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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Apr 16. 2017

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

여기서 사랑에 의한 치료를 말하다

우울증으로 진단받은 한 남자가 회복되는 과정을 그린 '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라는 꽤 유명한 영화다. 실제로 내용도 재미있고 일본에서는 3부작으로 드라마도 방영이 되었다. 이 영화는 흔히 말하는 <우울증>이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기획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실제 사례와 더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신의학의 진단은 분명 현상에 국한되어 있다. 비슷한 현상을 드러내게 된다면 그것은 동일한 진단으로 나올 수 있다. 우울증이든 ADHD든지 의사가 나름대로의 경험을 통해서 진단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영화 속 주인공의 극복 과정에는 이견이 없다. 그가 어떻게 우울을 이겨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더 중요한 것은 진단의 문제라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치유 효과에 대해서도 이 영화는 이야기해주고 있다. 욕망의 차원이 공유되는 결과를 빚는다면 가장 이상적인 치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사랑의 기적이라는 포장은 덤으로 씌워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우울은 정신의학과는 다르다는 것은 인지해야 한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우울증, 즉 멜랑꼴리는 정신병의 차원이다. 우울이라는 말이 워낙 광범위하게 사용되다 보니 나타나는 현상이 각각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주길 바란다. 멜랑꼴리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른 영화를 통해서 생각해볼 참이다.


 의사는 츠레를 전형적인 우울로 진단한다. 그가 드러내 보이는 기분의 영향으로 그렇게 진단한 것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이 진단명을 결정할 때, 우리는 심각한 오해에 빠질 수 있다. 기분이 증상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기분 변화는 조울증으로도 진단될 수 있다.

 1960년대의 스위스 의사 쿤은 히스테리 환자에게 정신분석을 실시했었다. 현대의 의사는 그것을 초기 우울증을 간과한 오진으로 판단하곤 했다. 그녀의 재발이 조병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분석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환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쿤은 옳았다.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독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쿤은 진단을 위해서 그녀의 생활사건들을 조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라온 환경들과 심리구조의 형성을 탐색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의 히스테리는 요즘 말하는 해리장애의 수준이 아니라 심리 내적 구조를 진단한 것이다.


 츠레의 생활을 살펴보자. 그는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치즈를 먹고 정해진 대로 살아가는 남자다. 그리고 직장에서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고객이 있고 그는 언제나 츠레를 찾는다. 언제나 츠레를 곤란한 상황에 빠트리는 사람이다. 여기서 우리는 츠레가 감당할 수 없는 억지에 노출되어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의사의 입장에서 슬픔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우울증 환자를 전제한다. 변함이 없이 지속적이고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슬픔의 등장은 우울증의 징후로 해석한다. 그리고 삶의 즐거움이 없고 아무런 흥미도 가지지 못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므로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 성적인 관심도 사라진다. 식욕도 떨어진다. 정말 이것이 우울이라면 약물은 기분을 호전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약물은 뇌혈관 장벽의 파괴가 선행되어야 한다. 뇌에 작용하기 위해서는 이물질을 필터링하는 기관의 파괴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부작용도 경험할 수 있다. 내적 갈등의 문제는 신체에 작용하는 약물의 작용으로 증폭될 수 있다. 약을 먹어도 듣지 않는 환자들은 대부분 이 현상을 경험하게 되지 않는가?  


 츠레의 아내, 하루는 남편의 우울증에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울증의 원인이 세로토닌을 저하되었기 때문이라는 검색 결과를 통해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세로토닌이 갑자기 나오지 않게 된 거야?!?!




 남편의 뇌 자체가 이상했던 걸까? 우울증이란 그렇게 규정이 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위와 같은 내용들이 대체 어떤 식으로 등장하게 되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정신의학에서는 뇌로 모든 것이 설명될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조금 더 정밀하게 과녁을 겨냥해야 한다. 그 과녁이 우울증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말일 것이다.


