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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May 10. 2017

블랙스완

욕망의 실현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블랙스완이라는 영화는 약간의 미스터리함을 남겨준다. 영화 주인공인 니나가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행동을 해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행동의 이해를 놓고 우리는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다. 정신분석적인 행동 분석과 행동주의 이론은 충분히 대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한 가지 두고 볼 수 있는 것은 결코 정신질환의 문제를 행동주의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만약 행동주의 이론처럼 영화가 설명된다면 우리는 기꺼이 지겨움을 견뎌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잠시의 반짝 열풍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은 마치 프랑스의 신소설 운동과 같은 맥락이 되지 않을까? 재미없어서 사라진다는 말이다.      


 인간 행동을 분석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다만 정해져 있는 규정은 없다. 우리는 추후 해석의 여지들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만약 영화 내용을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이 영화는 좋은 영화도, 재미있는 영화도 아닐 테니까.           


 블랙스완이라는 경제학 용어가 있다.      


극단적으로 예외적이어서 발생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사건     


 이것을 리비도의 경제성에 빗댄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론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증상이 촉발되었을 때, 현실에서 급속도로 멀어진다. 그 맥락에서 블랙스완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증상이 촉발되는 트리거라는 의미로도 기능할 수 있다.      


흑조는 순수성이 아니라 관능 덩어리다.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블랙스완이라는 작품은 백조의 호수를 변주한 작품이다. 백조와 상반되는 흑조를 등장시켜서 경쟁관계를 연출한다는 것이다. 니나는 완벽한 백조를 연기하지만 흑조를 연기하지는 못한다. 그녀가 청초하고 순수하지만 관능적인 매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관능성의 부족은 우리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대상 이분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남성 무의식 환상을 자극하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성은 어머니 동일시를 포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답해줄 대상이 어머니뿐이라면 관능성은 어머니와의 동일시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니나 어머니를 바라보아야 한다. 3류 무용수였던 그녀가 자기 꿈을 이어 줄 대상으로 니나를 선택해 양육한 것이라면 우리는 흥미로운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니나와 어머니의 동일시 문제와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사건들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니나의 관능성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는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잘자라 니나

 잠을 자고 일어난 니나의 등에 상처가 나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니나의 엄마는 "또 긁었니?"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처녀성의 상실을 소망하는 의미하는 작용일지도 모른다. 연극을 위해서 확보되어야 하는 관능성은 그녀의 처녀막이 상실되는 지경에 이르러야만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소녀에서 숙녀로 성장하는 '초경'의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허락되지 않은 관능성에의 갈망 등의 문제를 우리는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분석 중 사비나는 등에 무엇인가가 닿았다고 이야기했다. 융은 곧바로 알아채고 그것을 자위행위의 의미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 방식과 마찬가지로 니나 역시 자위행위를 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식기에 손을 댈 수 없었던 그녀는 등으로 그것을 대체했을 것이다.       


 우리는 니나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여성 정체성을 하나의 가면으로 설정한다면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여성의 내면이나 외부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이 발견되는 곳은 바로 가면 그 자체라고 이야기된다. 아름다운 얼굴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될지는 그 여성만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관리방법의 결정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피부톤이나 화장의 문제도 포함되지 않는가?     


 관능과 순수사랑의 두 간극은 남성에게도 중요하지만 여성에게도 두말할 것 없이 중요하다. 숙녀와 창녀를 오가는 여성의 심리적 지위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이 되어 있다. 무의식이란 그렇게도 교묘한 것 아니었던가? 순수사랑만을 이야기하는 니나는 반쪽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상적인 숙녀의 모습만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반대편에 숨어있는 창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흑조는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백조와 흑조가 각각 이상적인 숙녀와 창녀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한 여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니나는 정체성의 형성에 실패했던 것일까? 관능을 살리지 못한 니나는 순수한 소녀의 모습만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에게는 성의 장벽이 높다. 이 것은 성장해오면서 공통적으로 적용이 되는 문제이다. 그러나 '성'이 정체성과 다른 의미로 기능할 수 있다면 그 장벽이 현저하게 낮아질 수 있다.     

이론은 알고 있지?!?

 성실한 발레리나였던 니나에게 지적되었던 것은 관능미의 부족이었다. 연출을 맡은 토마스는 직접 알려주기 위해서 키스를 시도하려고 한다. 그것도 되지 않으므로 감독은 자위행위를 추천하기도 한다. 마치 성추행을 연상시키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감독의 의중은 다를 것이다. 소녀를 여성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주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그의 경험세계 안에서의 일이다.     


