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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Apr 30. 2017

세 얼간이

너를 존재하게 하는 열정은 무엇인가?

 한국처럼 교육열이 심한 나라는 없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교육열이 치열한 또 다른 나라가 있다. 인도가 바로 그곳이다. 인도는 정신문명이 다른 나라보다 탁월하게 발달한 곳이다. 그러나 문명의 혜택을 받기 시작하면서 경쟁적인 태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는 아이들을 정해진 길로만 가게 만드는 것 같다.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자녀가 뛰어나길 바라는 소망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거기에 맞춰서 아이들이 부모의 욕망에 따라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캉이 말했듯이 아이는 엄마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그 틀에 한계가 부과되어 있다면, 우리는 의외의 결과를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교육에는 투자가 들어가야 한다. 정해진 미래를 꿈꾸기 위해선 투자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부모들은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공학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대학까지 진학시킨다. 삶의 질을 좀 더 향상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현재의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경쟁이 신경증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부모들은 고려하지 않은 모양이다. 정신분석가 대리언 리더는 이런 현상을 다음과 같은 말로 경계했다.


  흡연보다 경쟁 태도가 위험하다.

 주인공인 란초는 라주와 파르한이라는 두 친구를 통해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는 단순한 문장일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너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뭐야? 그게 무섭진 않아?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힘이다. 그 질문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것이며, 죽을 때까지 우리 뒤를 따라다니는 질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보통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다고 토로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 말을 다시 번역한다면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 싶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공학자가 되기 위해서 떠밀려서 대학에 입학한 라주와 파르한은 지시대로 공부하고 착실하게 생활한다. 다만 란초는 조금 다르다. 그는 배우고 싶어서 대학에 입학한 것이다. 하고 싶어 하는 것과 시켜서 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효율의 문제도 들어간다. 하지만 나아가서는 리비도 승화의 문제와 관계된다. 승화라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할 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남에게 등을 떠밀려서 억지로 한다면 승화의 자리는 신경증의 자리로 대체될 것이다. 억지로 승화 효과를 노릴 때, 신경증이 대신 방문한다는 것은 아직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일일 것이다.


 배우고 싶다는 것은 열정이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중요한 것을 하나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해도의 차이가 전제된다는 점이다. 질문을 던져서 답을 찾는 것은 리비도 승화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교과서는 거기에 대해서 충분히 답을 던져주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란초의 이해 영역은 교수와도 충돌을 일으킨다.


 란초는 우주에서 연필을 쓰면 안 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교수는 거기에 대해서 제대로 답해주지 못했다.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일까? 우주공간에서 연필을 쓰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사가 수백억을 들여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겔펜을 개발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주공간에서 연필을 사용할 때 발생한 흑연가루가 기계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답변보다 권위로 질문을 무시한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에도 곧잘 관찰되는 내용일 것이다. 물론 혼자서 검색만 해봐도 이러한 이유는 금방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단순한 것을 가르쳐주는 스승의 역할 아닐까?


란초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알 이즈 웰>이라고 주문처럼 외우는 말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기가 막힌다. 그는 우리 마음이 속기가 쉽기 때문에 그 말을 되뇐다는 것이다. 이 것을 조금 더 생각해보면 우리는 라캉으로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라캉은 자아를 두고 착각의 명수라고 했다. 자아는 착각에 자주 빠지기 대문이다. 우리의 생각은 속기도 쉽다. 유혹에도 무력할 수 있다. 이 것은 우리가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카르트의 명제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이 되지 않는가?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라주는 총장과 트러블로 인해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자살은 성공하지 못하고 그의 몸에 장애의 흔적을 남기고 만다. 그의 장애는 충분히 좌절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였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나는데, 그는 장애 덕분에 정신적인 중심을 잡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닥터 스트레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스트레인지 역시 장애를 입은 후에야 자기 정체성에 접근할 수 있었지 않는가?

 

 라주와 닥터 스트레인지의 공통점은 어떤 과잉된 기능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과잉은 언제나 결핍보다 더 문제를 일으킨다. 그의 과잉된 자존심은 그를 장애로 내몰았다. 흔히 말하는 애정결핍의 문제도 결국 따지고 보면 과잉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히려 결핍이 건강할 수도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이 목격한 것처럼 그렇게 못 먹고 못 입는 결핍의 상황에서 감기 걸린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과잉과 결핍의 문제에 조금의 통찰을 더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주변에서 우리가 곧잘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란초는 파르한에게 공학자의 길보다 사진작가의 길을 권한다. 그동안 시간과 돈을 투자해온 공학자의 길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신경증자들이 자신의 증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그 안에 투자되어 있는 에너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 상태로 살고자 하는 태도를 보일 때도 있다. 투자된 것에 따르는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투자된 것에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에 접근할 때, 의식의 행복을 소망하기 위해서 별의 별 수단을 다 동원할 수 있다. 이 말은 시체처럼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란초의 권유를 다른 말로 바꿔 볼 수 있을 것이다.


너의 욕망이 뭐야? 너를 존재하게 하는 열정이 어디 있어? 공학자야? 사진작가야?


