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그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미스터리 스릴러물에 대해서 호기심을 많이 가진다. 영화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흥미롭고 자극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어떤 사람들은 이런 영화에서 일종의 영감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미스터리물은 항상 우리의 호기심을 자아내요 끊임없이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해주기도 한다.
이 영화는 실화를 어느 정도 참작한 것 같다. 영화에서 에이미가 사라지는 것은 추리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실종 사건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었다. 사건은 영화와 흡사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에이미는 닉의 불륜으로 인해서 사라진다.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남편의 불륜을 알고 사라진다. 크리스티 여사의 실종은 대서특필되었던 사건이었다. 마찬가지로 에이미도 그랬다. 사라진 그녀를 찾기 위해서 대중 운동까지 일어난다. 크리스티 여사는 추리의 아이콘이었던 반면, 에이미는 어린 시절 환상의 한 축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정신을 자극하는 한 요소로 기능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에이미는 어린 시절 동화책의 주인공이었으며, 크리스티 여사는 추리의 여왕이었다. 에이미의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었고, 크리스티 여사의 탁월한 시나리오 구성은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흥미로운 생각을 해볼 수 있는데, 에이미가 사라진 시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것은 크리스티 여사의 실종과 맞닿아 있는데, 대중은 그녀의 실종에 매료되어서 연일 그녀의 보도에 이목을 집중했다. 그녀는 어디서 발견되었을까?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그녀는 발견되었는데, 영국 북부에 있는 어느 호텔에서 남편의 불륜녀의 비슷한 이름으로 체크인한다. 그리고 그는 방에서 조용히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그녀를 마침내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발견되자마자 다시 이름을 바꾸고 심리치료사의 사무실로 떠나가 버린다.
우리는 이런 행동을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에이미가 닉의 불륜을 알게 된 이후 태도가 어떻게 변했는지 생각해 보자. 그녀의 태도는 크리스티 여사의 그것과 똑같지 않은가?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크리스티 여사는 또 다른 단서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에이미는 자신의 흔적을 남겨 놓는다는 영화 설정이 다르다. 일종의 탐정놀이를 시키는 것만 같다. 영화 제목을 <나를 찾아줘>라고 번역한 것은 훌륭하다 싶을 정도의 느낌을 준다. 사라진 그녀로 번역하는 것보다 훨씬 영화의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닉과 에이미는 누가 봐도 완벽한 커플이었다. 그 완벽함에 흠결이라고는 있을 수 없었지만 연애가 아닌 결혼생활에 접어들게 되면서 그 둘은 변하게 된다. 이제는 완벽보다 식상함이 더 어울리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결혼이 어떤 의미에서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름다웠던 그녀가 일상생활의 일부로 흡수되면 관능의 요소는 필연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순수 사랑의 요소만 남게 된다면 그 시점에서 성 대상으로써의 가치는 저하되어 버린다. 우리는 김미경 씨의 TV 강연에서 말한 것을 조금 떠올려 보아야 할 것이다. 남편 얼굴은 눈 앞에 있는 손바닥과 같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곧 성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저하된다는 말과도 같다.
남자라는 운명에서는 언제나 최후의 여자를 찾아야만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한다. 여기서 결혼이라는 구속은 사랑이라는 믿음과 함께하며 남자를 남편으로 만든다. 결혼이 불행이라는 것은 이 지점에서 하나의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대상의 가치를 따지는 현대의 남녀에게서는 이것의 위반이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등장한다. 최후의 여자를 찾아야 한다는 운명에 더 충실해진 것일까? 그래서 어쩌면 미혼인 상태가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관능의 영향력 아래에서만큼은 대상 선택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충동의 역학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이 대상이라는 말은 여기서 합리성을 나타내지 않는가?
닉은 자신의 어린 학생인 애비와 불륜을 맺는다. 그 편이 더 좋다면 이혼을 결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혼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는 위반 자체에 매료되어 있는 것 같다. 에이미를 떠나서 다른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에서 어떤 만족감을 찾고 있는 것이었을까?