 니나의 금욕적인 생활은 관능의 발달에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관능의 요소는 이론만으로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경험이 따라와야 한다. 그래야 그 지점에서 한발 나아갈 수 있다. 이론이 먼저 한 발 앞서가면 경험이 따라와야 한다는 것은 이미 들뢰즈가 지적했던 것 아니었는가? 성이 왜 교육되는가? 이후에 따라오는 경험에서 일어날 문제들을 예방하기 위해서 아닌가?     


 니나는 라이벌인 릴리를 질투하기도 한다. 릴리라는 이름에 주목하자. 백합의 꽃말이 <순결,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릴리의 이름은 흑조와 그렇게 어울리지는 않지만 반대로 니나와는 잘 어울린다. 두 사람은 친해져서 나이트클럽도 가고 남자도 유혹한다. 그 모든 행위의 결과로 동성애 행위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니나와 릴리가 무엇을 위해서 동침하게 되었는가?이다.      


 그러나 다음날의 결과는 이상했다. 릴리는 니나와 나이트에 간 적이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 것들은 정신병적인 메커니즘과 어떤 연관성을 가질 수 있을까? 프로이트 사례에서 <정신분석 이론에 반하는 편집증 사례>를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례의 주인공은 누군가가 자신을 쫓아온다는 망상 때문에 경찰에 신고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담당 변호사는 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의 변호사는 프로이트에게 잠시 의뢰를 하게 되었다. 사실 분석을 할 이유가 없던 그녀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사정사정해서 자유 연상을 하게 된 케이스이다. 분석의 결과로 그 여인은 동성애 충동에 대한 방어를 나타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편집증임을 밝힌다.      

릴리

 니나도 동성애 충동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남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동성애 충동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던 사람이 바로 릴리였을 것이다. 물론 우정을 나눌 수도 있었다. 그것이 승화다. 그러나 흑조에 대한 욕심이 동성애 충동의 승화를 막았다. 그녀의 성적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동성의 대상이 필요한 상태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녀의 무의식에서는 그것이 충분히 일어나서 환영으로 보일 수 있었겠지만 현실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동성애 충동을 방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동성애 충동을 방어하고자 하는 그녀의 소망은 편집증을 불러일으키고 놀라울만한 관능미를 만들어낸다. 소녀는 여자가 되지만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경험을 통해서 관능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의식에 있던 유아성 이론을 통해서 불러일으킨 관능의 요소이다.      


 니나는 자기 욕망의 만족을 위해서 남자를 밀어내는 히스테리자처럼 행동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동성애 환상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환상의 문제가 유일하게 관능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소망을 방해하고자 하는 정신적인 세력들도 있다. 그것들은 그녀의 박해자로 등장할 것이다. 박해자의 궁극적인 의미는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 아닌가? 양육자들에 의해서 올바로 자라길 바랬겠지만 그녀의 욕망은 그것을 위반하면서 작품을 승화시킨다.      


 승화가 무조건 좋은 것의 형태로 등장한다는 착각은 여기서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광기는 이렇게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질투가 승화된다면 그것이 상대의 자리를 뺏기 위한 싸움이 된다는 점에서 승화 역시 양면성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     

거울 속의 너는 누구야?

 만약 우리의 욕망이 실현된다면 존재 가치는 어떻게 될까? 욕망하지 않는 존재가 살아있는 존재일까?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니나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자신의 마지막 흑조 무대를 강행한다. 흑조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모두 이루었다는 것은 그녀의 흑조가 마침내 완성되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흑조가 완성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다. 무대 위에서 번져가는 니나의 피는 그녀의 죽음이 타당하다는 것을 상징해주고 있다. 그녀가 욕망이 그곳에서 상실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그녀의 어머니가 욕망하고 있던 탁월한 무용수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의 문제가 발생한다.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래서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금욕적으로 살아왔던 니나에게 관능의 요소는 획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 것은 현대인들에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특유의 히스테리가 발생할 수 있다. 성에 대한 지나친 억제로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있는 히스테리 문제도 이러한 난제를 포함하고 있다. 사실 히스테리로 유명한 안나 O에게는 성행위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는 점은 프로이트에게도 의외의 사실이었다. 그래서 안나 O는 가장 유명한 사례임과 동시에 가장 독특한 사례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어머니의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딸의 처절함을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 관계에서는 어머니의 위치가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지위가 격하되었기 때문인데, 그 작용은 무의식에서 나타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남성에게 있어서의 격하 문제처럼 등장하는 것이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로 등장할 수 있다는 시사 해준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여성 동성애자가 되는 심리>라는 논문에서 이미 밝혔던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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