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기가 아닌 (늦은)휴가기
입사 이래로 이렇게나 많은 국가적 사건이 '빵빵' 터지고, 나에게도 이렇게나 많은 '출장명령'이 떨어진것은 처음이다.
책상 위에 놓여진 달력이 3장이 남는 동안 휴일근무는 무려 32일, 다녀온 해외 출장 기간만도(평양을 포함해) 100일이 조금 안된다.
번아웃 증후군인가.
사무실 책상 머리에서 눈에 촛점이 없는 시간이 길어지고, 퇴근 후 방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도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쯤.
에라 모르겠다.
대한항공 마일리지찬스를 통해 10월의 2째주 무작정 후쿠오카 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것도 무려 4박 5일.
변명도 딱이다. 계획에 없던 여행이지만, 쓸 이유는 있다. 회사 규정상 10월까지 남은 연차를 다 소진해야 한다.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틈틈이 호텔도 예약하고, 그러다 또 어영부영 한달이 지나니 휴가날이 다가온다.
10월 7일 일요일 야근.
이 야근만 무사히 넘기면 화요일부터는 휴가다.
하늘은 참 맑은데, 휴일에는 일이 참 없는데, 출근길 집 앞 산에서 시커먼 연기가 기둥처럼 솟구쳐 오른다.
정말 휴가가 아니었으면 버틸 수 없는 정도의 야근이다.
출근한 오후 2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 까지, 함께 야근하는 후배의 얼굴은 출근해서 잠깐, 퇴근 전 잠깐 볼 정도의 최근 '역대급' 근무.
퇴근 후에 짐을 챙기겠다는 생각은 사치였다. 쓰러져 잠들고 일어나니 저녁 6시다.
그래도 방 한켠에 옷들을 대충 우겨넣은 트렁크를 보니 '휴가'라는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난다.
친절하게 한국어로 물어보는 후쿠오카 공항의 입국 심사에 당황스럽다.
"여행왔어요.", "5일 있을거에요.", "혼자에요."
라고 대답하면서도 한국어로 말해도 되나 싶다.
정말 가까운 후쿠오카다. 2시 비행기를 타고 출발, 첫날 묵을 숙소에 도착하니 5시가 안됐다.
호텔에 트렁크를 그냥 던지 듯 넣어두고 본격적인 휴가를 시작한다.
휴가의 시작은 역시 맛집.
퇴근하기 이른 시간인데, 맛집 찾아가는 길에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하나 둘 보인다.
퇴근하는 직장인들은 왜 다 저런 표정일까.
퇴근하는 나도 저런 표정일까.
후쿠오카에서는 초밥보다 유명하다는 모츠나베.
그 중에서도 제일 유명하다는 집을 찾아왔다. 작은 식당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일본에서 보기 드문 커다란 식당.
'나 유명한 음식점' 이라고 크기로 말을 하는 것 같다.
일본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규모가 큰 식당에서 만족한 적이 별로 없다.
호기롭게 들어간 식당에서 예약이 꽉 차서 6시 40분에는 나가야하는데 괜찮냐고 묻는다.
식당 입구에서부터 마음이 상한다.
"I'm OK"
사실 혼자와서 시간을 보내며 대화할 사람도 없고, 배가 너무 고파 다른곳을 찾을 힘도 없다.
그리고 1시간이면 다 먹고도 남을 시간이다.
1인 패키지를 시키고, 이왕 맛집이라고 하니 추천 메뉴인 우설 스테이크도 시킨다.
또 빠져서는 안되는 '나마비루'도 한잔.
육회는 쫀득하고, 초무침은 유자의 향과 어우러져 새콤달콤 하다.
우설 스테이크도 우설의 식감도 살아있고, 느끼하지 않다.
대창을 양배추와 미소베이스 육수에 끓여 나왔는데, 기름진 부위인 대창을 달큰한 양배추와 함께 끊이니 느끼함이 배가 되는 그런 느낌.
하지만 그런 느끼함이 적당히 시원한 맥주 한모금으로 내려간다.
배도 부르겠다. 달큰하게 얼굴도 붉게 올랐겠다.
식당을 나와서 후쿠오카 시내를 걷는다.
부른 배와 함께 식당을 나오니 벌써 해가 지고 어둑하다.
일단 큰 도로와 떨어진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조금 더 걷다보니 도시 한가운데 길게 뻗은 물길이 보인다.
어둑한 저녁, 검은 물에 누런 텅스텐 전등이 빛난다.
그 빛나는 전등이 시작되는 곳으로 눈을 돌리니,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들어가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일본어가 아니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의 상점들.
겨우겨우 인삿말 정도나 하는 비루한 일본어로는 들어갈 수 없는 것 같은 포스가 뿜어져 나온다.
일본어를 못하는 나를 자책하며 숙소로 발길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