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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May 22. 2024

나는 행복합니다(3)

극 중 증상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세 번째 세미나 시간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여러 사람들과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제 실제 경험들도 좀 이야기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준비한 내용과는 조금 다른 세미나도 되었던 거 같네요. 그럼 시작해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분량이 좀 많다 보니까 세미나 시간에는 충분히 다 이야기를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만수의 노모는 치매로 인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만수가 수발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도 만수는 잘생겼으니까 여자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친구가 바람이 나서 이별을 통보받습니다.  그런 것들에 시달리면서 만수는 잠을 잘 수 없게 되고 약국에서 수면제를 구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처방전을 받지 못했죠. 


 노모를 보살피는 것도 그렇고 여자친구와의 이별도 그렇습니다. 연인과 헤어지고 잠들기 어려워지는 경험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죠. 그게 꽤 괴롭습니다. 연애할 땐 좋아서 잠 안 자고 헤어지면 힘들어서 잠 못 자게 됩니다.   

 약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잠을 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걸 습관적으로 하는 경우도 관찰이 됩니다. 그런데 사랑한 만큼 아파야 하는 건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라는 노래가 있듯이요. 그걸 약으로 조절한다는 것은 사랑한 만큼의 고통을 감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자신의 연애상대와의 이별이 힘들고 괴로워서 그걸 잊기 위해서 약을 먹는 겁니다. 조금 더 극단적인 경우에는 연애는 안 하고 약을 먹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서로 약간의 관련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마약중독에 빠지는 사람들도 이 것과 관련된 정신작용이 있을 것으로 추측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과거에 어느 선생님이 부친상을 치르고 너무 힘들어서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면서 견디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약을 먹고 누웠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과연 약을 먹고 이 힘든 상황을 외면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질문이 생겼고 결국 약물복용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사랑한 만큼의 고통을 피하게 된다는 것은 그 이미지에 대한 애도를 실패하게 이끌 수 있습니다. 애도가 실패하는 경우에는 그 이미지가 삶에서 사라지지 않으려고 하죠. 그것을 정신분석에서는 유령이라는 말로도 표현을 합니다.


 잠시 딴 이야기를 했네요. 영화로 돌아가봅시다. 만수에게는 괴로운 일이 또 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형이 도박중독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만수에게 돈 내놓으라고 수시로 괴롭히죠. 폭행은 물론이고요. 생활비까지 다 털어가 버립니다. 이때 만수의 좌절이 얼마나 컸을까요? 물론 작품 속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결국 문학은 현실을 조금 더 축소하거나 미화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중독과 관련해서 이보다 더 곤란한 상황들을 뉴스를 통해 접하기도 하니까요.  도박중독만 그럴까요? 알코올중독이나 마약중독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무너진 정신작용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독성물질이 필요하니까 무슨 짓이든 하는 겁니다. 안하무인인 상태가 되는 것이죠.  


 보통 ‘중독’을 설명할 때 자주 도용하는 방식이 ‘습관’에서부터 시작이 된다고 합니다. 오래 하고 많이 하면 중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중독이라는 게 습관이라면 충분히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흥미로운 사례를 알고 있습니다. 아마 정신병원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분들이라면 유사한 사례를 알 겁니다. 


 알코올 중독으로 정신병원에 십 년을 입원한 사람이 있습니다. 병원생활을 모범적으로 했기 때문에 의사가 퇴원을 허락합니다. 그리고 가족도 동의를 하고요. 그래서 퇴원을 합니다. 그리고 병원 바깥에 나와서 국밥집에서 밥을 먹으면서 퇴원 기념 삼아 반주를 한잔 하게 됩니다. 이때 어떤 일이 생겨날까요? 술을 멈추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고 결국 식당 주인의 신고로 병원직원들에 의해서 재입원하게 되는 경웁니다. 

