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레스의 망령 - 2

안정화된다는 것

by 박진우

다인 씨는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어떤 생각, 소망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고 질문도 했다. 지적인 사람이니 만큼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상담을 한 것은 아니다. 스쳐 지나가는 일상에서 나누는 말이 전부였다.


약도 꾸준히 복용했고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물론 그렇게 생활이 된다는 것을 약효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신경증에 유효한 것은 약이 아니라 고정된 시간에 따르는 행동이다. 즉, 생활이 고정되는 병동 생활이 생활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정신병원에 자주 입퇴원 하는 사람들은 퇴원하면 생활이 엉망이 되고 입원하게 되면 생활이 정상화되는 그런 패턴을 경험하기도 한다.


내가 들은 바로는 반정신의학 운동 기관에서도 약물은 거의 쓰지 않지만 일하고 학습하는 시간을 고정적으로 진행한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을 고정하는 생활 자체가 회복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나의 분석 처방에서도 이러한 시간의 중요성은 강조한다. 이 것을 정신의학에서 강조하는 방식으로 바꾸면 '규칙적인 생활'이다.


어느 날, 다인 씨가 뜬금없이 말을 걸었다.


“집을 팔아서 제가 키운 아이들의 대학 등록금을 대어 주었어요. 나중에 프랑스 파리에 가서 노인복지나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주식으로 몇 억의 손해를 보았고... 오빠가 하던 사업도 기울어져 버렸어요. 친구였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아요. 한 가정의 부인이었죠. 그 사람이 힘들 면 저를 찾아와서 많이 울었어요... 저는 그 가정을 파탄 냈어요. 그래서 늘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요.”


다인씨는 싱글이었는데 가정을 파탄 냈다는 이야기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생략된 내용이 있을 것이다. 결혼에도 관심이 없었다. 다만 아주 멋진 여성이라면 섹스 상대로 괜찮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지나가면서 던졌다. 그래서 그런지 같은 병실을 쓰고 있는 혜연 씨와도 친하게 지냈다.

물론 혜연 씨는 다인 씨에게 내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다인 씨는 나와 혜연 씨를 두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혜연 씨는 그 말을 무척 좋아했었다.


그렇게 잘 지내고 있었지만 증상 자체는 조금씩 발달하고 있었던 것일까? 스쳐 지나가면서 나에게 다인 씨는 자신의 망상들을 이야기했다.


“모든 여자들이 나의 적이에요. 그래서 수의를 좋은 것으로 준비해 두었어요...”


갑자기 한 말이다. 의심을 가지고 하는 말도 아니었다. 동시에 사용하는 말도 갑자기 변했다.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행정사무>라는 말로 묘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에서 어떤 변화요소가 등장한 것일까? 환경적 변화는 없었다. 그렇다면 편집증의 안정화 작용과 관계될 것 같다. 다인 씨의 정신의학적 진단명은 조현병이었지만 지금부터는 나에게 편한 대로 편집증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프로이트도 조발성 치매라든지 정신분열이라는 용어에 크게 가치를 두진 않았다.


편집증에서는 과대망상이 핵심으로 작용한다. 그 망상을 통해서 초자아의 법 위에 올라가고자 한다. 우리 정신을 작동시키는 정신 장치에는 행정기관처럼 에너지, 즉 리비도를 분배한다. 그런데 초자아에게 공급되는 이상의 리비도가 자아에게 공급될 때, 자아는 초자아의 명령을 무시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인 씨의 그런 말은 정신작용에서 초자아가 무력해지고 있다는 말이 될 것 같았다. 그 시점에서 편집증에서 등장해야 하는 ‘박해자’ 문제를 고려해보아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주변 사람은 편집증자에게 등장하는 박해자의 존재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두려움을 호소해도 아무도 알아주질 않는다. 다만 나는 다인 씨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를 괴롭히던 5명이 모두 이 안에 있어요.:


”새로 입원한 환자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 없으니 안심하세요.:


