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진우 May 03. 2017

오 마이 그랜파

무엇이 당신을 살아있게 하는가?

 언제나 그렇듯이 좋은 영화에서는 좋은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욕설과 섹드립이 난무할지라도 그에 상응하는 의미가 있는 영화라는 것이다.  영화 오 마이 그랜파는 그런 가치를 품고 있다. 세상 어디에서도  이런 식의 인생 멘토링을 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화 속에 들어있는 가치를 표면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정신분석을 하면서도 그 생각을 가지고 왔고 또 그렇게 글도 쓰고 있다. B급 코미디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냥 웃자고 보는 영화 아냐?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했을 거다. 

 하나 생각해보자.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런 메시지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다. 때론 코미디 영화가 진지한 질문을 던지도록 만들기도 하니까. 나의 관점에서 이 영화는 웃음 속에 진지한 질문을 숨기고 있었다. 내가 분석 현장에서 느끼고 있는 것들도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는 흔히 단순하게 즐길 수 있는 것조차 애써 외면하는 경우가 있다. 영화는 무엇을 위해서 즐기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보내는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주는 것 같다. 실은 또 다른 하나의 질문이 되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은 얼마나 클까? 인생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진실은 경험의 '총합'이다. 미리 결정지어진 운명은 점쟁이에게서 찾아야 한다. 우리 삶이 연역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영화는 정해진 대로만 살려는 태도에 변화를 일으키려고 하는 영화다.

 그리고 이 변화는 '생명'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영화 주인공 Dick의 이름의 의미를 살펴보자.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묘한 연결점을 가지고 있다. 뭐. 줄줄이 읊자니 피곤할 것 같으니까 패스. 불친절해도 어쩔 수가 없다.  이 영화는 누가 어떻게 이름값을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될 것 같다.



꼭 걔랑 결혼해야 겠니?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가 있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고 했었나? 그 결혼을 목전에 둔 제이슨은 결혼하기  전, 할아버지 '딕'과 1주일을 보낸다. 물론 일상의 드라마와 같은 내용은 아니다. 별 해괴망측한 일을 다 경험해야 했을 테니까. 할아버지는 아버지 말대로 살아온 제이슨에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진다.

"쟤랑 결혼하면 너 평생 좀비처럼 산다?"

 오. 마이. 갓. 결혼을 앞둔 새신랑에게 못하는 말이 없는 영감님. 결혼식에 초 치시려고 그러는가? 제이슨은 그동안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순조롭게 공부하고 취업하고 결혼까지 하려는 찰나인데 할아버지가 거기에 초를 치고 있다.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그러는 것인지는 우리는 탐구해보아야 한다. 

 여기서 '좀비'됨에 대한 공식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조금 판타지스럽게 생각한다면 제이슨의 그녀가 '네크로맨서'라는 말이다. 즐기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만 살아온 제이슨에게 있어서 변호사라는 직업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비신부 메레디스 역시 사랑보다는 예정된 결혼이다. 이것들은 일련의 시나리오처럼 짜여 있다. 정말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의 행복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즐겨! 즐기라구! 예!

 슬라보예 지젝은 자신이 출연한 동영상에서 이런 말을 한다. 정신분석가 친구들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이 아니라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아프면 병원을 찾는다. 별 효과가 없더라도 약물을 꼭 복용하고자 하며 조금만 더 편해지면 된다고 생각한다. 
 
 분석을 문의하는 경우도 아파서 문의하는 것보다 '즐기지' 못해서 문의하는 경우가 많다. 충분히 즐겨도 무리가 없는데 즐길 수가 없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묶어두는 걸까? 우리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 정신 장치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우리의 초자아가 병리적일 때, 즐기는 것은 문제가 된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애쓸 시간도 부족한데 즐기라니! 
 
 그래서 쉬지를 않는다. 나중을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쉬지 않아서 효율이 떨어져 버리는 역효과도 나타난다. 연애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즐기는 것은 사치라는 것이다. 심지어 다가온 기회도 놓아버린다. 다른 사람과 신뢰를 쌓는 것을 적극적으로 회피한다. 

 지젝의 말을 하나 더 인용한다면 환상이 범람하기 전에 빨리 섹스를 하자고 권한다. 이때의 섹스를 그냥 유희로 즐기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무책임한 자위행위에 매몰되지 말고 책임 있는 섹스를 통해서 결과를 만들라는 말이다. 환상에서 즐기던 것을 이제 현실에서 즐기라는 권함이다. 즉, 행동의 좌표를 옮기라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기묘한 진실에 접하게 된다. 광란의 섹스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꼭 하나를 피한다. 그것이 '임신'아닌가? 그들은 환상 속의 섹스를 현실에서 동작 - 행위로만 즐긴다. 따라서 그들이-프리섹스 주의자들- 하는 섹스는 결과적으로 환상에서 환상으로 이어지는 병리 현상에 맞닿아 있다.
 