 개콘의 한 장면 같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약물 중독 역시도 같은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니까 비슷한 현상이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는 게 힘든 이유도 이렇다는 거고요. 해당물질이 들어가는 순간 정신작용의 움직임이 이상하게 변하는 겁니다. 병원생활은 술과 단절되게 만들어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술 한잔에 바로 무너졌을까요? 습관이 중독의 원인이라면 이런 사례에 대해서 설득력을 갖춘 설명을 해줄 수가 없습니다.

 

 만철의 경우는 도박중독이라서 설득력을 갖출 수 있을까요? 그럼 게임중독도 같을까요? 그렇게 중독을 설명하면 아주 편하게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치료가 빠를 수는 있지만 그 메커니즘은 상당히 복잡합니다. 특히 우리의 정신에는 경험 흔적들이 축적되어 있고, 작동하는 충동의 특수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중독을 결정짓는 것은 횟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물질이나 행위가 자아에 미치는 영향력에 따라서 초자아의 검열을 무시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어야 중독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중독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바로 초자아의 검열을 무시하는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정신병에서도 비슷한 작용이 나타기도 합니다.

      

 만철은 도박에 중독되어서 맨날 돈을 찾습니다. 그런데 도박빚이 점점 쌓이게 된다면 어떨까요? 결국 스스로가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감당이 되지 않는다면 책임을 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책임지지 못하면 어디론가로 도망을 가야 합니다. 어디로 도망가야 할까요? 자신의 책임이 없는 곳으로 도망을 가야 하는 겁니다. 바로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거죠. 이것은 자신의 죄를 책임지지 않으려는 사기꾼이나 범죄자들도 이런 선택을 하는 경우를 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거금을 빌려놓고 흥청망청 쓴 뒤에 자살해 버리는 그런 경우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형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은 만수는 과대망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종이에 숫자를 쓰면 돈이 되는 겁니다. 백지에 숫자를 쓰는 것이 돈의 기능을 해준다는 믿음은 마치 형의 소망을 대신해 주는 것 아닐까요?  돈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형에게 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형은 살아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만수의 정신현실에서는 일어나는 일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외부현실에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하죠. 만수의 정신에서 형은 아직 애도되지 않은 겁니다. 


 만수의 소망은 무엇일까요? 엄마랑 함께 사는 겁니다. 현실에서는 분리될 수밖에 없지만 그의 망상은 소망을 실현시킨 것을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망상에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요? 망상과 현실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의미를 탐색해야 합니다. 그리고 단서들이 등장하는 것들을 고려할 때 전혀 색다른 의미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만수의 망상에서 어머니는 스위스에 있었습니다. 왜 ‘스위스’일까요? 보통 스위스라고 하면 비밀금고가 유명합니다. 그리고 비밀주의 전통이 이어져내려 오는 것이죠. 스위스는 1934년에 금융비밀보호법이라는 것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금융 관계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습니다. 그런 내용이 법으로 제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밀자금의 은닉처나 돈세탁을 위해서 자주 활용이 되었습니다 2013년부터는 개방이 되었다고 해도요. 그리고 특징적으로 이런 망상을 드러내 보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스위스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사회문화적인 내용들이 망상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살펴볼 때, 만수의 망상은 ‘법에 의해서 지켜지는 비밀’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아니면 그 내용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망상은 어떤 기능성을 지니고 있을까요? 적어도 망상에서는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겁니다. 가족을 지키고 싶지만 도박빚 때문에 형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의 이미지를 떠나보낼 수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애도할 수 없으니 망상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돈을 주어야 할 형의 이미지를 붙잡아 놓을 수 있습니다. 만수에게는 자신의 증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내용이 있습니다. 만수가 입원을 할 때 수경에게 자신의 망상을 말해주는 장면입니다. 돈 문제가 바로 그거죠. 그런데 실제로 망상에 시달리는 경우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 망상의 내용을 쉽게 말해주진 않습니다. 주치의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죠. 자기 망상에 대한 판단이 함부로 들어간다고 하면 대화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편집증자들의 이런 태도를 어디서 볼 수 있냐면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의 한니발 렉터 박사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그는 스털링 외의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해주지 않았죠.