에이미는 닉의 불륜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불륜 자체가 비밀로 유지되어 있을 때는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륜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발생하게 되는 것은 정신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의 작용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를 다시 되뇌어 보아야 한다. 사랑이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변화시키는 것이다. 에이미는 변화를 결단한다. 이 지점에서 결단이란 여성적 특징보다는 남성적 특징에 다가가 있는 것 같다.
대상을 욕망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포기되지 않는다. 포기될 수도 없다. 그 어떤 조건이 있더라도 그 사람만큼은 취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에게서는 이러한 태도가 곧잘 발견될 수 있겠지만 여성에게서 자주 발견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남자에게 여자란 무엇이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여자는 남자의 증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여자는 남자의 생활 전반에 스며들어서 언제나 그 남자를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미지로 남겨질 때도 그러한 작용들이 남자에게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 흥미롭게 생각한다면 헤어진 첫사랑을 마지막 순간까지 떠나보내지 못하는 로맨틱 가이들의 운명에는 첫사랑이 늘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사랑을 만나면서 담배연기처럼 그 사랑을 떠나보내는 것 같지만 이미지만큼은 언제나 짊어지고 있을 것이다. 반면, 여성의 정신에서 일어나는 비슷한 현실은 생각보다 남자에게 불편할 것이다. 그녀들은 언제나 진정한 의미의 첫사랑에서 떠나가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애인이 자주 바뀌는 여성들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사로잡혀 있는 대상이 선택되어 있고 그 대체물의 갈아치우기를 통해서 자기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시도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의 의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그녀의 무의식이 전제한 작용이라면 행동에도 그러한 내용들이 반드시 반영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여성 바람둥이의 정통성을 지닌 공식이 되지 않을까?
에이미는 닉을 포기할 수 없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욕망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닉의 불륜은 그녀의 소유욕을 강화시켰다. 그것은 꽤 중요한 의미 차원을 발생시킬 수 있는데, 그 내용이 질투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에 에이미가 애비를 질투했다면 상황은 다를 것이다. 머리채를 잡고 마구 싸워서 결국 그녀를 패배시키는데 주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는 점은 오히려 얌전한 방식으로 살해 충동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과 여성 간의 공격성이 의외로 친밀함이라는 형식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죽이고 싶은 살의를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가까스로 견뎌낸다. 탐색해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에이미가 애비에게 탐색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이 남자’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따라서 닉에게 지속해서 소속되기 위해서 에이미는 애비를 탐색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가 견딜 수 있었던 이유가 설명될 수 있다.
사라진 에이미는 대중이 신비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시체도 발견이 되지 않았고 연기처럼 사라졌다면 다시 그렇게 등장하길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유년의 환상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 아닐까? 그래서 대중은 그녀에게 매혹된다.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는 여기서 집단이 구성된다는 점이다. 집단의 충동을 견뎌내기에는 한 사람의 힘으로 어렵다는 것을 안다면, 형성된 집단의 문제는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는 곤란한 사안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닉은 대중 앞에서 연설하게 되는데, 그 내용에 대중은 반발한다. 그를 유력 용의자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닉이 에이미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결혼 생활의 지속은 에이미의 성적 가치를 저하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성적 가치는 최초의 남녀관계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러한 성적 가치가 높은 여성에 대해서 매료되는 경우는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의외의 변수가 하나 생긴다. 에이미는 들킬 뻔했지만 과거부터 자신을 좋아해 오던 콜린스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 높은 성적 가치를 두고 있는 그는 그녀에게 과도하게 집착한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남녀가 이상적인 삼각관계에 빠져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 여기서는 섹스도 하지 못하면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문제가 들어가 있다. 이런 이상적인 삼각관계의 긴장감 자체가 그녀에게 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에이미에게는 그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재료에 불과했었다. 이 내용은 프로이트의 도라 사례로 우리를 인도해 줄 수 있다. 질문을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도라가 아버지의 불륜을 도와주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녀의 행동이 질문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애비와 닉의 불륜을 견딜 수밖에 없었던 에이미의 태도와 일치하지 않는가? 남자가 원하는 여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불륜을 허용한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것을 볼 수 있는데, 콜린스는 에이미와 닉의 삼각관계를 무너뜨리려고 시도한다. 여기서는 에이미의 행동이 더 이상하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적당히 진행하려고 하다가 에이미는 콜린스를 죽인다. 그의 살해는 완전히 덮일 수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에이미는 실종 상태였고 집은 아무도 모르는 외딴곳이었다.