 사실 란초의 제안이 엉뚱하지 않은가? 힘들게 입학하고 그렇게 많은 투자를 해서 간신히 공대를 졸업했는데, 그것을 내 던지라니. 그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라는 란초의 제안은 분명 상식적이지 않다. 그러나 때론 상식이 행복을 보장하진 않을 것이다. 한 단계를 더 넘어설 수 있다면 그가 존재하려는 열정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여기서 파르한은 선택할 수 있다. 열정적으로 존재할 것이냐 아니면 그냥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그  선택은 자유롭기 때문에 아무도 침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뒷감당이 따르더라도 온전히 본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얼마 전 미국에서 연구한 내용을 잠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미국 연구자들은 청소년의 수면부족 문제가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진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수면과 알코올 중독 간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실시한 연구였다. 1주에 한번 이상 수면부족을 경험한 학생은 수년 뒤에 과음 도는 폭음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 것이 과연 본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불면의 원인을 스트레스라고 지적한다면, 처해진 상황을 개선하는 것으로 충분히 조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적 갈등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연구결과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은 청소년들이 현실에서 지나친 억제에 시달리고 있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알코올은 정신에서 일어나는 억제를 약간 풀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술에 취해있을 때, 생각지도 못한 행동들을 할 수도 있다. 심각한 사고를 칠 수도 있고, 민폐를 끼칠 수도 있다. 그 청소년은 현실에 많은 노력을 <억지>로 투자하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 것은 결국 신경증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승화의 자리에 신경증이 함께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란초의 제안은 파르한이 미래에 경험하게 될 수 있는 신경증에 대한 예방적 처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선택권에 한 가지 선택지를 덧붙여 준 것이다. 만약 그가 공학자를 선택한다고 해도 탓할 일은 아니다.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신경증은 선택적으로 달라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공대에 입학한 방식을 반복하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마찬가지의 갈등을 또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성인이 되면 청소년 때 보다 억제를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 훨씬 다양해진다. 따라서 갈등을 견디는 방법들이 다양해지게 되기에 버틸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현실에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자기 존재의 열정을 찾지 못하고 갈등에 휩싸여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예시는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도 이러한 삶의 양태 아닌가? 물론 혹자들은 스스로를 찾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아에 대한 라캉의 조언을 다시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자아는 착각의 명수다.



 헬기를 만들어서 인정받고 싶었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반복해서 실패만 해서 좌절에 빠진다. 그리고 그 노력은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폐기물>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강박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다. 애쓴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윈도우에 설치된 미니게임 <카드놀이>를 해보았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이 지금 당장 실행해봐도 좋다. 이 게임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몇 번이나 성공할 수 있느냐를 따져본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낮은 성공률에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한 번에 1장씩 뒤집을 때와 3장씩 뒤집을 때의 차이는 상당하다. 놀이 속의 질서가 변경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높은 실패 확률에 처하고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애써서 어느 정도까지 해놨지만 더 이상 풀리지 않기 때문에 0을 다시 클릭해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방법 외에는 선택지가 없게 된다. 이런 식의 실패는 강박증에서 나타나는 것과 흡사하다.


 란초는 그의 실패한 헬기를 날 수 있게 다듬는다. 실험을 통해서 그 헬기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려는 것이다. 그의 실패를 이어받아서 성공으로 변화시킨 란초가 목격한 것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친구의 자살이다. 벽에 자기 자신을 탓하는 글을 적어놓고 죽어있는 친구의 모습은 실로 충격이다. 그의 자살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모든 노력이 인정받지 못했던 세상에 대한 분노 아니었을까? 그는 세상을 저주하고 분노했을 것이다. 자살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이기에 사람들은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또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살은 '나'만 죽는 것이 아니다. '세상'도 같이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원하는 것이 경제적인 성과였을까? 그 동안 이 것을 위해서 투자해왔으니까. 아니라면 자기 존재에 대한 열정이었을까? 그가 스스로에 대한 존재의 열정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욕망이 소멸한다면 자기 존재는 스스로의 가치를 상실해 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의미가 상실되어버릴 때, 자신을 지탱하던 법의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이 것이 뒤르켐이 자살론에서 말하던 아노미 현상 아닌가?


 대리언 리더의 지적으로 잠시 다시 돌아가 보자. 흡연보다 경쟁 태도가 더 위험하다는  지적은 상당히 유효하다. 흡연이 백해무익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일시적 불안을 완화해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경쟁 태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한의학에서도 <상화지기>라고 말하지 않는가? 사상체질을 연구하신 이제마 선생께서도 분노하는 것에 경계하셨다. 한번 분노할 때, 간에 칼을 한번 찔렀다 빼는 것으로 비유하셨던 것이다. 이 것은 승화의 가능성을 신경증의 가능성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 그래서 흡연보다 경쟁 태도가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독특한 것을 하나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는 말은 쉽다. 그러나 그 너머에서 우리는 또 다른 결정방식에서 갈등을 해야 하는데, 우리가 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에 내가 원하는 것이 두렵다면 그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파르한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그는 그동안 투자해온 것들을 버려야 하는 선택지를 택했다. 그가 궁극적으로 선택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였다. 우리는 여기서 자유를 찾아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란초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음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란초가 주문처럼 외우던 말의 진정한 의미 아닐까?


All i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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