 간과하고 생활을 해왔다고도 여겨졌었습니다. 젊은 분들 중에서는 그런 문제가 발생할 때, 이상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유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거나 혹은 성욕이 너무 넘친다고 이성을 찾아 헤매는 경우도 발생하죠. 이것은 과거의 생활보다 현실의 몸 상태가 문제가 됩니다. 따라서 정신적 원인을 찾아 헤매어도 좋아지질 않습니다. 신체에서 등장하는 내용을 심리로 처리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끝이 납니다.


불안에 기대감의 성격이 있다는 것은 이전에 잠시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기대 역시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의 신호도 불안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리비도로 변환되어서 성욕처럼 느껴지게도 만듭니다.

불안이 나쁜 것일까요? 불안은 분명히 우리에게 긍정적인 작용을 합니다. 우리의 삶이 신체를 쇠약하게 함으로 불안에 시달리게 만든다면 그것은 몸을 좀 움직이라는 메시지로도 기능합니다. 불안에 시달린다고 항불안제 먹으면 불안이 사라질까요? 불안이 성욕으로 변환된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게다가 항불안제를 복용하면서 성기능이 떨어져서 고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꽤 많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불안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종종 우리는 불안한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살펴야 할까요? 불안은 우리 삶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좀 더 건강하기 위해서 현실을 탐구하라는 의미죠. 신경증에서도 이 불안이 심합니다. 그런데 신경증에서는 현실 탐구가 제한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불안이 멈추지 않으니까 항불안제나 항우울제와 같은 약물을 좋은 것으로 인식하고자 합니다. 물론 그 결과는 별로 좋지 않겠지만요.




스트레스로 불안이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트레스란 근본적으로 외부에서 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의 원래 의미는 '혈관 압착'이라는 신경생리학 용어였습니다. 그것이 시대가 지나면서 지금처럼 신경 쓰이는 것으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1920년 하버드 대학의 생리학자 월터 캐넌은 스트레스를 연구합니다. 유기체가 급박한 상황에 대처할 때 신체 반응과 신경계의 활동을 조사한 것이죠. 그의 연구에 다른다면 스트레스의 형태는 다양해도 결국 '외부'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내적 자극과는 무관한 셈입니다. 스트레스로 불안증이 생겼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죠. 게다가 신경증의 특징을 생각한다면 스트레스를 오히려 월등히 '잘' 견디는 사람들이 신경증에 시달린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네요.


스트레스는 신경증을 '촉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원인은 되지 않습니다. 정신의학에서는 정신질환의 모델로 설정한 것 중에 '취약성-스트레스 모델'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신질환의 발병 원인을 외부에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프로이트의 견해와는 전혀 딴판이죠. 이때 약 먹으면 놀라울 정도로 거기에 신경을 안 쓰게 됩니다. 그래서 의식은 좀 편해집니다.


예를 들어서 매일 부부싸움을 하는 부부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래서 부부 중 한 사람이 정신과 의사를 만나고 약을 처방받아먹으면 싸움이 더 이상 일어나질 않습니다. 의사는 '약의 효과'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의 효과로 인해서 그만큼 관심도 많이 떨어집니다. 관심 없는 사람과 싸울 이유는 없을 테니까요.


불안하면 걱정이 많아집니다. 어떤 문제가 생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불안이 충동 활동과 결합하면서 '생각만'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걱정하고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그에 따르는 '불안 시나리오'를 만듭니다. 그 시나리오를 만들어두면 어떤 상황에서도 걱정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일은 일어나지 않고 시나리오만 주야장천 만들어대는 상황이 되는 거죠. 어떤 경우에는 미신을 끌어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점성술을 신경증적 시나리오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안에는 소망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부적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좋지 않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는 미래를 향한 소망이 숨겨져 있고 또 뭔가 잘 될 것을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험 합격 부적 같은 것이죠.

부적만 믿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당연할 겁니다. 부적이 있어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충분히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죠. 그것을 꼭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을 바란다면 해도 상관은 없을 테니까요.


불안이 심하다 못해 '건강염려증'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 불안 문제라기보다는 정신 장치에서 현실 관심을 철회하는 메커니즘을 관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저의 내담자 한 사람은 야한 상상을 할 때 복통을 겪었습니다. 건강한 여성이 남자 친구를 사랑하고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상상에만 집착하고 실천되지 않으면 신체 통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병든 사람의 나르시시즘'이 등장한 것이죠. 그 결과, 이유도 알 수 없는 복통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자기 욕망과 관계해서 현실에 관심을 투자하려 할 때 저항의 방식으로 채택되기도 합니다. 이는 때로는 견딜 수 없는 두통으로도 등장하죠. 분석만 하면 어디가 아프기 시작하는 겁니다. 조금 더 심각하게 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히스테리성 통증은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어서 분석을 그만두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건강염려증은 일시적일 때도 있지만 장기간 지속될 때는 정신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 염려에서 주 핵심은 자신이 '아프다'는 것에 있지 '병명'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건강염려증 환자는 MRI도 촬영해봅니다. 그런데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위암이라고 생각해서 내시경도 해봅니다. 그런데 위에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헬리코박터균이 있는 정도라서 항생제 처방받아옵니다. 그래도 오진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자기는 암이 있다고 굳건하게 믿습니다. 다른 병원 가서 또 MRI 촬영을 해봅니다. 마찬가지로 안 나오죠. 위, 대장 내시경 다 해봅니다. 실비보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상이 없다면 돈은 그대로 나가겠죠. 그래서 경제적 부담도 엄청납니다. 그 과정을 다 거쳐도 병이 발견이 되지 않으면 최종 결론이 또 이상해집니다.


아.... 내가 현대 의학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병에 걸렸구나...

이렇게 등장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울 수 있겠지만 조금 더 심각할 때, 망상의 존재를 의심해볼 수 있습니다. 나르시시즘 문제는 여기서도 관여합니다. 그래서 건강염려증은 정신병 발병과도 어느 정도 관련성을 지니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존감 문제나 혹은 벌 받고 싶은 충동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혼자서 머물기보다 삶에 더 충실한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의학적으로 발견되지 않는 병에 대한 걱정이 오히려 병도 키울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심리적 문제로 발병하는 신체 문제들은 존재합니다. 프로이트의 제자들은 그렇게 발병한 신체 문제에 '식물 증상'이란 명칭을 붙였습니다. 이 경우는 의학적 처치로 쉽게 낫지도 않습니다. 원인이 정신에 있는 히스테리증인데 신체적 처치를 한다고 해서 금방 좋아지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죠. 증상을 일으키는 토대가 정신일 때, 신체에만 치료가 들어간다면 그 치료 효율 자체는 낮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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