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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의 메커니즘

내 탓이 아닌 걸 알면서도,

by 수현

‘모든 게 다 내 탓 같다.’

성폭력 피해자나 어떤 범죄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이

겪게 되는 심리 중 하나다.

자신이 잘못한 게 손톱만큼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모든 게 다 내 탓 같다고 느끼는 마음.

그것을 죄책감이라 한다.


피해자들의 죄책감이라 하면,

보통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피해자들도 바보가 아니다. 그러니 실로 내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분명히 안다.

무언가 잘못된 사고를 하고 있어서 드는 감정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피할 수 없는 상황적 압박이다.


예를 들어보자.

학교를 다니다가, 학교 안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나는 중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학교 측은 아무런 사과나 조치가 없었다. 그 사고와 대처 행태는 소문을 타고 일파만파 퍼져나가 뉴스 사회면에 실릴 정도의 이슈가 되었다. 학교는 뒤늦게 나에게 사과를 했지만,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슈가 너무 커져버려 학교에 다니던 교사와 직원은 모두 해고되고, 학교는 운영과 재정에 큰 타격을 입어 결국 폐교를 하게 된다.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이 사건 때문에 모두 먼 거리의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사건을 발생시킨데 내가 일조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이 모든 파장을 지켜보는 나의 마음은 어떨까.

바로 그 엄청난 상황적 압박 자체가 죄책감이다. 내 탓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 압박의 기류와 느낌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피해자가 경험하는 죄책감의 모습이다.


물론 주변에 ”네 잘못이 아니다. “라는 것을 힘주어 말해줄 사람이 있다면, 그 압박에 쉽게 압도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는다면? 네 잘못이라 말하는 사람도 없지만,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는 채로 고통 어린 사람들 표정을 지켜보게 된다면? 그 엄청난 사회적 기류에 연약한 인간이 혼자 저항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죄책감(상황적 압박감)을 가진 인간이 자라면 매 순간 위축감을 느낀다. 상대방 미간에 조금의 주름이라도 가면 내가 무슨 잘못을 한건 아닌지 자동적으로 안절부절못해진다. 마음이 그 압박감을 너무 잘 기억해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적 고립은 곧 죽음을 뜻하기 때문에, 그 사회적 압박은 인간에게 강력한 위기의식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번 그러한 압도적인 경험을 한 인간은 아주 사소한 상황에도 똑같은 강도의 위기의식을 느낀다.


나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다. 당시 나는 피해 사실을 고백함과 동시에 내 가족이 무너져 가는 걸 봤다. 내 피해 사실은 극구 함구해야 하는 비밀이 되고, 가족관계는 내 앞에서 처참한 지옥으로 변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기에 나는 그 상황적 압박을 고스란히 흡수했다.


성인이 되어, 모든 것이 잊혔다고 느낄 때쯤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남편과의 새로운 관계를 경험함과 동시에 나는 내가 자주 같은 포인트에서 참을 수 없이 화를 내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결백을 무너뜨리는 류의 일이었다. 남편이 의도치 않더라도 내가 “미안해지는” 상황을 만들면, 난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남편과의 관계 외에도, 나는 내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내 삶의 결백을 통해 증명하려고 했다. 지나치게 정직하려고 했고, 지나치게 친절하려고 했고, 관계에 있어서 일말의 후회도 남지 않도록 나를 갈아 넣어 헌신했다. 그래야 내가 나중에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의식적으로 알진 못했지만, 내 마음 기저엔 늘 그런 불안이 깔려 있었다. 내가 잘못한게 아니다. 내 탓이 아니다. 내 안에 부재한 그 확신감을 나는 내 삶을 통해 증명하고, 또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Have to' 를 버리자. 요즘 내 인생 모토이다. 나는 주로 열심히 살자는 말보다, 힘빼고 살자는 말에 더 힘을 얻는다. 왜 나는 그런 식으로 동기부여를 얻을까? 늘 의문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잘 살지 않아도, 그렇게 증명하지 않아도, 그때 그 일은 정말 네 잘못이 아니었어. 행여나 네가 미래에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게 되더라도, 과거에 경험했던 그 일까지 다 네 탓이 되는건 아냐. 그러니 이제 힘을 빼자. 죄스러운 기분으로부터 자유하자. 이제는 나를 용서하자.


내가 힘빼자는 말에 더 힘을 받는 이유를 이제는 알것 같다. 물론 한순간 깨달음으로 뇌리에 박힌 그 느낌을 지우긴 어렵겠지만, 앞으로의 삶은 그 각인을 지워가는 과정이 되었음 한다. 그래서 마침내는 그 굴레를 훌훌 털고 일어나 마음껏 자유해지기를. 언젠가는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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