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19(수)
25.03.19(수)
<생일 편지>
곧 다가오는 엄마의 생신을 맞아 편지를 썼다.
고명딸 수현이에요, 로 시작하는 편지에
그 동안의 철 없음에 죄스러워 하고,
일과 양육을 훌륭히 해낸 엄마를 존경스러워 하는
마음을 가득 담았다.
고명딸.
하도 들어서 감흥도 없는 그 단어가 오늘은 유독 빛이 난다.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아들 둘 사이에 딸 한 명 있는 것을 얼마나 반갑게 여겼는지가 그 안에서 느껴진다.
중학생이 되면 “어여쁜 여중생이 되었구나.” 하시던 말씀.
고등학생이 되면 “성숙한 여고생이 되었구나.” 하시던 말씀.
그 당연한 소리 안에 어떤 마음이 담겼는지도, 이제는 알 것 같다.
엄마를 ‘엄마’라는 함부로된 기준으로 재단해왔다.
평생을 워킹맘이었던 엄마가, 내 삶에 부재했던 순간들을 서러움으로 기억했다.
엄마가 된 지금은, 그 모든 시간이 그저 경이롭다.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해낼 수 있었을까.
내가 교통사고가 났을 때, 열이 40도 가까이 펄펄 끓어올랐을 때,
엄마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돌파해나가는 슈퍼 우먼 같은 사람이었다.
두려움과 죄책감에 휩쌓이지 않고 그렇게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을 묵묵히 헤쳐나가는 멋진 여성이었다.
남편이 바빴던 시기에, 매 주말을 혼자 아이를 데리고 놀러 다니던 때가 있었다.
한번은 돗자리를 챙겨 공원 소풍을 갔는데,
주변을 돌아보니 죄다 부부가 함께 온 가족들이었다.
순간 엄마 생각이 났다.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해외근무만 하시던 아빠의 직업환경 때문에
우리 가족은 몇년에 한번씩 아빠와 만나며, 눈물의 재회와 이별을 반복했었다.
그러니 주말에 엄마 혼자 자식 셋을 챙겨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 건 우리에게 당연한 일상이었다.
자주 공원에 갔다. 지금도 기억나는 평촌 중앙 공원에.
돗자리를 펴 자리를 잡고, 나는 동생과 롤러브레이드를 실컷 타고,
오빠는 잠깐 있다가 금새 친구들과 피시방에 가버리고,
엄마는 돗자리에 앉아 책을 읽곤 했다.
그 시간을 좋은 추억으로만 기억했었는데,
이제는 그 돗자리에 덩그라니 혼자 놓여진 엄마가 떠올라 눈물이 난다.
버글버글한 가족들 틈에 혼자 앉아 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시절엔 독박육아라는 말도 없었는데.
우리 엄마 참 대단했다.
엄마라는 사람을 미워했을 때는, 사실 나 자신을 가장 미워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생각하면, 내가 엄마를 속에서부터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 때로는 용감한 면모, 매일 글을 쓰는 것 모두 내 안에 물든 엄마의 모습이다.
가끔 내 딸이 커서 나에게 서운했던 일을 마구 쏟아붓는 상상을 한다.
내가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그러고 나면 정말이지 너무 끔찍하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를 것 같다.
여자에서 엄마가 되는 그 모진 세월을 견뎌온 것도 모자라
딸에게 고개 숙여 미안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까,
“딱 너 같은 딸 낳아봐라.” 하시던 말씀이 이제는 이해가 된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고개숙여 울면서 미안하다 하시던 엄마.
이제는 나를 용서해달라는 말을
두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가며 편지 위에 썼다.
왜 엄마는 늘 죄인이 될까.
내 딸을 바라보며 그 마음조차 헤아린다.
엄마의 생신 편지를 쓰면서
내 딸을 바라보고, 딸인 나를 바라보고, 또 내 엄마를 바라본다.
모진 세월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끝내 각인 되었다.
엄마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리고 존경합니다.
편지를 쓰고 난 뒤 또 쓰는 이 글 위에도 적어본다.
엄마 생신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