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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Apr 16. 2017

내 심장을 쏴라

정신병원이 자유를 담보하는가?

문학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영화와 정신분석 간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루 살로메는 정신분석과 문학이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영화와 정신분석도 같은 언어를 활용할 수 있다. 문학의 독법이 영화의 독법과 상응한다면 정신분석은 그 가교 역할을 충분히 해줄 수 있다. 


 영화는 궁극적으로 현실을 반영한다. 현실을 반영하기에 어느 정도 절제된 선을 지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현실 문제가 영화보다 더 끔찍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이미 전 대통령이 보여준 것 아니었는가? 


 처음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현실보다 끔찍하게 묘사했다고 말하거나 혹은 덜하다고, 반영이 잘 되었다고 말하곤 했다. 대체 무엇이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경험의 차이를 일깨우게 하는 것일까? 


 사실 정신병원에서 제공하는 치료적인 수단이 약물이고, 그 외에는 질서를 지키게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정신병원은 하나의 권력기관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그것이 과거의 수용소 치료로부터 전해 내려 온 역사 아닌가? 그래도 모든 병원이 다 폭력적이고 인권을 무시하진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좋은 의사들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병원은 환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그 직원을 당장 파면한다. 환자에게 친절하지 못한 것에 대한 즉각적인 처벌이 일어나는 것이다. 권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신경증적인 반응이 있을 때, 권리 포기는 저절로 일어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정신병원에서 보호사는 의료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의료기관마다 보호사를 의료인으로 받아들여주는 곳은 있다. 환자를 치료하는데 보호사의 도움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호사와 간호사 간 사이가 좋지 않다면 보호사는 간호사를 돕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병원 내의 헤게모니 싸움과도 같을 것이다. 


 사실 보호사가 되는 자격이 그리 큰 것은 아니다. 허나 환자들에게 친절하고 신뢰감을 줄 수 있다면 보호사의 존재는 치료에 크나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것은 필자가 이미 책 '분석가의 외투'에서 기록한 임상을 통해서 밝혀놓았던 것이다. 실제로 정신분석가 양성과정 중에 정신병원 보호사로도 근무를 해보았기에 직접 경험한 일이다.


 이 영화에서 보호사는 무척 폭력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그도 그럴 것이 보호사는 환자들에게 공포의 존재와도 같았다. 노무현 정권 이전의 정신병원에서는 환자들의 폭행 및 성폭행도 수시로 일어났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환자들의 정신이상을 핑계로 그런 일이 없다고 하면서 쉬쉬하면서 묻어버렸었다. 그것들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은 현재도 꽤 많다. 그러나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다.

 현재의 정신병원이라고 해서 이런 끔찍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정신병원에 입원한 미성년자의 성추행으로 인해서 입건된 보호사의 문제들을 생각해보자. 현재도 충분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에 대한 투쟁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지만 잘 알려지지는 않고 있다. 대체 어떤 이유에서 알려지지 않았을까? 우리는 고민해보아야 한다.   


 병원에서 집단치료를 하는 시간에는 캠코더로 행동들을 일일이 관찰하고 촬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의문을 하나 던져볼 수 있다. 인간 행동 원리가 '뇌'의 문제라면 그들의 집단적인 행동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행동 원리가 생물학적인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행동 원리가 생물학적이라면 생명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강박증자의 호기심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 원리는 생물학적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쾌-불쾌의 원칙처럼 생물학적 근거를 가지게 되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죽음 충동이나 자기 파괴와 같은 내용들은 생물학적 근거로 설명될 수가 없다. 자아의 고유 기능이 생존에 있는데 그 반대 작용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서 승민은 '의료진'보다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치료를 하는 사이코드라마 장면을 '논문 거리'라고 비아냥 거림으로 치료가 아니라는 것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 비판은 상당히 유효했다. 그리고 그는 대상자였던 부인에게 다가가서 이야기를 건넨다. 소설처럼 들리겠지만 그 부인에게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무의식적 내용에 근접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 말은 그녀의 감정 반응을 이끌어 냈다. 


 생물학적 근거로만 판단하려는 의학의 이기심을 멋진 비아냥거림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즉, 의학의 자리를 질투하고 있던 광기가 승화된 것이다. 어쩌면 의료진은 그가 멋대로 자신의 망상을 드러냈다고 비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존의 관점을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훌륭한 것이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정신질환의 원인을 한 가지로 본다는 것은 치료가 <고인물>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고인물>은 이렇게 재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뇌가 문제라서 지금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뇌를 고문해서 정신을 차리게 해주어야 해요.


