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고독과 외로움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고독이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입니다. 혼자 있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사람이 없어서 혼자 있을 때도 있고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혼자 있을 때도 있습니다. 고독할 수 있음은 괘 중요한 일입니다.
외로움은 '홀로 되어 쓸쓸한 느낌'입니다. 고독이든 외로움이든 다 쓸쓸하다고 쓰네요. 우리는 언제 고독하다고 쓰고 언제 외롭다고 써야 할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을 조금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흔히 각종 서적에서 이야기하길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이고 외로움은 혼자 있는 고통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서 납득이 좀 되지 않습니다만... 어떤 조건이 즐거움과 고통을 만들어낼까요? 고독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혹은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이다. 이렇게 막연하게 설명하는 것보다는 구체적인 법칙이 있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정신과학'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세계관이나 철학과는 전혀 다르게 물리학적 비유를 한다는 거죠. 즉, 리비도 투자-처리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검토할 수 있어야 정신분석적인 의미에서 고독과 외로움의 구분이 가능해집니다. 정신 역동 과정이 여기에서도 등장합니다. 리비도 처리 프로세스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외로움이 심해지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좀 심하면 들들 볶아대기도 하죠. 외로움 자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몸이 아프거나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조금 특이하죠? 이런 경우 느끼는 통증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골반 통증과 같은 방식으로 등장합니다. 혹은 잠깐 허리가 아프다는 느낌이 스쳐 지나갈 때가 있죠. 무거운 걸 들어도 괜찮은데 속이 텅 빈 백팩을 메면 허리가 아프기도 합니다.
과거에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들어보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예민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 겉으로 티는 안내도 신체적인 변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 히스테리를 불러일으키는 상황도 존재하죠. 그래서 히스테리에 시달리면 되게 예민해지면서 조그만 자극에도 신경질을 부리곤 합니다. 신경질 자체가 '히스테리'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히스테리 반응으로 인해서 예민해져 있으니까 신경질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독의 경우에는 본인의 에너지를 투자할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즉, 고독하다는 것이 혼자서도 자기 에너지를 투자하고 그것을 통해서 처리가 일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독한 것이 뭔가 연인을 추억하면서 폼 잡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고독 속에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작가들이나 학자들이 고독하게 연구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 서겠죠?
외로움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외로움을 견뎌내기 위해서 종교를 찾는 경웁니다. 물론 건강한 종교활동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종교가 사이비와 같은 경향이 있다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정신병동에 입원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외로움을 막연히 견딜 수도 없습니다.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사랑을 하는 겁니다. 혹은 내가 내 에너지를 투자할 수 있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죠. 물론 이때 결혼과 같은 법적 장치가 외로움을 해결해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결혼이 사랑의 증거로 기능한다고 볼 수 없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즉,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부적 '방식'이 제한적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본인 스스로가 대상을 향해서 에너지를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그렇지 못하면 결국 괴로움을 어느 정도 감당해야 한다는 이야기니까요. 그때 등장하는 메커니즘이 히스테리입니다. 단순히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것이 필요한 것으로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글을 쓰거나 음악을 하는 것도 외로움을 처리하는 나름의 방식이 되겠죠. 그렇게 외로움에 들어갈 에너지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증상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처리하는 방식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일하면서 극복해나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흔히 정신분석의 방어기제를 익히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승화'를 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분석이 무조건 승화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융 쪽으로 가면 승화를 좀 많이 고집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고 합니다. 이 승화의 문제는 자신의 에너지를 본격적으로 투자해서 그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에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환자분은 증상이 시작되려 하면 미술도구를 가지고 정신병원의 보호실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상태가 괜찮아질 때까지 열심히 그림을 그렸죠. 그리고 몇 가지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나면 좀 괜찮아집니다. 정식적인 그림은 아니지만 그 나름의 멋진 작품입니다. 증상으로 올라오는 에너지를 그림에 쏟아부어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렇게 편해지는 것 같지만 그분 입장에서는 지속적으로 고통에 시달려야만 하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고통스러워서 그림을 그렸거든요.
저는 그분의 그 순간이 고독을 다루는 순간으로 여겨졌습니다. 증상으로 인해서 밀려 올라오는 괴로움은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스스로 그것과 싸워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