“내 말을 인정하라! 그리고 그 5명은 여성들과 섹스를 하고 있어. 썅년... “


자신의 주장에 대해 처음으로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박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치료가 진행되면서 안정화 단계를 거치는 시기에 이런 반응들은 충분히 등장할 수 있다. 정신분석 과정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다인 씨에게 분석과 같은 것은 제공되지 않은 상태였고 어쩌면 스스로 자기 증상을 안정화시키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트러블도 없었다.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다인 씨가 외부와 연락을 할 수 있게 의사의 허락이 떨어졌다. 2주간 관찰한 뒤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자기 전화카드를 스스로 관리해도 문제없다고 판단해서 본인이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 취침시간 전까지는 전화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병원에 경찰이 왔다. 무슨 문제로 온 것인지 물어보았는데 병동에서 신고가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이다인이라는 분이 여기서 5명의 남자들에게 협박을 받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경찰 입장에서도 당황스러웠겠지만 신고받은 이상 출동해서 확인은 해보아야 했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 설명해드렸다. 그렇게 경찰의 출동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경찰의 방문은 다인 씨도 확인했다. 경찰이 자신의 신고를 들어준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날 이후, 보다 빠르게 안정화되는 것 같았다. 신고전화도 하는 일이 없었고 주변 사람들도 잘 돕고 지냈다. 그 덕에 다인 씨의 보호자는 통원치료를 결정했다. 마침 퇴원하는 날은 나의 휴일이었다. 그래서 다인 씨에게 미리 인사를 건넸다.


"건강하게 지내세요. 다시 현장으로 복귀도 하셔야죠"


강의를 하던 사람이니 만큼 다시 현장에 복귀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휴일을 보냈다. 당시는 휴일도 나름 바빴다. 수업도 들어야 했고 분석도 받아야 했다.

2일간의 휴무를 마치고 다시 출근을 했는데, 다인 씨가 여전히 병동에 있었다. 업무 인계를 받으면서 들은 이야기로 퇴원 직전에 망상을 드러냈다고 한다. 병 동안에 있는 주범 5명을 피하기 위해 병원을 나간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은 주치의는 퇴원을 취소했다.


"내가 빚을 청산했는데, 자꾸 손가락을 한두 마디씩 잘라가요... "


이런 내용의 말을 나에게 건네는 경우가 많아졌다. 신체 기관이 손상된다는 망상은 편집증에서는 드물지 않다. 뇌가 사라진다거나 자기 후두를 삼킨다거나 팔다리가 절단되는 등의 내용이다. 이것을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으로 바라본다면 자아 리비도 처리에 문제가 생겼다고 본다. 신경증과 정신병에서의 차이가 등장하는 것이다. 가끔 그런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생활에는 문제가 없었다. 늘 법문을 읽었고 때가 되면 득도할 것을 믿었다. 그렇게 늘 기도했다. 나는 그 모습이 마치 슈레버 같았다. 슈레버는 인류 구원을 위해 신의 여자가 되어 아이를 낳길 바랬다. 그 모습을 보면서 증상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슈레버의 경우 구원 망상은 증상의 최종단계에서 등장했다. 그것은 득도할 것을 믿는 다인 씨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다인 씨에겐 말할 수 없는 존재가 있었다. 편집증자들의 망상에서 듣게 되는 내용이다. 주로 이 말할 수 없는 존재는 박해자의 원래 모습이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그 말할 수 없는 존재의 자리를 채운다. 과거 내가 분석을 맡았던 편집증자도 분석 시간에 말할 수 없는 존재를 언급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아버지였고 망상에서 박해자로 가공되어 있었다.


얼마 후, 다인 씨는 퇴원했다.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었고 망상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입원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다인 씨의 모습을 생각하면 슈레버가 떠오른다. 슈레버는 나중에 법정에서 자신은 혼자서 자기 망상을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도 주지 않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조현병(편집증)을 다룬 영화 중에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라는 작품이 있다. 황정민, 전지현 씨가 주연이다. 그 영화에서 슈퍼맨은 정신질환자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망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망상이 형성이 되는 이유는 망상과 초자아가 손을 잡고 같은 내용을 공유하는 시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편집증의 진행은 처음에는 현실관계를 따지지만 나중에는 현실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처럼 다인 씨의 망상이 초자아와 손을 잡고 조용히 자신의 망상을 실천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걸까? 다인 씨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보면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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