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그는 트라우마 때문에 그렇게 사는 걸까?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서 영감을 얻곤 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영화 중에서 꼽자면 이 영화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윌은 수학천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그 천재성을 전혀 살리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다. 분명히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알아보고 등용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 영리한 머리를 노동에 썩힐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
그러나 지식이 뛰어나고 영리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갖춰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인정’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영역에서 기능하는 것들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영감을 던져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이 영화를 검색해보니까 윌의 문제를 죄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양부에 대한 트라우마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영화 해석에 나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트라우마로 그의 모든 행동이 설명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인간 행동을 그렇게 편협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조금 문제다.
윌을 신경증자로 볼 수는 없다. 그는 현실에서 충분히 선택하고 기능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다로운 유형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단순히 그가 트라우마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펼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고 착각이다. 본질은 전혀 다른 데에 있고 트라우마는 단지 드러나는 덮개일 뿐이다. 정신분석은 그 덮개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아닌가?
특히 이 영화가 정신의학에서 설명이 제대로 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뇌에 문제가 있어서 신경증에 걸린다는 정신의학에서는 이것도 뇌 문제로 설명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천재를 어떻게 뇌가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가 고안한 정신 장치의 문제는 이 내용을 좀 더 탁월하게 설명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만약 인간을 연역적인 존재로 파악한다면, 즉, 결론이 이미 정해져 있는 인간으로 파악하고 있다면 정신의학은 나중에 점성술의 영역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재미있는 비유를 할 수 있는데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의 관계의 비유이다. 그들은 천문학자와 점성술사로 비유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한데. 심리학자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어떤 연구결과를 내고 인간의 치료가 이렇게 될 수 있다고 검증을 해놓으면 정신과 의사는 부적과도 같은 약 한 알로 당신의 삶이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윌은 천재적인 수학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수학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나 던져보아야 한다. 누가 그에게 가르쳐주었는지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애써 연구한 것들은 그에게 장난처럼 느껴지는 놀이였다. 연구해야 간신히 풀어낼 수 있는 문제를 재미로 풀어낸다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천재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에 어떤 수식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이해하는 독특한 방식이 있다면 말은 달라질 것이다. 수학에 대한 어떤 기초개념을 가지고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이 전제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어떤 학문이든지 탐구하기 위해서는 기초개념이 필수적이다. 만약에 정신분석을 한다고 해도 기초개념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가장 난해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초개념 안에서 탐구할 주제들이 더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기초개념이 없다면 문제는 탐구될 수가 없다. 윌은 그런 기초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탐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수식 같은 것의 이름은 모른다. 그가 재미로 배웠던 기초개념이 현재의 그가 있게 만들어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의 기초개념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윌이 무엇을 공부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에게 공부를 가르쳐준 사람이 없다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문자나 숫자들 간의 질서를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학문이 계단식이라는 말이다. 즉, 기초를 다져나가면서 한다는 것이다. 윌은 그러한 기초개념을 다루어서 어떤 질서를 형성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런 능력은 쉽게 주어지지 않기에 희귀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윌의 능력을 알아본 램보 교수는 그를 길들이려고 한다. 이런 천재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윌의 저항은 만만치 않다. 수학 연구를 함께한다 치더라도 그 행동은 따로 통제되지 않는다. 윌의 정신 치료를 의뢰하지만 치료사들이 그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치료의 과정들을 알고 있으며 그 시간에 장난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지간한 심리학 분야는 다 꿰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문자에 대해서도 탁월한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치료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치료될 이유도 없었다. 그가 <이상> 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상 멀쩡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윌에 대한 진단명 하나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를 두고 <자기애성 인격장애>라는 말을 붙일 때가 있다. 그런데 좀 웃기는 것이 자기애성 인격장애에 해당하는 임상 현상이 없다. 정신의학에서 붙이는 자기애성 인격장애는 무한한 성공욕으로 가득 차있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관심을 받으려고 애를 쓴다. 지위나 성공을 위해서 착취, 공감 결여, 사기성 같은 행동양식을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윌의 어떤 부분에서 그런 내용들을 찾을 수 있는가?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체 무엇이 윌을 자기애성 인격장애라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억지도 단서가 있을 때 써야 하는 법이다.