그녀는 감금 상황을 설정할 수 있으며 피를 뒤집어쓰고 다른 사람들의 동정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다. 콜린스는 에이미에게 근본적으로 “이용 가치”가 있는 하나의 부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할까? 이용 가치의 유효기간도 설정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다른 이성에게 더 높은 가치를 둔다면 그 혹은 그녀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박탈되는 상황에 처해진다. 어쩌면 고립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상황이 설명되는 방식으로 채택된 것은 콜린스의 정신질환 전력으로 그의 행동을 단편화시켜버리는 것이다. 모든 것은 정신질환으로 인해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설명한다면 흥분한 대중을 진정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기능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보자. 흔히 유명인들의 자살의 원인을 우울증이라고 단정 지을 때, 대중은 그 죽음에 대해서 받아들이려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 마음의 병이 그렇게 만들었다면 다른 어떤 진실에 대해서 추적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우울증 뿐 아니라 강박증에서도 나타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면은 자해가 발달해서 자살로 이어진다는 일반의 통념과 곧바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임상은 그와 조금 다르다.
욕망 대상에 대해서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텐데, 최근 늘어나고 있는 범죄 중에서 <이별 살인>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이별 살인이 일어나는 이유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아무래도 자신이 욕망하고 있는 것을 채워줄 대상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 혹은 그녀가 주는 것이 사라졌기 때문에 현실을 견디기 힘들다는 말이다.
여기서 남성과 여성이 가지는 욕망의 이기성이 등장한다. 남성은 자기 욕망 대상을 파괴하려 한다. 다른 사람이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어떤 식으로 자기 주변에 묶어두려고 할 것이다. 그 어떤 비열한 방식을 사용하더라도 욕망 대상인 그가 곁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점에서 재미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흔히 사람들이 묘사하는 <얀데레>는 곧잘 좋아하는 남자를 의자에 묶어놓는 젊은 여자로 묘사된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 그를 묶어서 자신의 곁에 머물게 만들 것인지 탐구하고 실천하는 여자가 얀데레다.
우리는 여기서 남자 얀데레와의 차이를 구분 지을 수가 있을 것인데, 남성의 경우 결단의 방식으로 그녀를 파괴할 목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결국 죽이기 위한 작업이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떠나게 하지 못할 것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엄밀히 말해서 그를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 얀데레는 궁극적으로 그에게 종속되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에이미는 콜린스의 죽음마저 이용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대상을 향한 여성의 집착과 관련되는 것 아닐까? 남성의 이기적인 욕망이 대상을 파괴한다면 여성의 이기적인 욕망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 할지라도 그 대상을 지켜야만 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을까? 이것은 꽤 흥미로운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데 자기 자녀를 지키기 위해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에이미는 완벽한 시나리오를 통해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다시 대중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아무 일 없듯이 일상으로 되돌아오는데 여기서부터는 닉의 불행이 시작된다. 닉은 에이미와 이혼하고자 하지만 그럴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에이미는 닉을 자기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동안 미뤄왔던 임신을 한다. 문제는 성관계를 통해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는 인공수정을 선택해 임신한 것이다. 이것이 섬뜩한 이유는 그녀는 자기 아이를 생명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닉이라는 욕망 대상을 잡아두기 위해서 시도한 일종의 장치로서의 임신이다.
이 내용은 남자의 아이를 가지기 원하는 여성의 마음과 정 반대의 태도를 보여준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자 하는 여성에게서는 건강한 엄마가 관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이미에게서는 건강보다는 전혀 다른 내용이 발견된다. 합법적으로 닉을 잡아두는 장치로써의 아이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법적 책임이다.
법적 책임이란 보이지 않아도 인간의 행동을 제한하게 만들 수 있다. 닉은 임신한 에이미의 곁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족쇄가 되어서 기능하게 될 때, 닉의 불행은 이 맥락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