 제이슨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메레디스와 샤디아는 대조적이다. 결혼하기로 한 메레디스에게서 느껴지는 것과 샤디아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메레디스는 조건을 더 따진다. 그리고 은근히 비열한 모습도 보여준다. 강박적으로 제이슨을 감시하고 풀어두질 않는다.  그녀는 제이슨을 장악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딕의 예언이 왠지 맞아 들어갈 것 같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대로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대조적으로 샤디아는 오래된 친구이고 과거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다. 어린 날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두 사람은 빨리 친해진다. 그녀는 제이슨을 빛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에피소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현실의 메레디스와 과거의 샤디아를 두고 누가 더 좋은 사람인지 판가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딕이 의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제이슨이 그 여자랑 결혼하는 걸 반대하기 위해서라고 단순하게 쓸 수 있는 것일까?
  정신분석에서 과거의 욕망은 억압되어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무의식 속에서 은밀하게 작동하면서 다시 나타날 기회를 노린다. 신경증에 걸린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과거의 억압된 욕망의 문제가 관련이 된다. 딕의 행동은 어쩌면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신경증적인 불행을 일반적인 불행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억압되어 있던 너의 욕망을 찾아라!라는 것이다. 즉, 결혼 그 자체의 불행을 감당해야 하는 기로에서 조금 더 좋은 불행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대부분 여성들이 선호할 수 있는 남자의 직업이다. 그러나 제이슨의 이면에는 사진작가라는 꿈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버지에 의해서 억압될 수밖에 없었던 꿈이다. 그런데 그것을 되살려내라는 것은 할아버지의 명령이었다. 다만 할아버지는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다. 할아버지의 행동은 제이슨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이슨, 겁내지 마, 사진을 찍어. 기록해. 너의 삶을 남겨

이정도는 해줘야지

 손자보다 훨씬 젊은 감각을 가지고 있고 즐길 줄 아는 할아버지. 게다가 짐승남(?)이기도 하고. 누가 이런 할아버지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제이슨에게 미적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즐길 기회가 없었다는 말이다. 자신의 생각이 없이 정해진 대로 살아가는 마치 좀비와도 같은 삶의 결과로 등장한 것이다. 사진작가라는 그의 욕망은 자신의 수치스러운 사진으로 대표된다. 코카인 하고 홀랑 벗고 해변에 쓰러져서 잠자는 사진이다. 수치스럽다. 그런데 그 수치스러움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보물일 수가 있다. 그 수치스러움은 말한다.

니가 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


 영화의 제목 Dirty granpa를 생각해보자. 여기서 Dirty는 더럽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이 제목 덕분에 인도에서는 상영금지가 되었다고도 하니까. 융은 정신분석을 두고 이런 표현을 했다. 더러운 물속에 뛰어들어가서 보물을 건져오는 작업이라고 묘사했다. 실제로 그렇다. 분석가의 카우치를 체면 상실의 자리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자신의 더러운 기억들을 모조리 드러내는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수치스러움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는 체면을 지켜야 하니까. 바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현재의 체면이 그의 자유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것을 무릅쓰고 드러낼 수 있을 때,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이슨은 수치스러움을 당했고, 결혼도 안 했다. 샤디아는 결혼이 잡혀있었던 것을 알고 제이슨을 떠나 버린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제이슨은 그녀를 잡고자 한다. 그것도 할아버지의 도움을 통해서. 아무튼 해피엔딩이다. 그는 자신을 빛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은 것이다. 둘은 서로 완전해질 수 있다. 누군가를 보완해주고 채워주는 관계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가?

 여기서 제이슨이라는 이름이 '이아손'과 철자가 같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샤디아는 1년간 여행을 떠나기 직전이었다.(그것도 배를 타고 간다.) 제이슨은 그녀를 따라가기로 결정한다. 이 내용은 아르고 호를 타고 황금 양모를 찾으러 가는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게 해준다. 인생의 아름다움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제이슨의 인생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그 모험에 함께하며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름다움 아니었을까?

 그때, 딕은 제이슨에게 자신이 구입한 카메라를 준다. 전 세계를 촬영하는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다는 욕망을 먼저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억압에서의 자유'를 말한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게 전달된다. 제이슨의 망신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는 무엇보다 안정적이었고 변화 없는 삶에서 무리 없이 살던 사람이다. 따라서 사막과도 같은 삶을 살아야만 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망신이, 체면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좀비로 살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물론 제이슨은 메레디스와 결혼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랑을 맛본 입장에서 다시 시체가 되고 싶진 않았기에 그는 샤디아를 선택했다. 메레디스의 말이 그에게 지시와 명령 그리고 물질로 다가온다면 샤디아의 말은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 준다는 말이다. 좀비처럼 칙칙한 삶에 내려온 구원과도 같은 그녀다.

 만약 메레디스를 선택했었다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견딜 수 없다면 다시 좀비로 돌아가는 것이 더 속 편한 일이다. 주인 잘 만난 노예만큼 편한 것이 없다고 하지 않은가. 세상에.

 제이슨은 새 생명을 얻을 기회를 찾았다. 딕이 준 사진기는 제이슨의 욕망을 대표한다. 너의 욕망을 이곳에 기록하고 추억으로 남겨라. 내가 없더라도.

영화 끝에 딕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72세의 노인이지만 그는 살아 있고 건강하다. 정신분석에서 Dick 즉 남근은 페니스가 아니다. 생명의 상징으로서의 남근이기 때문이다.

 사실 70대의 노인이 아내를 떠나보낸 다음날 한참 어린 여자애들을 꼬시러 다니는 것에 대해서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부인에게 충실했던 남편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부인의 유언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세요."였다. 딕이 그렇게 해야 했던 것은 부인의 유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 부인의 유언을 실천할 시간적 여유는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은 부인을 애도하기 위한 의미를 품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사랑하는 부인을 그리워하고 떠나보낼 수 있으니까. - 그래서 애를 낳은 건지도 모르지만!

딕은 훌륭했고, 그 결과도 훌륭했다. 더 이상 훌륭한 결과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값'을 하게 만들어 준 것 아닐까? 제이슨이 평생 시달려온 병리적 초자아의 모델은 아버지였다. 제이슨이 병리적 초자아에 대항할 수 있었던 딕의 역할은 궁극적으로 누구의 역할과 닮아있을까? 그것이 정신분석가의 역할과 맞닿아 있는 것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세 얼간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