윌의 치료를 위해서 램보 교수는 숀 교수에게 맡기기로 결정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껄끄럽지만 그만큼 윌이 중요한 인재라는 사실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키워주려는 교수와 보듬어주려는 교수, 그러나 윌에게 두 사람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여기서부터 윌의 문제가 드러난다. 과연 어떤 식으로 그에게 의미가 사라지게 된 것인가?
윌은 램보 교수의 사무실에서 그의 그림 한 장만 보고 그의 심리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파악한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누구라도 기분이 나쁠 것이다. 누가 그에게 함부로 인간을 재단할 권리를 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숀 교수는 그런 윌의 태도에도 동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내를 모욕했을 때만큼은 분노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명예는 지켜야 하는 법일 테니까.
윌은 스마트한 멋진 여자 친구도 만난다. 그녀, 스카일라는 하버드 생이고 자기 힘으로 뭔가를 해나가려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윌에게 호감을 가진다. 그러나 곧 이어서 윌의 지적 능력에 매료되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짜릿한 일 아닐까? 그러나 윌은 그녀에게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다. 이유는 위와 같다. 그녀에게 어떤 의미도 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스카일라는 윌과 함께 있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함께 캘리포니아로 가기를 원했다. 경제적인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윌은 보스턴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스카일라는 윌에게 말한다. 그리고 윌은 그렇게 대답해준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주면 사라져 줄게
사랑은 정신병이라는 플라톤의 명제를 다시 되뇌어 보자.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일종의 정신병 상태에 빠져있는 셈이다. 그리고 사랑 대상의 말은 어쩌면 절대적인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윌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스카일라에게는 그 명령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야만 하는 명령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을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말의 힘을 가장 잘 증명해주는 것이 바로 ‘최면’ 일 것이다. 이러한 최면의 문제들은 흔히 연애 문제에서도 등장하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서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최면가들 중에서는 인덕션과 같은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최면가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녀가 최면에 걸려있다면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라고.
피 암시성이 낮은 신경증자가 있을 수 있다. 프로이트는 루시. R 양을 치료하면서 그녀가 피 암시성이 낮은 것을 보고 암시를 버렸다. 정신병은 어떨까? 정신병자는 말 자체에 종속되어 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 그대로 종속되어 버리는 현상을 우리는 이탈로 칼비노의 환상소설 <사랑에 빠진 악마>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알바로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세 번이나 변신해서 아름다운 여인으로 나타나는 비온데타가 그것을 드러내 준다. 이 소설의 끝에서는 비온데타가 알바로의 실수로 사라지게 되는데 주변인들은 알바로에게 <그녀를 악마로 생각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온데타는 알바로의 말에 종속되었고 정신병적인 상태로 그의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알바로가 비온데타에게 자살을 명령했다면 그대로 실행했을 것이다.
윌은 말실수를 했다. 그러나 드러내지 않는다. 말의 힘은 쉽게 취소되지 않고 마치 트로이의 목마처럼 한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 그것이 언어의 침투성 아닌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스카일라는 윌에게서 사라져야 한다. 의미를 두고 있던 사람에게서 무의미를 발견하게 될 때의 좌절감은 그녀를 일시적인 거식 혹은 폭식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먹어야 할 사랑이 음식으로 대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인과 결별하고 살이 찌게 되는 여성들을 우리는 생각보다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윌은 숀 교수와 상담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중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영감을 주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느냐?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영감이란 쉽게 찾기 어려운 것이다. 영감을 줄 수 없는 사람들은 많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에게 <영감>을 던져주기 위해서 오해 섞인 말잔치를 벌이지 않는가? 그것이 비록 아무 의미가 없을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큼은 소중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는 대상에게 의미를 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의 지난 모든 연애에서도 상대에게 의미를 둘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정신에 돈 후안이 있어서 여자를 연구하기 위해서만 만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은 윌의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이용 가치가 그것으로 제한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의 뛰어난 두뇌는 성숙을 거부하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영감을 안겨줄 수 있다면 그는 이전보다 훨씬 훌륭하게 성숙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 한 사실이다. <영감>의 중요성은 이미 수 세기 전에 에디슨이 증명했던 것 아닌가?