  저 역시도 정신병원에서 근무할 때, 주치의에게도 말하지 않는 망상을 저에게만 이야기한 경우가 몇 번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쪽지로도 받고 해서 그런 증상에 대한 소중한 단서들을 보고했는데, 글쎄요. 그렇게 그것을 활용하진 못해서 나중에는 따로 보고하진 않았습니다. 

     

 여기서 정신질환이 발병한 상태를 두고 정신과 신체의 균형이 무너진 것으로 대부분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에서는 그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 발병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정신병의 경우는 현실이 자신에게 위협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죠. 그냥은 견딜 수 없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신경증은 증상을 동원해서 현실을 견뎌내고자 하는 겁니다. 자아의 붕괴를 막는다고 하죠. 프로이트가 초기에 신경증을 설명할 때, 방어신경정신증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습니다. 현실의 거친 에너지를 견디기 위한 것으로서 ‘방어’라는 말입니다. 증상으로 삶을 견뎌내는 것이 더 힘들어 보이긴 해도 자아의 붕괴를 초래할 수는 없으니까요. 자아의 붕괴라는 것은 곧 죽음과도 같은 말입니다.

 

 만수에게 증상이 있다면 현실의 경제적 곤란이나 형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증상이 있음으로 그는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무척 중요합니다. 현실에서 그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 입다.


 카센터를 운영하면서 생활을 이어갔지만 궁핍한 생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만수는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와 여자친구와 형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남자라는 존재가 언제 가장 불안할까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가장 불안에 떱니다. 그 말은 곧 만수가 얼마나 불안에 시달리면서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만수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발병하고 입원하면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말을 한다는 것은 요구할 수 있고 그에 따르는 권리를 실천가능한 것입니다. 신경증 발병은 권리실천을 방해합니다. 따라서 어떠한 책임도 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많은 정신질환자들이 주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보다 고립을 선택합니다. 집안에서 잘 나오지 않죠. 그러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자신의 권리 실천으로 현실이 변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생각에서는 그런 걸 선호하고 좋아하고 싶죠. 생각은 그렇게 하지만 선택은 증상을 택하려고 합니다. 병리적 선택이 일어나는 것이죠. 


 만수처럼 과대망상이 중심이 되는 정신병을 두고 편집증이라고 합니다. 프로이트는 이 병을 두고 “현실에서 일어설 수 없으므로 자기만의 새로운 세상을 재구축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현실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현실의 좌표를 바꿔버림으로써 자아가 견딜 수 있는 현실로 가공된다는 겁니다. 

 만수처럼 편집증이 급성으로 발병한 경우에는 초반에 자기 관리능력도 완전히 무력해지기도 합니다. 증상이 자리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적 응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그만큼 주변에서 그 모습을 보면 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후 증상이 자리 잡게 되면 일상생활 부분이 많이 회복이 됩니다. 치료가 된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게 되기도 하죠. 거기다가 이것이 교묘한 것이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상태로서도 등장합니다. 일시적인 상태로 등장하는 경우는 구분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프로이트의 환자 중에서 늑대인간이 그런 케이스에 속합니다. 원래 부유한 귀족 가문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분석도 많이 받고 했었지만 전쟁 이후 집안이 몰락하고 나중에 프로이트에게 치료해 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프로이트가 국제정신분석 협회 설립하고 그래서 굉장히 바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에게 분석을 맡겼습니다. 그렇게 프로이트 제자들과 돌아가면서 분석을 했는데 일시적으로 ‘편집증’ 상태까지 진행이 됩니다. 물론 그의 편집증 진단에는 그만한 근거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강박증으로 되돌아오기도 했죠.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만수는 병동에서 실시하는 그림 그리기 프로그램에서 주황색으로 그림을 꾹 눌러서 그립니다. 정신병동에서 진행하는 요법의 하나로 진행이 됩니다. 개인적으로 정신병동에서 진행되는 이러한 프로그램과 치료효과 간의 상관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의 짧은 근무경험으로 따지면 그렇게 도움이 된다는 이미지는 받지 못했습니다. 