 츠레가 드러내 보이는 내용들에 대해서 중요한 시사점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신경증에서 나타나는 저지의 문제와 관련이 깊다. 저지 문제가 나타날 때 현실의 기능저하는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잊지 말자. 모든 신경증에서 전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한다면 정상에서도 저지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자아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이 병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 점은 충분히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프로이트는 강박신경증에서 나타나는 저지를 업무 효율이 떨어져 있는 것으로 설명했다. 어떤 업무가 주어졌을 때, 효율이 극도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츠레의 업무 효율이 떨어진 것일까? 그것은 아닌 것이라고 여겨진다.


일은 일대로 하지만 그 이외의 기분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정신신경증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문제라는 가정을 해봐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신경쇠약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약이 아니라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 있다.


 구조는 언제나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그의 뇌구조의 문제라면 약물은 기능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약물의 작용은 뇌 기관의 파괴를 불러일으킨다. 장기적인 약물복용이 정신 기능을 저하시키게 된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 아닌가? 약물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활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기 사랑을 포기하지 못할 때, 증상은 이런 식으로 억류된다.              


 츠레는 자기가 뒷바라지를 할 테니 하루는 만화만 그리라는 말로 프러포즈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많이 썼다.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스트레스를 견뎠다. 그러나 스트레스는 결국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의 내적 갈등은 스트레스가 아니라 충동이라고 보아야 한다.


 장기간 억눌려야 했던 그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정신과 신체의 균형이 맞춰지지 않는다면 그는 신경증의 방식을 동원해서 현실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만족이 전부가 아니다. 신체적인 만족도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 정신으로만 만족하고 말아야 할 때, 갈등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츠레가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주기 위해서 하루는 애를 많이 썼다.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츠레와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애를 쓴다. 그의 아픔에 공감하고 보듬어준다. 그러나 츠레는 병상태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만큼 강한 힘으로 억눌러놓았던 그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용수철과도 같아서 억눌러놓은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풀어내기에는 쉽지 않은 과정들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병에 걸린 사람들은 부끄러워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사회적인 낙인의 문제 또한 존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에 걸린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그 뒤에 숨어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부끄러움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츠레가 회복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자기 사랑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증상을 형성하기 위해서 많은 에너지가 투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을 형성하기 위해 투자된 에너지를 즉각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증상은 교묘하게도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을 상실시켜서 에너지를 풀어낼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신경증의 교묘함이다.


 정신의학적 진단의 문제가 여기에 있는데, 현실신경증을 정신신경증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우울증이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신경쇠약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리고 영화를 보신 분들 중에 행동 관찰을 유심히 해보신 분들이라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강박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행동들도 나타내기도 한다. 이것을 강박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강박 성격이라는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이 둘의 차이에는 억압의 문제가 들어간다. 정신질환의 메커니즘 문제다. 이것을 알 수 없다면 현실신경증이 정신병으로 둔갑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따라서 낫지 않는 병으로 오해할 수 있다  


 츠레가 회복되면서 하루의 매니지먼트 하는 회사를 만들기에 이른다. 우리는 여기서 츠레의 프러포즈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내의 뒷바라지를 할 테니까 만화만 그리라고 했던 그의 프러포즈는 그가 진정으로 원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드러낸 증상은 그의 욕망이 현재의 직장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 현상은 츠레가 하루를 향한 사랑이 승화를 거쳐 궁극적으로 승격에 이르렀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우울증을 극복했다는 것만으로 유명인사가 되고 아내를 적극적으로 뒷바라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사랑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문제가 '우울증'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프로이트는 신경증자가 부모의 사랑을 요구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무조건 적인 사랑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루는 츠레에게 무조건적인 신뢰와 사랑을 보내주지 않았는가? 그 과정이 승화를 거치고 승격이 이뤄지면서 서로가 조금 더 성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영화에서 말하는 것은 '우울증 극복'이라는 흔한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에 의한 치료'라는 가장 이상적인 치료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제목에서 보이듯 츠레는 '동반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프로이트가 나르시시즘 서론을 연구하면서 말했던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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