영화 내내 윌이 감동을 받는 장면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꼭 한번 그가 감동을 받는 장면이 있다. 숀 교수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반복해서 말해줄 때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윌의 어린 시절에 학대로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윌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으로 묘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개봉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네 잘못이 아니야....
트라우마는 정신의 자극 보호대가 견딜 수 없는 외부 사건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윌의 학대 장면을 다시 돌려볼 필요가 있다. 그는 학대 도구를 스스로 선택했다. 혁대가 있고 파이프가 있고 렌치가 있었다. 윌은 렌치를 선택했다. 숀 교수는 혁대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렌치를 선택한 이유는 갈 때까지 가 보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기존에 말하던 윌의 트라우마는 완전히 무너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양부의 학대가 그의 정신에 충격을 가할 수 없었다. 학대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학대가 외상으로 경험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윌의 트라우마는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에 윌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면 학대 도구를 선택할 때 망설여야만 했을 것이다. 그것이 정신에 그만한 충격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부의 문제가 그의 정신에 어떤 작용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아 이상과 초자아의 관계를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초자아는 우리에게 법을 지키게 하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심지어 공감 반응조차도 초자아의 기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보통 명령을 폭격하는 이미지로 잘 묘사되어 있는 초자아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러나 초자아의 명령이 부드러워질 때, 우리의 자아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윌의 초자아가 기능하지 않은 것일까? 그의 초자아는 제대로 기능하고 있었다. 문제는 초자아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 장치들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자리>도 필요하다. 라캉은 아버지의 이름을 이야기했는데 초자아를 두고 아버지의 자리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이름이 머물 자리도 있어야 한다. 제자리에 있을 때,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윌이 삐딱해지고 의미를 붙이지 않았던 미스터리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다. 윌에게 아버지의 이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리가 삐딱했다. 우리는 비슷한 정신분석가의 예를 들어볼 수 있다. 샨도 페렌치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페렌치는 프로이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그는 아버지의 자리가 없었다. 따라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었다. 프로이트가 그의 아버지가 되어주었기에 그의 능력도 살아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에 통합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윌도 마찬가지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있어도 아버지의 자리가 삐딱했다. 숀 교수의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은 그에게 아버지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말이었다. 그동안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삐딱했던 초자아의 명령이 다시 자리를 잡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시점에서 의미 부여가 가능해진다. 쓸데없는 의미 부여가 아니다. 아버지의 자리가 잡히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역할도 감당하고자 하는 정신작용이 생겼을 것이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반복적인 속삭임은 다음과 같은 말로 다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삐뚤게 가지 마. 안 그래도 돼. 너의 마음에 자리를 마련해. 내가 너의 의미가 되어줄게
윌의 자아는 저항을 상실한다. 그의 영리함은 자아의 기능이다. 그리고 그 자아에 명령을 내리는 것이 바로 초자아다. 초자아의 기능이 바로 잡히게 되면서 그가 그동안 감당하지 않으려 했던 것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을 것이다. 이제는 조금 더 살아있는 것처럼 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좋은 조건의 직장이 있어서 그는 시체 같은 삶에 매력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활기가 필요했다.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만약 그가 신경증자였다면 그는 다시 시체 같은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숀 교수는 윌에게 치료가 종결되었다는 선언을 한다. 물론 이러한 단기 치료를 통해서 치료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식의 단기 치료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숀 교수의 종결 선언은 여기서 꽤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 내는데 윌이 좋은 직장을 내팽개쳐버리는 것이다. 그는 그동안 아무렇게나 살아왔다. 그래서 또 그런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숀 교수와의 동일시가 일어나면서 그에게 영감을 안겨주는 유일한 대상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숀 교수가 희망했던 유일한 내용 아닌가? 그의 치료 종결 선언은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해서 무엇인가로 승격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이다. 치료의 나머지는 사랑에 맡긴 셈이다.
윌은 스카일라를 찾아 떠난다. 그는 어떻게든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취소시키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윌은 스카일라와 서로 영감을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서로 주고받는 상호성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는가?
만약 윌이 남성이 아니라 여자였다면 영화의 시나리오는 어떻게 변할 수 있었을까? 숀 교수는 그녀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했을까? 남성과 다른 여성의 문제를 고려할 때, 그녀에게는 다른 말이 필요할 것이다.
네 자리가 여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