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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May 1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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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증이란 결핍으로 일어나는가?

 '병' 혹은 '증상'으로 명명되는 것들은 '결핍'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뭔가 부족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반대로 한번 생각해보자. 너무 뛰어난 능력이 족쇄로 기능하게 되진 않을까? 기존의 생각에서 벗어나서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 같다. 과연 '결핍'이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결핍'의 이미지에 대해서 영화는 전면적으로 반박을 하고 있다. 주인공인 여장부는 엄청나게 뛰어난 동체시력을 가지고 있다. 짧은 순간에 지나가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능력은 대단한 능력이다. 다만 그 기능에는 '제한'이 걸리게 된다.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그에 한계가 있다면 능력으로 인정받기가 힘들다. 숨겨놓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동체시력이 역설적으로 그의 행동을 제한한다. 


 일상생활에서 기능이 제한된다면 그때부터는 한계가 부과되면서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장애'라는 다른 말로 표현이 된다. 장애라는 말의 뜻에는 기능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의미가 있다. 그의 능력이 장애라는 허울을 뒤집어써야만 했다면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단지 자기 능력을 가지고 혼자서만 즐기는 것 이외에는 활용할 수가 없다.


 장부는 어릴 때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선글라스를 끼고 다녀야만 했다. 이 모습은 받아들이기에 조금 거부감이 있다. 멋 부리기 위한 '선글라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개인 사정을 알 수 없는 입장에서는 오해가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다. 만약에 벌레를 끔찍이 무서워하는 건장한 남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에게 벌레를 잡 아달라는 부탁을 한다면 그는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는 '덩치는 산만해 가지곤..'이라는 비아냥 거림이 되기 일쑤다. 그가 벌레를 무서워한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이해가 없을 때는 그럴 수밖에 없다. 당사자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일방적인 오해가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선입견이다.


 장부의 뛰어난 능력은 생활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능력을 어떻게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능력을 발휘하면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에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축소'시켜야 한다. 선글라스가 그 도구이다. 물론 눈을 보호해야 한다. 능력의 대가로 '실명 가능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느 날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그 누구라도 충격적인 상황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잠시 눈이 보이지 않는 '시야 암전증'과는 다르다. 의사의 진단은 장부에게 충격을 일으킬 수 있다. 전문성이 가진 예측가능성은 비전문가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장부는 자신의 기능을 제한하기 위해서 볼 수 있는 것을 '드라마'로 한정시킨다. 훨씬 넓은 세상을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지만 tv로 제한해버린 것이다. 그의 능력은 '장애'가 된 것이고 따라서 증상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봉인'이라는 이미지로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의 동체시력으로 인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제한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장부의 상황은 신경증에 시달리는 당사자들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경증으로 인해서 일상생활의 효율이 심각하게 떨어져 버리는 때문에 현실에서 후퇴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장부는 시력으로 관음증적인 만족을 즐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시각을 통해서 즐기고 쾌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기능 제한은 일종의 자기 처벌로 생각할 수도 있다.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욕망의 처벌이라는 것이다. 아마 그가 자라온 성장과정도 여기에 기여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신체에 나타나는 문제들이 심리적인 내용과 긴밀한 관계를 가질 때가 있다. 심리적인 영향이 신체적인 상태의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신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는 것도 가능하다. 단순한 기능 저하라고 생각했던 내용이 실체를 가지는 증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다행스럽게도 그는 자신의 능력을 살릴 수 있는 일을 한다. 그 일이란 CCTV관제센터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능력은 이 일에 있어서 최고의 효율을 자랑한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찾아낼 수 없는 장면을 그에게는 손쉬운 일이다. 시각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발휘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그의 능력을 활용한 삶은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냥 하루하루 같은 일만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인가? 비 오는 날과 맑은 날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차이가 없을 때는 문제다. 마치 좀비와 같은 상태이기에 변화를 느낄 이유도 없다. 시간을 구성하는 부속품과 같은 방식으로 결정지어진다.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신경증도 마찬가지다. 매일매일의 차이가 없다. 중요한 것은 삶에서 증상이 어떻게 기능하느냐에 있다. 증상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걸 원하는 사람도 있다. 불편을 호소하고 실패에 저항하려 하지만 결국 그 안에 머물고자 한다. 좀비와 같다는 것, 마치 '시체'와 같다는 말이다.