 주황색은 조금 독특한 효과를 지닙니다. 인지능력을 크게 제한할 수 있어서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게 하는 작용을 합니다. 그리고 즐거움과 사교적인 색이라고도 합니다. 만수가 왜 주황을 선택했을까요? 그는 현실에서 외면받으면서 즐거울 수가 없었다는 말이 될 겁니다. 그런데 그 이면의 자신은 즐거움을 추구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즐거움을 용납하지 않았을 겁니다. 


 만수의 발병상황을 다시 한번 되짚어 봅시다. 도박빚에 시달리던 형의 자살은 만수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치매에 걸린 노모마저 행방불명이 됩니다. 소중한 사람을 연속으로 잃어야 했던 만수는 반쯤 넋이 나갑니다.

 동네 이장과 경찰은 모친을 찾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만수는 그 와중에도 돈 문제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사실 그냥 봐서는 이해가 안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난이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만수의 정신력이 약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동안 너무 많은 갈등을 견뎌야만 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만큼 쇠약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경찰의 도움을 통해 만수는 어머니를 찾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옆에 누워서 혼잣말을 하죠.      


“엄마도 나 때문에 죽은 줄 알았잖아. 나 때문에... 무서워.. 밤에 이렇게 혼자 있으면 무서워... 엄마도 혼자 무서웠지...”     


 만수의 독백은 불행한 사건들이 자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는 자학하고 있는 겁니다. 형의 자살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가 짊어진 겁니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애도의 문제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한 어둠에 대한 두려움의 문제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등장하는 어둠 공포증에 대해서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엄마 아빠를 볼 수 없어서 무서워한다’라고 분석합니다. 그런데 사춘기 시절이 다가오면서 이 내용의 힘이 조금 약해지면서 좀 더 색다른 논리가 등장합니다. 

 저 역시도 실제 임상에서 사춘기가 거의 다 된 아동을 분석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어두움을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잠들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시각적 자극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분석을 진행하다 보니 그게 또 아닌 겁니다. 어둡다는 것 자체가 불확실성으로 이어지면서 그것이 불안을 일으키고 혼자서 잘 수 없게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혼자서도 잔다고 합니다.


 원래 만수의 독백에 대해서 어둠공포증 정도만을 생각했었는데 실제 경험이 더해지니까 조금 더 풍부하게 변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아이는 지금 혼자서 잘 잡니다.

 

 만수입장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돈’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계속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만수가 형의 부당한 금전 요구조차 감당하려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치매도 종이를 돈으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수 입장에서는 그것을 다 해주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갈등이 극심할수록 에너지 고갈은 가속화됩니다.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와도 그렇습니다. 죽음이 오기 직전에라도 그의 현실 좌표는 변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비참한 현실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수는 병을 통해 현실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치의는 만수의 퇴원을 준비하기 위해 어머니를 만나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어머니와 대면해서 만수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잡아뗍니다. 심지어 형과 함께 찍은 사진도 조작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장 박사에게 치료하는 척 괴롭히고 돈이나 밝히는 쓰레기라고 욕을 합니다. 병원에서 나가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장 박사라고 소리칩니다. 

 왜 이런 반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정신병원에서 근무를 해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듣게 되는 말 중 하나는 긴급입원을 한 환자들은 거의 대부분 퇴원을 요구합니다. 자신은 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죠. 나가서 일도 해야 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빨리 나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걸로 난동을 부리다가 보호실로 직행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런데 만수는 아닙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 비참한 현실과 대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퇴원하면 비참한 현실과 대면해야 합니다. 아무런 생산성이 없는 상태라고 해도 비참한 현실과 대면하는 것이 만수에게는 훨씬 즐겁습니다. 현실에서 고립되어 있는 것은 만수에게 아무런 즐거움도 없이 그저 고통만을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경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가난의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안정되지 않은 경제 상황으로 인해 만수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퇴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병원은 유일한 안식처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떠나면 다시 가혹한 현실에 의해 지겨운 삶을 견뎌야 합니다. 

