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이물질의 관계
이 영화에서는 우리는 흥미로운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영화의 자체에 대해서는 두말할 것 없이 재미있기로 소문이 나 있는 영화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인간과 이물질과의 관계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서로 다른 존재가 서로 어울리게 되는 것일까?
정신분석가는 사팔뜨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어떤 단서를 찾아내기도 한다. 실제로 분석을 진행할 때도 마찬가지로 의외의 장면에서 중요한 단서들이 나타난다. 내담자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가치가 집중되어 있는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그 이면에는 중요한 자료들이 숨어있다.
우리는 오디세우스 신화를 잘 알 것이다. 아름다운 왕비를 놔두고 망망대해를 모험했던 오디세우스의 신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영감을 전해 주고 있다. 우리는 오디세우스 신화에서 한 장면을 다시 읽기 해야 한다. 사이렌이 등장하는 바다를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왕은 자신의 부하들의 귀를 모두 밀랍으로 막는다. 그리고 자신은 기둥에 묶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풀면 안 된다는 지시를 내리고 사이렌의 바다로 떠난다.
오디세우스 왕은 울부짖었다. 사이렌의 노랫소리를 듣고 그는 바다에 뛰어들어서 먹잇감이 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노랫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면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끝까지 배에 묶여서 움직이지 못했다.
영화는 이런 장면들을 충분히 떠올리게 해준다.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인간을 홀리는 인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해적들은 인어 한 마리를 포획하기 위해서 수많은 희생을 치른다. 그러나 기쁘게 치른다. 인어가 사납게 변한 모습을 보고도 홀려 있는 해적은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고 싶어 한다. 현실의 삶이 그만큼 끔찍하기에 인어의 노래에 홀려서 죽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인간 아닐까? 이것은 욕망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하나 떠올리게 해준다.
두 개의 방이 있다. 그중 하나의 방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 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그냥 나올 수 있다. 다른 하나의 방에는 엄청난 미녀가 있다. 그 방에 들어가면 그녀와 하룻밤을 지낼 수 있다. 그러나 다음날 그 방을 나오게 되면 기요틴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방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는 여러 철학자들이 답변을 했는데, 칸트는 자신이 정언명법에 의해서 빈방을 선택하게 된다고 말했고, 헤겔은 절대정신에 의해서 빈방을 선택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라캉은 의외의 답변을 했다.
무슨 소리냐? 인간의 욕망이 뭔데? 일단 가서 한다.
우리는 여기서 죽어도 좋다고 이야기하는 해적의 태도를 통해 그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지금 느끼는 것에 몸을 내던지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후에 발생할 책임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죽어도 좋다는 말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 아닌가? 현재의 쾌감에 몸을 내맡기고 나서라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로부터 전해 들어왔던 <홀림>의 이미지 일 것이다.
수많은 해적이 희생된 결과로 한 마리 인어가 생포되게 된다. 우리는 이 인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인어는 <생명>이지만 인간과 동족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물질이라는 점이다. 작가 클레이브 바커가 지적했듯이 만약에 슈퍼맨이 괴물과 같은 모습이었다면 우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슈퍼맨도 우리에게는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어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도 딱 반만. 그래서 수용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지의 두려움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매혹적인 아름다움도 함께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괴물과 같은 모습이었다면 당장에 처치해야 할 몬스터로 구분이 되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가치가 위험이 담보되어 있더라도 받아들일만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포획된 인어는 좁은 사각통 속에 갇혀야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운반을 위해서다. 인어에게서는 아름다움의 가치 이외에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적들은 그녀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그냥 운반하면 된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해적단과 동행하고 있던 목사만이 유일하게 인어의 호흡곤란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죽기 직전의 인어를 살린다. 심지어 목사는 인어에게 <시레나>라는 이름까지 붙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이 목사가 대체 무엇을 위해 인어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 같다.
그는 목사다. 아마도 인어를 보았을 때부터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던 충동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창세기 1장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담이 만물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해 준 ‘권리’ 문제였다. 우리는 이 점에 착안해서 목사가 가지고 있는 행동의 의미에 대해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연애하는 커플들을 관찰하다 보면 그 사람에게 <애칭>을 붙이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드물지 않은 현상이다. 애칭도 가지각색으로 다양하다. 상대를 높이는 호칭이 될 수도 있다. 혹은 별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인 관계에서 붙여지는 애칭은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남자가 조금 더 남자다워지게 되는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목사는 인어에게 <시레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시레나라는 이름의 출처를 조사해보면 재미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이 목사의 이야기와 모두 연관성이 있다. 시레나는 이탈리아의 소렌토 섬을 지칭하는 것으로 로마인들이 그렇게 불렀다. 목사는 선교여행차 로마를 방문한 적이 있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우리는 여기서 연결되는 단서들을 모을 수 있다.
목사는 자신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인어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미를 더 찾을 수 있다. 이름이 붙었다는 것은 인어에게 <존재>의 가치를 부여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목사가 인어에게 이름을 붙인 순간 <그것>은 이제 <그녀>가 되었다. 이렇게 이름을 붙여가는 과정은 고유한 것이다. 누군가를 부를 수 있는 호칭은 소중한 것이다.
그녀는 이제 인지되지 않던 미지의 생명체가 아니라 인지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제는 그녀가 누구인지 말하는 것 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무엇이 그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가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하나의 과제로 남아있게 된 셈이다.
영화 속에서 목사가 시레나에게 보여주는 관계는 주목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로맨틱하다. 어쩌면 액자 꿈과 같은 방식으로 영화 속에서 기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체 시나리오를 따라가면서 번외 편으로 등장한 것이라는 말이다.
영화의 말미에 목사는 시레나와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로맨틱한 결과가 될지 끔찍한 결과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열린 결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목사의 행동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결단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선택이 결단의 형태를 띠고 있다면 어떤 방향이든지 그는 사랑에 빠져있었던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이 남성이 사랑을 대하는 특징을 대변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