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와 가해자 사이
여중 여고를 나온 내가 가족이 아닌 남자를 만난 건 대학교 밴드 동아리가 처음이었다. 이후로 밴드 생활이 이어지면서 나는 남자애들이 사랑에 빠지고 실연하고 군대에 가고 애인 때문에 친구랑 절교하고 취업하고 결혼하는 모든 성장의 과정을 정말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똑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A가 연예인의 섹스비디오를 노트북에 담아 공연장에 들고 왔다. 나에게 끌려 나온 남자 친구는 자기도 보고 싶다고 펄펄 뛰었다. 보라고 찍은 게 아니잖아!하다가 울음이 터졌고 이유를 모른 채 사과를 받았다. 다르구나 처음 느꼈다. 내가 홍대 신촌 강남 바닥에서 그렇게 술을 개 처마셨는데도 성폭력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이유가 그들의 애달픈 오빠질 덕분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사는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추적단 불꽃
이 책을 빌릴까 말까, 고민했다. 사서 선생님도 무서워서 못 읽었다고 했다. 다른 사서 선생님이 건너뛰고 읽으면 된다고 해서 빌려왔다.
안 나온다.
피해자들의 동영상 이야기는 안 나온다.
이 책에는 정말 지극히 평범한 여대생 2명이 어쩌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 대가로 얼마나 큰 고통과 공포 속에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스스로 적어,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고 맥락도 어수선한데 그 때문에 내용이 더 깊게 전달됐다.
나는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 저 이들은 모르고 했는데, 알고 난 후에도 책임을 다하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세차게 밀어 넣고 있다. 미디어는 가해자들의 죄와 처벌이 아닌, 피해자를 앞세운 포르노만 보도하고 싶어 한다. 사진이라도 하나 보내달라고 그렇게 떼를 쓴단다. 솔직히 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명목으로 책 속에 뭔가 자극적인 장면이 등장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남의 고통으로 레크리에이션 하려 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저들의 삶이 파괴될까 봐 너무나 걱정이 된다. 그리고 남자와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외모에서 여성성을 지우며 남성과 집단으로 맞서야 한다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약간 걱정이 된다.