 

 그런데 장박사는 만수의 반응을 보고 전기치료를 처방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손발을 침대에 묶어놓는 겁니다. 사실 묶어놓는 것이 상당히 폭력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이것도 의사 처방에 따라서 하는 겁니다. 특히 행동통제가 되지 않아서 마구 날뛰는 경우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전기 치료를 하면 사람이 축 늘어진다고 합니다. 어떤 환자들은 의사에게 다른 치료는 다 좋은데 제발 전기치료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도 합니다. 늘어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요. 하지만 어느 정도 의학적인 효과는 검증이 되어 있다고도 합니다. 물론 우울증 치료에 전기치료가 효과적이라는 이야기는 있으나 오히려 다른 방식의 정신작용이 일어나서 진정이 되는 경우도 가정할 수는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뇌를 리셋한다고도 하지만 정신작용을 검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지강박은 어떨까요? 이렇게 묶는 것은 고대의 도덕치료부터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는 환자에게 공포감이 들지 않게 해서 묶어두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물론 지나치게 오래 묶어둬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발생합니다. 그걸로 사망사건도 있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정신과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교육 가면 꼭 사지강박에 대한 내용도 듣곤 합니다. 그리고 좀 엄격한 곳은 묶어두는 시간도 다 정해져 있습니다. 장시간 묶어두는 법이 없는 거죠. 오래 묶어두면 허리도 아프고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근무를 교대한 수경이 라운딩 하면서 만수를 보러 들어옵니다. 만수는 수경에게 풀어달라고 부탁하지만 치료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을 듣습니다. 의사의 처방이기 때문입니다. 싫은 치료를 감당해야 하는 것에 만수는 분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딥니다. 현실의 가혹함이 훨씬 버겁기 때문입니다.


 사실 만수와 수경은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둘 다 서로를 보면서 조금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이 대비가 되는 것이겠죠. 정신질환이 발병되는 것이 현실의 뭇매를 견디기 위한 자아의 긴급조치라고도 합니다. 수경도 그렇지만 만수도 병을 통해 현실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만수의 꿈으로 다시 한번 되돌아가 봅시다. 수경은 만수에게 늘 친절했습니다. 병원 내 규칙을 어기고 치킨을 사주기도 하죠. 그런 것들이 만수에게는 하나의 즐거움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현실에서는 경제적 고통에 늘 시달려야 했는데 병원에서는 치킨을 사주는 사람도 있고 또 괴로운 현실에서 차단될 수 있으니 훨씬 좋은 겁니다. 


 수경의 문제는 해결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수의 문제는 해결되기가 어렵습니다. 해결되지 않을 과제들이 여전히 산적해 있기 때문입니다. 질식할 정도로 가혹한 ‘현실’입니다. 신경증은 자아와 초자아 사이의 문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신병은 자아와 현실의 갈등이라고 합니다. 이런 내용은 정신의학적인 진단명이 아니라 정신분석의 진단하에 따라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의학적 임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지점이 있는 이야기이긷  하죠. 


 그래도 만수는 가혹한 현실을 대면해야만 했습니다. 퇴원하고 유일하게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수경에게는 간단한 목례 정도를 남깁니다. 그가 장 박사에게 병원을 나가라고 소리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혹한 현실에서 차단되고 싶다는 것이죠.  이것이 만수가 보이는 과대망상의 직접적인 효과입니다. 현실에서 차단된 망상에서는 갈등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해야 만수의 자아가 붕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병은 그렇게 선택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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