 우리 삶에서 가장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일까?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알 수도 없고 심지어 고통까지 불러오는 것을 찾는다면 무엇이 있을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해주는 것은 아무래도 '사랑'이라는 말 외에 다른 의미를 지닌 말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장부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은 그에게 찾아온 사랑이 있었다는 말이다. 좀비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그 누군가가 있다는 말이다. 

 

  젊은이의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


 장부의 동체시력은 어쩌면 사랑에 대한 강렬한 열망일 수가 있다. 어린 시절을 함께한 수미를 찾음으로 그의 삶에는 변화요소들이 짙어진다. 심지어 게임이지만 자기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기도 한다. 그 순간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동안 살아오면서 족쇄처럼 느껴졌던 능력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사랑. 타자에 대한 강렬한 끌림이다.  프로이트는 '일하고 사랑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말로 정신건강을 정의했다. 장부의 삶이 건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칭찬이라곤 할 수도 없었던.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던 그가 칭찬을 할 수 있고,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 바로 그 '끌림'으로 인한 것이다.


어느 날, 수미가 납치범의 표적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동시에 그는 눈을 조심하라는 의사의 지적도 받는다. 그의 눈은 위험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수미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모두 짜낸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할 것이다. 그 누구라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결말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사랑하는 수미를 위해서 자신의 눈을 희생한 장부는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영화 결말을 여기서 이야기하기 보단 직접 감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는 시각을 잃어버린 결과로 더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그의 삶을 인정받게 해주었을까?


그의 동체시력은 '능력'이었다. 그러나 그 능력이 족쇄가 되어 장애라는 허울을 쓰게 되었을 때, 그는 인정받을 수 없었고 괴롭기만 한 상태였었다. 시각을 잃었다는 사실은 부정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시각의 상실이 그동안 지속되어오던 '자기 처벌'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사랑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자기희생'이라고 말해야 할까? 시각의 상실이 불러온 것이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을 제한시켜오던 족쇄에서 풀려났다. 해방된 것이다. 동체시력이 있을 때, 그는 자기 이미지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자기 처벌의 문제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자기 이미지를 구축했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실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장부의 시력상실은 그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사건이었다. 만약 그가 시각에 의한 쾌감에 의존하는 삶을 유지했다면 영화의 결말은 어땠을까? 이 결말이 정말 우리가 상상하는 뻔한 결말이었을 것 같다. 그가 시각에 의존하고 있었을 때, 자기 자신의 또 다른 발전 가능성을 묶어두고 있었다. 증상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증상이 사라지게 되었을 때, 그의 삶은 '승화'의 정도로 그치지 않고 '승격'할 수 있었다. 이 것은 상당한 의미를 내포한다. 신경증을 극복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성숙'이라고 한다. 증상이 자신의 능력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여기서 신경증이 결핍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인지 따져볼 수 있다. 정신질환이 일어나는 것이 결핍이라고 볼 수 있을까? 결핍이라고 한다면 성숙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성숙으로 투자될 에너지가 없다면 증상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자신의 정신문제에 대해서 의외로 쉽게 단정을 짓는 경우가 있다. 어린 시절에 사랑을 받지 못해서, 혹은 트라우마 때문에, 태어나면서 타고난 것이라서.... 합리화를 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정말로 결핍이 있고 그 자신이 증상을 이겨낼 능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경우 설득해도 별 의미가 없다. 그때부터는 치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다. 증상과 더불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다. 그러나 이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젊고 힘이 있을수록 희망도 크다. 그러나 좌절도 그 이상으로 크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의 결론은 어떻게 내려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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