이것은 1960년대 정신과 의사가 종종하던 말 아니었는가? 뇌를 두들겨 패서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 말이다. 이 말은 따로 연결이 지어질 수 있다. 장기간의 약물 복용이 정신 기능을 저하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매번 폭행에 노출된 사람이 자연히 위축되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영화 후반부, 수명은 시력을 잃어버리려 하는 승민을 돕는다. 그때, 승민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명이 자기 자신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승민이 어떤 말을 하든지 신경 쓰지 않던 수명은 오직 그 말에는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 그는 승민을 내팽개쳐버린다. 그는 왜 그 말에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어떤 행위가 수치심, 즉, 부끄러움과 연결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욕망이 드러나는 방식 아닐까? 자신이 욕망하고 있는 것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를 두렵게 만들 수 있는 것. 거기에 부끄러움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게 된 것 아닐까? 자기가 원하는 것인데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치료의 첫걸음이자 종결 신호이기도 하다.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는 우리 주변에 부지기수로 존재하고 있다.


 수명이 정말 원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었을까? 그의 공황장애는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유혹할 것이라는 환상에서부터 기인한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묘사하는 그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공황을 굳이 설명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공황은 개인차를 통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는 증상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이 말하는 공황장애를 단독 진단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회피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결국 <자유>의 문제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 어떤 사건에 매여 있다면 그것에서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쏟아부을 수 있을 것이다. 신경증에 빠져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도 같다. 거기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치료 과정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신경증자는 자유를 얻고 나서 크나큰 슬픔에 빠진다. 다시 감옥이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병을 그리워한다. 치료는 그렇게 포기될 수도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 탈출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 해방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탈출 시도가 실패하게 되자 두 사람은 전기치료까지 처방을 받는다. 전기치료를 하고 나면 사람이 축 늘어진다. 이것은 일종의 처벌로 기능할 수 있다.

 

 의학에서는 우울증 등에 전기치료가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만약 주체가 기대하는 것이 처벌이라면, 그리고 전기치료라는 방식이 처벌의 기능을 해준다면? 


 그 사람은 전기치료로 인해서 충분히 좋아질 수 있다. 처벌받았기 때문에 그만큼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따라서 재발하게 되면 다시 또 그만큼의 처벌들이 이뤄져야 한다. 약물처럼 '의존'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최면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게 되는 현상 아닌가?

 

 전기치료의 궁극적인 목적은 증상을 일시적으로 <억눌러>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억류>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증상을 억류한다는 것은 나오지 못하고 안에 가둬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치료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증상의 억류는 치료가 아니다. 가둬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증상의 억류는 꽤 중요한 개념으로 쓰일 수 있다. 영화 속 대사 중에 이것을 의미하는 중요한 말이 있다. 



정신병원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이것을 우리는 억류 효과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미쳐서 갇힌 자는 사회에서 억류된다. 갇혀서 미쳐가는 자는 억류된 증상이 솟아오르고 있는 상태가 된다. 외부의 삶이 제한적일 때에도 내부의 삶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이점에서 명백해지지 않는가? 광기란 내면의 삶과 외부의 삶이 균형을 잃고 말았을 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삶이 정지되어있더라도 미치지 않기 위해서 내면의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의사 베텔하임이 관찰했던 정신분열증 치료방법은 무엇이었는가?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폐 단계의 정신분열증의 치료센터를 수용소와 정반대 개념으로 만들었다.

 

 여기서 박탈된 것과 주어진 것의 차이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권리'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박탈되었을 때,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신경증이라는 감옥을 통해서 현실을 살아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승민은 수명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이제 빼앗기지 마, 네 시간은 네 거야.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시간을 더 이상 증상에 지불하지 말라는 것이다. 삶이 시간 투자의 연속이라면 투자의 결과는 바로 나타나게 된다.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지불한 결과는 끔찍하다. 자신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증상에 지불되고 소요비용은 인생 전체가 될지도 모른다. 

 

 신경증자들은 미래를 꿈꾸길 좋아할 것이다. 현재의 더러운 욕망들의 집합은 미래의 순결함으로 씻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미래의 순결함을 침범하는 어떤 사건을 접했을 때, 다시 그 미래를 순결하게 만들기 위해서 애매한 상황에 머물고자 할 것이다. 그것이 불확실성이다. 그래서 다시 원점에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신경증에서 기능하는 반복 강제의 영향 아니었던가? 모든 것을 실패한 뒤에 다시 원점에서 출발하라는 메시지. 삶의 변화 가능성을 모두 막아버리는 끔찍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전략일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는 실패를 권했다. 실패했다면 다시 실패해도 좋다는 그의 메시지는 신경증의 차원에서 재해석될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기존의 구조로 실패했을 때, 더 나은 실패를 경험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는 아킬레스와 같은 신경증자라면 더 나은 실패만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빠르고 용맹하더라도 거북이를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유일한 해결책은 거북이를 보지 않는 것이다. 미래의 순결함에 거는 기대를 현재의 욕망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그것이 당신 삶의 궤적을 비트는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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