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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편 Sep 25. 2020

내가 사과도 아니고 그렇게 정성스럽게 깔 필요는 없잖아

몰래 본 인사평가

나는 내가 사과인 줄 알았다.

너무나 정성스럽게 나를 돌려깎기한 상사의 인사평가에...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에 출근을 했다.

정신없이 시간은 흘렸고, 오후가 되었다.


상반기 인사평가 결과 볼 수 있더라고요. 들어가 보세요.


친절한 후배의 귓속말.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지난달, 상반기 인사평가가 있었다.

내가 자기 평가를 하고, 상사와 동료평가까지 하면, 진짜 인사평가가 시작된다.

상사가 나의 강점, 단점을 선택하고, 글로 적어서 나를 평가해야 한다.


모든 직장인이 그렇겠지만, 인사평가기간에는 소위 말년병장처럼 떨어지는 낙엽에도 몸을 사려야 한다.

아니 최소한 눈치는 봐야 한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는 당연히 중요하고, 평가기간에는 오히려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실수하지 않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나의 평가가 이루어지는 1주동안은 투명인간처럼 최대한 튀지 않게 조용히 업무를 했고, 눈치껏 야근도 했다.


그렇게 숨죽여 보낸 며칠의 시간이 지나, 인사평가는 잊혀 가고 있었는데, 인사평가 결과가 나왔다고??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인사시스템에 로그인을 하고, 평가결과를 볼 수 있는 메뉴를 클릭했다.

나는 2명의 상사 평가자가 있다. 물론 다수의 동료들의 평가도 있다.

글로 쓰인 평가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전에는 등급만 볼 수 있었다.


나의 상사 평가자 2명은 나의 직속 상사, 나의 직속 상사의 직속 상사이다.

나의 직속 상사는 나의 예상보다 더 좋게 평가를 해주었다.

그 평가 결과가 최고는 아니었지만, 보통의 점수와, 글로 적은 나의 평가도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으흠, 생각보다 잘 나왔는데?!!'

이렇게 생각을 하고, 다음 평가를 눌러보고는 뜨악했다.


이게 뭐야!!!


그분은 당장이라도 육두문자를 얼굴에 날려주고 싶을 만큼 정성스럽게 나를 까셨다.

평가 점수는 당연히 낮았고,

빼곡히 글로 적은 나의 평가는 너무 촘촘하게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나의 직속 상사보다 더 많은 글을 썼다.


이렇게 까지 정성스러울 필요는 없잖아?!!


물론,

나의 상사는 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만큼의 권한도 가지고 있다.

만약, 나에 대한 상사의 평가가 부정적이라면,

그에 대한 나의 책임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부정적인 평가가 실제로 보이는 것이 없는, 객관적인 근거를 내놓을 수 없는 부정적인 평가였기 때문에 억울하기보다, 화가 났다.


업무의 스킬 부족, 실적의 부재, 소통의 어려움 등과 같은 수치화 가능하거나, 주위의 동료들도 납득할 수 있는 항목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아닌, 그냥 개인적인 감정이 더 보이는 평가였다.


그 글을 읽는 순간 나는 느꼈다.


나를 싫어하는구나!



그래도 이분을 상사로 모시고, 일을 한 게 5년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그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나를 이렇게 봤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니, 불과 몇 시간 전에 보고를 들어가서 더 잘 보고하기 위해 애쓰고, 미소를 보이고, 마음을 닮아 고개 숙여 인사한 것 까지 모조리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노력을 한다 해도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바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사 평가의 내용을 들은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도망쳐!!!


그렇다면, 그동안의 나의 승진 누락, 낮은 인사평가점수는 다 이분의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11년을 일하면서, 일머리가 없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일을 해왔다.

나와 일한 것이 너무 좋았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타 팀들도 담당자가 아닌 나를 찾아 문의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내가 이 정도로만 보였다니....


내가 애쓴 모든 순간들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인사평가를 본 후, 퇴근까지 3시간 남짓을 흔들리는 감정을 다 잡으며 일을 해야 했다.


그분이 정성스럽게 나를 돌려 깎기 해주신 덕분에,

나는 큰 상처와 의욕상실을 얻었다.


최소한,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부정적인 평가가 아주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이렇게 흔들리지 않았을 것 같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서 열심히 일한다고 한들,

이 분이 나를 좋게 볼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였다.


나는 인사평가를 좋게 받고 싶다.

아니, 보통만 이라도 받고 싶다.

최소한 보통은 받아야 월급을 깎이지 않고,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일을, 아니 지금은 누구보다 많이 일을 하고 있는데, 월급까지 깎이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러한 평가를 받고 가만있고 싶지는 않다.

내가 좋은 인사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이 팀을 그분이 떠나거나, 내가 떠나야 한다.


그분이 떠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내가 떠나는 것은 내가, 나만 할 수 있다.


이제 떠날 준비를 하자.

내 가슴속에 있는 사표를 그분 얼굴에 통쾌하게 던지며,

떠날 준비를 말이다.


내가 떠날 곳은, 떠날 시기는 당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팀에서 버텨내기엔 내가 너무 억울하다.

내가 아깝다.


내일부터, 나는 그분 앞에서 더 당당하게 굴기로 했다.


나는 그분에게 최고 점수를 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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